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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리나이트

- AA

<스트로베리 나이트>

<스트로베리 나이트>

<스트로베리 나이트>는 혼다 테츠야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2010년 일본 후지 TV에서 만든 단편 수사 드라마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하천 옆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사건을 맡은 형사 히메카와는 강력계에서는 드물게 젊은 여성이다. 여타 남성들에게 곧잘 ‘공주(일본어로 ‘히메’는 공주를 뜻함)’ 혹은 ‘아가씨’로 불리며 차별을 당하지만 불타는 승부욕과 뛰어난 수완으로 팀장까지 맡고 있다. 피해자는 생전 소심한 사람이었으나 갑자기 연초부터 매월 2째 주 일요일마다 외출을 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태도가 180도 변하였다고 주변인들은 진술한다. 과연 매월 2째 주 일요일마다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히메카와와 동료들은 수사 도중 또 다른 10구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사체유기가 아닌 연쇄살인임을 감지한다. 이 사체들이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비밀사이트에서 매월 2째 주 일요일에 벌이는 살인쇼의 제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며 히메카와는 마침내 사건의 진실들과 대면한다.

살인쇼의 주최자인 범인 A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한다. 어지간한 나쁜 짓은 하다 보면 질리기 마련인데 어느 날 친구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친구의 목에서 새빨간 피가 솟구쳐 오르나 싶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친구의 얼굴을 물들였다. 딸기처럼 새빨갛게. 그리고 방금 전까지 살아서 옆에 있던 친구는 순식간에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그것을 목격한 나는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친구의 그 리얼한 죽음이 시시하던 일상에 활력을, 살아갈 힘을 불어넣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죽음과 삶. 그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기에 살인쇼를 기획했다.

살인쇼의 관객이었던 B는 말한다. 쇼에 입장할 때 손님 중에서 무작위로 한 사람을 그 날의 제물로 선별한다. 그 시스템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흥분, 무사히 살아서 객석으로 들어갈 때의 성취감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무대 위에서 죽어가는 걸 보며 나는 살아있다는 생생함과 우월감을 다시 한 번 만끽했다. 지인이 산 제물이 되어 무대 위로 올라온 순간, 놀랐지만 솔직히 평소 이상으로 희열을 느꼈다.

살인쇼의 처형자 역할을 한 범인 C는 말한다. 약물에 중독되어 나를 학대한 부모로 인해 나는 한 번도 살아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숨만 쉬는 더러운 구더기 같았다. 그런데 내 몸이든 타인의 몸이든 베면 똑같이 빨간 피가 나온다. 나는 그저 그 빨간 피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흘리는 빨간 피가 내게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면 나도 인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스토르베리 나이트 살인쇼에 가담한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확인한다. 온 몸에 딸기가 범벅이 된 듯 피로 물들어 죽어가는 다른 이를 보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른 그 어떤 때보다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주최자 A는 주인공 히메카와에게 묻는다. 너도 매일 잔혹한 시체를 보면서 스스로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모두 다를 바 없이 똑같은 것 아닌가?

이 질문은 히메카와를 건너 드라마를 보는 사람에게도 돌아온다. 모두가 깜짝 놀라며 살인쇼에 가담한 범죄자들과 자신이 어찌 같을 수 있냐고 도리질칠지 모른다. 그런데 상황을 살짝 바꾸어 보자. 갖고 싶은 물건을 사지 못하여 속상한 당신에게 뉴스 속의 앵커가 사건 소식을 전한다. 라면 살 돈조차 없어 삶을 연명하지 못했다는 어떤 이의 죽음. 안타까움 속에 당신은 잠깐이라도 위로받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는 삼시 세끼는 먹고 살잖아’ 하고 말이다.

더 이상은 하루도 같이 못 살겠다고 남편과 크게 싸우고 나온 동창회에서 이혼한 친구가 ‘남편 그늘 없이 혼자 사는 여자’의 서러움을 이야기할 때 나의 남편은 이러이러하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그 친구를 위로하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없는 친구보다 그래도 있는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며 남편에 대한 화가 슬그머니 누그러진 적은 없었을까?

사회 속의 삶에서 타인과의 비교는 불가항력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특히 타인의 불행은 더더욱 그렇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 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의 가사가 모임에 나가면 ‘별 일 없이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 나빠하더라는 장기하의 어머니 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듯, 타인의 큰 불행은 나의 작은 불행을 잊을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빠른 방법이다. 남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차지할 때 느끼는 상대적 행복보다 자존감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 행복이 인생에 있어 더욱 큰 만족과 성취감을 안겨준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알기에 그만큼 쉽게 확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살인쇼의 주최자와 관객들 역시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수단을 스스로 고민하여 찾지 않고 손쉽게 타인과의 비교에서 얻으려 했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가 기획되고, 벌어지고,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히메카와는 범인 A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범인과 다른 점은 타인의 죽음과 그 새빨간 피를 보며 자신의 삶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연쇄부녀자폭행사건의 피해자였던 그녀는 범행을 당하던 그 순간 자신이 흘렸던 피, 그리고 그 범인을 잡으려다 목숨을 잃은 담당 형사의 피를 늘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느꼈던 고통스러운 시간에 갇혀 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죽은 형사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계속 싸우려 했고 싸워서 이기고자 했다.

극의 끝에서 자신은 늘 승자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 당당하던 A는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목에서 피가 나오자 기겁을 하며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히메카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은 C를 끌어안으며 당신과 나는 똑같은 사람이라고, 살아있다고 다독인다. <스트로베리 나이트>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 새빨간 죽음으로의 초대장을 의미했다. 그러나 드라마 밖 현실에서 삶을 살아내는 ‘살아있는 우리들’에게는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려고만 든다면, 타인의 고통을 같은 마음으로 끌어안고 보듬으려 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는다면 또다시 잔혹한 쇼가 계속 될 지도 모른다는 새빨간 경고장인지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이 단편 드라마는 내년 초, 연속드라마(우리나라의 미니 시리즈와 같음)로 제작이 결정되었다. 주연 배우진은 단편과 똑같이 캐스팅되었다. 주인공 히메카와 역을 맡은 타케우치 유코는 우리나라에서도 <런치의 여왕>,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으로 인지도가 높은 배우다. 단편 드라마가 꾸준하고 충실히 제작되고, 인기배우들이 단편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며 잘 만들어진 단편 드라마가 장편으로 제작되는 일본의 제작 현실이, 한류의 거품에 물타기를 하려 혈안이 된 국내 방송사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응답 2개

  1. 딜레마녀말하길

    제겐 와 이 생각나는 다케우치 유코네요. 이러저러해서 폐지되었다 지금은 만이 단막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드라마의 현실이지만 간혹 명절 특집극들이 반짝 뜨기도 하죠. 단막은 신인들의 등용문같은 경향이 강한게 한드지만 그래도 요즘은 꽤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 출연하기도 하고 노희경씨같은 기성작가들이 대본을 쓰기도 하더군요. 좋은 단편이라서 장편으로 제작되는 일본의 제작 환경과 같은 맥락은 아닐지라도 시청률만 보장된다면 어떤 아이템이라도 건질 각오가 되어 있는 게 한드의 제작현실이 아닐까 싶어요. 일드도 b급무비같은 허접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다양한 소재와 시각이 부러운건 사실입니다.

    • 딜레마녀말하길

      단어앞뒤 기호를 사용하니 프라이드, 장미없는 꽃집, 드라마스페셜이 빠졌네요. 수정도 편집도 삭제도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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