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You know? this is harlem!

- 권용선(이본의 다락방 연구실)

이 건물의 3층에 “이본의 다락방”이 있다.  photo by 김택균

이 건물의 3층에 “이본의 다락방”이 있다. photo by 김택균

여기, 맨해튼 웨스트 136번가. “이본의 다락방(yvonne’s attic)”에 몇 명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공부한다. 읽고, 쓰고, 번역하고, 외국어로 토론한다. 그리고 간소한 일상. 함께 밥을 지어먹고, 대화하고 산책하고 요가하고 장을 본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함께 나누기 위해, 불과 얼마 전까지 뉴욕의 맨해튼과 이타카, 그 옆의 뉴저지 그리고 서울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그들은 2011년 9월, 할렘의 한 오래된 아파트 3층에 둥지를 틀었다.

그래, 여기는 할렘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뉴욕이 엠파이어스테이트와 월스트릿, 소호와 센트럴 파트로 반짝이는 곳이라면, 할렘은 그 반짝이는 도시의 어두운 이면, 범죄와 빈곤의 집합소로 상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할렘은 우리의 조악한 상상력보단 훨씬 ‘근사한’ 곳이다. 토니 모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는 숨쉬기조차 고통스럽지만, 도시의 겨울이 어떤 고통을 안겨주든 사람들이 묵묵히 참아내는 까닭은 백인놈들도 그렇거니와 그놈들 머릿 속에서 나오는 온갖 못된 짓거리를 피해 레녹스 거리에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기 때문이었다….교회, 가게, 파티, 여자들, 남자들, 우편함(하지만 고등학교는 없다), 가구점, 거리의 신문 가판대, 밀주를 파는 술집들(그러나 은행은 없다), 미용실, 이발소, 주크박스를 틀어주는 가게, 아이스크림 수레, 넝마주이, 당구장, 먹거리 시장, 마리화나 장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클럽이며 조직, 그룹, 교단, 노조, 학회, 결사, 수녀회, 연합 등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1920년대 후반을 무대로 한 소설 속의 레녹스 거리와 지금 레녹스 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동안 고등학교와 은행은 생겼다. 그리고 6번의 폭동이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건으로 시작된 1968년의 시위를 제외하면 모두 인종 차별과 경찰의 폭력이 그 원인이었다.

연구실 내부와 사람들  photo by 김택균

연구실 내부와 사람들 photo by 김택균

할렘(이스트 할렘 위쪽과 웨스트 160가 위로는 남미출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여기서는 흑인 할렘에 관해서만 이야기 하겠다)에 본격적으로 흑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고, 위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에는 흑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이 만개하며 ‘할렘 르네상스’의 시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6번의 싸움과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이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뉴욕시 빈곤지역의 재개발)의 결과 많은 흑인들이 죽거나 할렘에서 밀려났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할렘에는 진짜 흑인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풍부한 혼돈’의 공간이었던 할렘에 스타벅스, M&H,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자본의 상점들이 침투하기 시작했고, 오래된 흑인들의 회합장소와 식당들은 관광지화 되어 갔다. 이와사부로 고소의 표현을 빌자면, 줄리아니의 젠트리피케이션은 할렘을 ‘가난한 정연’의 공간으로 바꾸어 버렸다.

어떤 우연이 우리를 할렘으로 안내했을까. 뉴욕이라는 도시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맨해튼의 가장자리, 어찌 보면 가장 많은 뉴욕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가장 뉴욕적이지 않은 동네, 할렘과 만나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있는 웨스트 136번가는 비교적 조용한 할렘의 주택가이다. 우리가 할렘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두려움과 경계심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약간의 호기심과 친숙함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총과 마약, 무너질 듯 쌓여있는 쓰레기더미와 판잣집은 적어도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 버리는 날을 잘 지키는 인사성 밝은 이웃들이 사는 곳, 제법 넓고 깨끗한 인도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마이클 잭슨과 엘라 피크제랄드, 듀크 엘링턴이 공연했던 아폴로 극장과 카스트로가 묵었던 테레지아 호텔이 있고,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말콤 엑스가 암살당했던 오류봉 무도장과 유명한 흑인 예술가들이 살았던 아파트 건물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뉴욕 시티 칼리지가 있는 곳. 이곳이 우리가 있는 할렘이다. 이 장소들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또 매번 토니 모리슨이 말했던 레녹스 거리의 풍경들과 마주친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을 때 집주인 이본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You know, this is harlem!”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알 듯 모를 듯 했다. 할렘은 하나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운동이며 생활방식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이미 할렘이 아니지만 또한 동시에 여전히 할렘이기도 한 어떤 곳에 있다.

할렘의 길들 photo by 김택균

할렘의 길들 photo by 김택균

이곳의 이름은 <이본의 다락방>이다. 이본 할머니의 3층짜리 아파트 꼭대기에 있는 2베드 공간에서 우리는 생활한다. 이곳에서 멤버 중 두 사람은 의식주 생활 일체를 해결하고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이곳으로 출퇴근한다. 애초에 뉴욕에 어떤 공간을 만들고자 했을 때, 당연히도 우리의 꿈과 포부는 엄청난 것이었다. 서울의 수유+너머 연구실에서 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모아 강의를 하고, 누군가를 초대해 강연을 듣고, 세미나를 열고 단단한 일상의 규칙들을 지켜나가면서 친구를 사귀고 활동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 하지만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뿐이었고(멤버 중 한 명의 비자 만료시기를 고려했을 때) 뉴욕의 어마어마한 공간 랜트비와 그에 비해 대단히 협소한 규모 그리고 높은 생활 물가 등을 고려하면서 원하는 활동을 모두 실험할 만한 공간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애초의 원대한 꿈들 중에서 가능한 것들을 추려서 내실 있게 해나가기로 다시 마음먹어야만 했다. 연구실 운영을 위한 자금의 상당부분은 고 아무개 회원이 출자하고 있지만, 나머지 세 명의 멤버들도 매달 약간의 회비를 내면서 함께 활동을 만들어 간다. 물론 금전적인 부조 이외에도 서로의 공부를 봐주거나 먹거리를 선물하는 방식으로 일상의 경제를 만들어 간다.

<이본의 다락방> 연구실의 문은 공식적으로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려 있다. 물론 멤버 중 두 명이 이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외출하지 않는 한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이곳의 공식 언어는 영어다. 세미나는 물론 생활 언어까지 영어를 1차 언어로 사용한다. 때문에 누군가는 날이 갈수록 점점 과묵해지면서 눈치만 는다. 매일 점심 식사는 연구실에서 다 같이 먹는다. 당번을 정해서 식사를 준비하는데, 대체로 한식으로 차린다. 이것을 위해 멀리 있는 한국 마트까지 장을 보러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음식에 대한 애정과 정성은 식을 줄을 모르는 셈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는 할렘 일대를 산책한다. 간혹 책에서 읽은 것들과 친구들에게 들었던 내용들을 실제로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시간의 공식 언어도 영어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함께 요가를 하기도 한다.

지금 연구실에서 가장 정성을 쏟고 있는 중요한 공부는 ‘번역’이다. 멤버 중 두 명이 한국어로 출판된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다른 두 명의 멤버와 함께 그것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그 밖에도 지금 3개의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데, 화요일 오전에는 맑스 세미나, 수요일 오전에는 문학이론 세미나, 그리고 월,수,금 오후에는 영어로 글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한다. 공간의 문을 연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지금이야 모두 조신하게 ‘열공’하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또 어떻게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릇 공부란 책상 앞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고, 지난 시간들이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남은 시간 동안 온몸으로 할렘과 만나고 할렘을 배울 수 있길 바란다. 혹시라도 이 근처를 지나가는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 먹거리를 들고 오시면 더욱더 환영.

* 김향수가 번역한 이와사부로 고소의 <뉴욕열전>(갈무리, 2010)와 김선형이 번역한 토니 모리슨의 <재즈>(1992, 들녘)은 할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이다.

응답 1개

  1. 말하길

    용선, 이본의 다락방 소식 잘 들었네. 굳이 한국음식으로 식단을 차리는 이유라도? ㅎㅎ 작지만 알찬 코뮨이군..많이 배웠어. 코뮨의 일상을 만들어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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