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5․16 직후의 ‘밀수왕’ 처형

- 권보드래

1962년 봄, 5·16 쿠데타 이후 설치된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을 통해 또 한 명이 처형당했다. 성명 한필국, 나이 37세, 혐의는 밀수였다. 한필국은 평안도 태생이다. 상업학교를 졸업, 분단 후에는 국영백화점 점원으로 일했고 1·4 후퇴로 UN군이 후퇴할 당시 함께 월남했다. 끝까지 밀려와 부산에 자리 잡고 미군 부대서 흘러나오는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냈다가, 1960년 밀수에 손을 댔다고 한다. 비행기 및 탱크 엔진을 달아 선박을 쾌속선으로 개조한 후, 달러상들의 자금을 받아 쓰시마에서 옷과 장난감, 라디오와 기계류 등을 밀수입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경비선이 있었지만 간단히 따돌릴 수 있었고, 일본에 갈 때는 1인당 3백만~3백50만환을 받고 밀항자들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총 8역여환 어치를 밀수입했다 하니 어지간한 규모이긴 했던 듯하다.

1960~70년대를 통해 개발독재정권이 ‘자립경제’의 구호 하에 밀수를 엄격하게 단속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양담배라도 피우다 걸리면 어지간한 공무원은 모가지가 떨어진다던 시절이었다. 리츠 크래커도 쉬쉬해야 할 선물이었으니, 양주 정도 되면 위험한 뇌물이었을 터이다. ‘미제’가,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수입한 물품이 넘쳐났던 1950년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5·16 쿠데타 직후, 조속한 ‘민정 이양’을 약속하고 있을 무렵부터 쿠데타 주도세력은 밀수에 특별한 반감을 드러냈다. 대대적 압수 수색 후 밀수품을 한데 모아 소각시키는 위압적 행사도 가졌다.

‘혁명재판소’가 등장한 것은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이다. 이후 9개월 동안 혁명재판은 총 7백명 가까운 피고를 재판정에 세웠다. 부정선거사범, 정치깡패와 함께 4월항쟁 후 1년간 자라난 각종의 사회운동을 중벌로 다스렸으며, 아울러 밀수범 단속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나 정치깡패 유지광·임화수 등을 ‘구악 일소’라는 명분 하에 사형장으로 보내면서, 혁명재판은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사형시키고 한국전쟁 당시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해 유족회를 결성했던 사람들에게 무기징역까지 선고했다. ‘구악’뿐 아니라 4월항쟁 이후 고양되었던 ‘사상적·정치적 자유’도 혁명재판의 공적이었던 것이다. 민족일보사 사장이었던 조용수의 경우, 해방기엔 진주에서 좌익에 맞섰고, 한때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동포들의 ‘북송’을 막기 위해 철로 위에 드러눕기까지 하는 결기까지 보인 청년이었으나, 그런 우파적 면모로도 중립화통일론 일체를 사갈시한 쿠데타 세력의 사냥을 피할 순 없었다.

‘빵’을 약속하면서 등장했던 만큼 혁명재판소에서는 경제적 숙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필국이 체포된 것은 그 와중에서다. 거물급 밀수범들은 대개 도피한 다음이었는데, 한필국은 이미 밀수업에서 손을 떼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한다. 혁명재판소에서는 한필국이 일당 10여 명과 등록증도 번호판도 없는 지프로 각처를 종횡했고 무장한 호위까지 두었다고 고발했다. 본시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일시 밀수업에 손을 댔을 뿐이요, 도주한 거물급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이며, 거주지를 서울로 옮길 정도로 개전의 정이 뚜렷했다고 항변했으나 혁명재판소의 선고는 가차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일벌백계’ 삼아 희생되어야 할 정황이었다.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장은 국군의 현역 장교가 맡았고, 공포일부터 “3년 6월까지 소급하여 적용”했다. 범죄 당시엔 죄가 아니었더라도 혁명재판소의 새로운 규정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실제로 한필국은 1960년 12월 이미 체포된 바 있었는데—이후 손을 뗄 작정을 하게 됐던 것 같다— 당시 선고는 집행유예 2년에 불과했다. 관세법으로 처벌한다면 밀수는
그 정도 범죄였던 것이다. 혁명재판소에 낸 상소이유서에서 변호인은 “정치의 무궤도성 내지 부패상”이 밀수의 근본 원인이었던 만큼 “대해 속에 부유하는 빙산의 일각” 같은 한필국을 극형으로 다스릴 순 없다고 썼다. 사실 ‘밀수왕’, ‘밀수의 여왕’으로 소문났던 신흥무진회사 사장 부부 중 남자는 혁명재판소가 아닌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0년형을 받았고, 여자 쪽은 1962년에야 체포되어 가벼운 형으로 그쳤다. 훨씬 거물이란 평판이었던 두엇도 혁명재판소가 해산된 이후에야 체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1년여 복역한 후 사면되었다. 한필국은 말하자면 애매하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한필국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상소이유서에서도 이 점을 적시했다. “실제 거물을 놓치고 다만 체포된 송사리 중에서 가장 중한 자를 동법의 최고형인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타당하다면(…) 입건되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 중한 자가, 다시 그 자가 각각 최고형인 사형의 선고를 받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혁명재판소는 꿈쩍하지 않았다. 상소를 기각, 사형 판결을 확정지은 바로 다음날 한필국은 형장에서 희생된다. 밀수= 사형이라는 공포의 도식을 만들어 내기 위한 희생이었다. 잇따라 피아노 밀수, 시계 밀수 등으로 명명된 몇몇 사건의 주범들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다행히 희생된 것은 한필국 하나로 그쳤다. 혁명재판의 서슬이 지나가고 나서는 중형을 받았던 밀수범들도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뿐인가, 밀수 단속은 여전했지만 기업 차원에서의 대규모 밀수는 공공연해져 1960년대 말에 가면 “진짜 밀수대왕은 박정희”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법에 의해 살해당한 자의 시신을 가로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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