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1 –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고병권(수유너머R)

“이윤이 아니라 사람” (9월17일 월스트리트에 있는 국립원주민박물관 뉴욕지부 건물 앞

“이윤이 아니라 사람” (9월17일 월스트리트에 있는 국립원주민박물관 뉴욕지부 건물 앞

세계가 동시에 들썩이고 있다. 세계의 주식시장이 동시에 곤두박질친다. 한 기업은 다른 기업에, 한 나라는 다른 나라에 운명을 완전히 의탁하고 있는데, 모두가 제 발등의 불을 보느라 남을 돌볼 여력이 없다. 3년 전 위기는 금융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정부의 재정 위기로 돌변했다. 해소된 줄 알았던 위기가 확대 전가된 셈이다. 이제 부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건 기업들이 아니라 국가들이다. 미국, 유럽, 일본. 지난 수십 년간 세계경제를 장기판 훈수 두듯 했던 이들이 이제는 졸(卒) 한 칸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외통수에 걸려든 느낌이다.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낮춘 금리가 사실상 제로라는 수학적 한계에 직면해 있고(게다가 물가가 천정부지이다), 재정파탄 때문에 경기진작을 위한 재정확대는 꿈도 못 꾼다. 속수무책. 정부당국자들 스스로 그런 무책임한 말을 서슴없이 내놓고 있다. 적대적인 이념의 위협도 없고 제국 간 식민지 쟁탈전도 없는데, 위기는 한 세기 전 세계가 직면했던 그 수준에 딱 와버렸다.

그림  9월 24일 점거 현장에 있던 피켓

그림 9월 24일 점거 현장에 있던 피켓

그러나 지금 들썩이는 게 주식시장만은 아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세계 민중들의 시위는 그리스와 만났고 스페인의 광장을 거친 뒤 런던으로 이어졌다. 높은 등록금에 항의해서 캘리포니아와 런던의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했듯이, 아니 그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칠레의 학생들이 거리를 점거했다. 모두 지난 금융위기 이후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도 기업과 정부는 위기라는 이유로 정작 위기에 빠진 대중의 삶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심지어는 최소 안전망을 제공하려는 노력 자체를 불온시 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미국 정가에 단어 하나가 논쟁의 중심에 섰다. 바로 ‘계급전쟁(Class Warfare)’이라는 말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재정지출과 증세 요구에 미국 우파인사들이 오바마에게 일종의 ‘빨갱이’ 딱지를 붙인 것이다. ‘증세’에 대해 그들은 입을 모아 ‘계급전쟁’ 선포라고 흥분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과학 개념 중 현재의 인구 분할과 갈등을 지칭할 수 있는 것으로 ‘계급’보다 나은 걸 찾기 어렵다.

세계 곳곳, 그야말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뛰어나오고 있다. 누군가는 광장에 진을 치고 누군가는 건물을 장악하고 누군가는 첨탑에 올라간다. 무슨 혁명가의 대단한 정세판단을 가져서도 아니고, 미래 사회에 대한 숭고한 비전을 가져서도 아니다. 오히려 앞길이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한데 대표라는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있고, 아니 어떤 때는 위기를 핑계로 가난한 이들을 노골적으로 방치하고 비열하게 추방하는 걸 보면서 그냥 뛰쳐나오는 것이다. 법과 제도를 들먹이는 것은 이제 한가한 소리가 되었다. 이미 삶의 위기가 그것을 초과해버렸기 때문이다. 법이 안 되고, 제도가 안 되고, 논리가 안 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제 그것들을 바꾸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점거’가 시위의 지배적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거는 과거의 바리케이트나 전통적인 농성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이해와 요구를 걸고 방어적 자세로 버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을 열고 모두에게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사람들은 권력자들에게 말하기에 앞서 서로에 대해 말하고 듣고 싶어한다.

9월 24일 점거 장소에서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고 다음 행동의 전략을 논하는 사람들.

9월 24일 점거 장소에서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고 다음 행동의 전략을 논하는 사람들.

이번에 월스트리트 시위를 취재하면서 재밌는 말을 들었다. 점거자 중 한 사람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와서 나는 나에 대해서 알게 됐다.” 자기 이해(self understanding). 내 답답한 마음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점거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이전에 ‘나’와 ‘우리’를 이해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갑자기 사람들은 장터를 연 것처럼 떠들썩하게 음식을 해먹기 시작했고 토론을 하고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잠자리를 보살폈다. 어떤 점거자는 “우리는 여기서 지금 셀프 거버닝(self-governing)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배’, ‘통치’, ‘정부’ 등으로 번역되곤 하는 ‘government’라는 말은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사물들의 배치와 운용이라는 원래의 말에 더 다가갔는지도 모르겠다). 언뜻 보기에는 조잡해 보이지만 점거 장소에 설치해둔 조리기구들과 침구류들은 공동체와 사회, 삶의 거번먼트에 대한 태초의 질문이 만들어진 장소처럼 오히려 숭고해보인다. 이들이 점거한 공원이 참된 의미에서 공동의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거번먼트를 새로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들 나라의 거번먼트, 즉 정부가 자신들이 점거의 장소에서 알게 된 거번먼트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깨닫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점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난 여러 점거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매장점거, 평택 대추리 사람들의 마을 점거, 미국산 소고기 파동 당시 시민들의 서울 광장의 점거, 용산 남일당 사람들의 1년여에 걸친 점거, 신촌 두리반 사람들의 점거,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점거, 단 한 명의 점거에서부터 수십만 명의 점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새로운 거번먼트를 실험하고 있다.

(계속 이어짐)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2 -꽃을 든 점거자

응답 1개

  1. 리슨투더시티말하길

    점거의 꽃인 명동해방전선이 빠졌네요.. ㅎㅎ http://blog.jinbo.net/md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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