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눈이 보배란다. – 2, 눈이 밝아지는 방법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마음의 안경을 관점이라고도 하는데 세계관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역사관 등에서 ’관(觀)‘은 관점의 준말이란다. 관점은 첨퓨터의 운영 프로그램처럼 뇌의 운영프로그램인 인식체계이며(틀)이고 가치체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만약에 뇌 속에 있는 이 마음의 운영프로그램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안다면 작동 원리를 이용하여 눈(마음의 안경, 관점. 체계화된 배경지식, 인식틀, 가치체계)을 밝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겠구나.

수안이가 세 살 때의 동영상을 보니까 장난감이나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들고 있던 것을 아무데나 풀떡 던져 버리고 다른 것을 집어든다. 엄마가 아무리 잘 정돈을 해놓아도 수안이가 잠깐만 놀면 온 방안이 난장판이 된다. 만약에 수안이가 커서 살림을 제대로 하여 집안에 있는 살림살이를 집합 개념에 따라 비슷한 것은 묶고 다른 것은 나누어 분류한 다음 모두 일정한 위치에 넣어 두었다면 필요할 때에 눈은 감고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집안을 정리하듯이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이 안경의 굴절과 색깔을 갈고 닦는 거란다.

수안아. 지난번에 네가 다이아몬드 같은 영혼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에는 또 하나의 아주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어떤 쪽에서 빛이 들어가든지 면의 각도와 굴절이 빛을 조절하므로 빛이 내부 한 점에 모였다가 다시 표면으로 반사된단다. 나는 마음의 눈을 바로 그 한 점에 빗대고 싶단다. 인간의 머리는 컴퓨터와 달리 입력된 사실과 출력된 (가치에 물든)해석이 다르듯이 다이아몬드는 똑같은 빛을 받지만 반사되는 것은 다양한 빛깔이란다.

만약에 면의 각도와 굴절이 불규칙하다면 내부의 그 한 점을 어떻게 만들 수가 있겠니. 마찬가지로 네가 본 것 즉 경험을 집합 개념에 따라 정밀하게 범주화하는 것이 각도와 굴절을 일정하게 다듬는 과정이란다. 범주화란 성질이 같은 것들을 묶고 다른 것들을 나누어 집합의 경계를 짓는 작업이란다. 그러면 범주끼리의 관계에 따라 체계가 생기는데 체계의 꼭지점에 하나의 정점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정점에 신이든 에너지든 돈이든 세계관으로 볼 때는 존재의 제일 원인이 자리접거나 가치관으로 볼 때 궁극적인 가치가 자리할 것이다. 만약에 네 배경지식의 체계가 너의 인식틀이며 그 인식틀이 너의 안경이고 관점이 된다면 어찌해야 네 눈이 밝아지겠니. 네 경험들을 정밀하게 범주화하고 체계화하는 것, 즉 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정리하는 것이 네 안경의 굴절과 색깔을 다듬는 방법 아니겠니.

즉 눈이 밝다는 것은 문제를 잘 풀 수 있다는 것이고 문제를 푼다는 것은 문제 상황과 관련된 정보, 개념, 지식, 이론, 상식을 너의 배경지식의 체계 안에서 상하나 전후나 좌우로 관련짓는다는 거야. 그렇게 되려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 거야. 중국 송나라 때 사마광이라는 어린아이가 있었더란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한 아이가 물항아리에 빠져 이미 물속에 잠겼는데 다른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은 곁에 있던 돌을 들어 항아리를 내려쳐 깨뜨리고 친구를 구했단다.

사람이 항아리의 물에 잠겼으니 항아리의 물을 빼야 한다는 것은 상황을 전과 후로 역전시켜 관련지은 것이고, 물을 빼려면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목표와 방법을 상하로 관련지은 것이고, 깨뜨리려면 큰 돌로 힘껏 내리쳐야 한다는 것도 목표와 수단을 상하로 관련지은 것이다. 항아리에 돌을 던져 깨뜨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문제 상황에 상식과 주변에 돌이라는 조건을 관련지어 문제를 해결했다. 마치 퍼즐 맞추기 같아서 상하전후좌우로 관련된 선을 끝까지 따라가야 문제가 풀리지 않겠니. 그렇게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온전한 경험을 얻으며 그래야만 그 경험이 재배치되며 그래야만 쉽게 꺼내서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니 눈이 밝아지지 않겠니. 눈이 밝아지려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문제 상황과 해결책을 잘 모르면 그와 관련이 없는 고정관념에 끌려가게 되지만 생각을 끝까지 밀고나가 확신이 서면 어설픈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게 된단다.

컴퓨터의 눈인 운영체계는 고장 날 때까지 똑같지만 인간의 마음의 눈인 운영체계(인식틀)는 심사하고 숙고하다가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즉 새로운 경험이 있을 때마다 뇌세포(뉴런)들끼리 축색돌기(세포 몸에서 뿌리처럼 돋아난 것)로 새롭게 연결되면서 죽을 때가지 수정되는 거란다. 뇌세포의 숫자는 일생동안 죽는 것과 새로 생기는 것이 비슷해서 타고난 그대로이지만 자라면서 뇌의 부피가 커지는 것은 세포들을 연결하는 신경섬유 다발들이 커지는 것이란다. 경험의 재배치에 따른 범주화와 체계화가 뇌의 운영체계를 수정하여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데 그래야만 마음의 안경에 굴절은 적어지고 색깔은 옅어져서 사물을 더욱 잘 보인단다.

이러한 이치를 공자님이 잘 가르치셨구나. ‘배운 것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헛수고이고, 홀로 생각에만 빠져 있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子曰 “學而不思면 則罔이오 思而不學이면 則殆니라) 어떤 지식이나 개념을 언어나 수식 따위 기호로만 익히고 왜 그런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머릿속에 또 하나의 잡동사니가 생겼을 뿐이니 배우기는 했지만 아는 것, 경험한 것은 아니지. 배우면서 왜 그런지를 생각하는 동안에 배운 것이 제자리로 찾아 들어가니까 나중에 쉽게 꺼내 쓸 수가 있어 내 것이라 할 수 있을 거다. 그래야 눈이 밝아지고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야. 거꾸로, 생각은 하나 배우지 않으면 외골수에 빠져 고정관념에 갇혀있어 자기주장만 하게 되니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니 위험하지 않겠니. 굴절이 커지고 색깔이 짙어져 도리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 고정관념에 갇히는 것이란다. 그래서 눈이 밝아지려면 공자님이 말씀대로 배우기와 생각하기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구나.

여기서 배움이란 학교에서 교과서로 수업을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역사적인 예수를 연구한 수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석가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달리 문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의 지혜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공자님의 표현을 빌리면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얻은 것일 거야. 책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부딪치는 사건이나 물건의 이치를 깊고 넓게 생각하여 새로운 앎에서 새로운 앎에 이르기를 계속하셨고 그 앎을 이를 잘 정리해두셔서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활용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실 만큼 눈이 밝으셨기에 삼십대 초반인데도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을 게야. 수안아, 너도 책이 없을 때는 격물치지할 수 있겠지.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물건이 왜 그런지 인과나 가치나 의미를 따져 보는 것도 좋고, 네가 무얼 모르는지 그걸 알기 위해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고, 현실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좋으며, 주제만 분명하다면 남과 유익한 대화도 스스로 깨우치는 격물치지의 중요한 방법이란다.

그러나 수안아 손쉽게 책을 구할 수 있다면 네가 생각할 꺼리를 책에서 찾도록 해라. 글쓴이가 꺼낸 화제에 대하여 글쓴이와 대화하는 것이 읽기 아니냐. 만약에 네가 비판적으로 읽을 수만 있다면 새로운 경험을 얻고 또 네 배경지식을 재배치하고 재구성하여 즐겁게 네 눈을 밝혀갈 수 있단다. 모든 책은 이렇게 할 수 있는 독자에게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단다. 그러니 어떤 책이든지 즐겁게 읽고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 배경지식을 정리하여 눈을 밝히는 방법이란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아는 것이 지적 호기심의 증거이고 성숙의 출발점이구나.

책을 읽는 것이 눈을 밝혀 인간을 성숙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이미 인류의 역사가 증명했단다. 고대 문명사를 보아도 문자를 발명한 민족이 더 잘 살았고 문자로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하지 못했던 미개한 민족은 지배를 당했단다. 머리 대신에 책에 지식과 정보를 얼마나 축적하고 또 잘 활용했는냐가 그 민족의 흥망성세를 좌우했어. 오늘날 저명한 과학 잡지에 발표된 논문을 보면 미국이 생산하는 지식과 정보량이 세계의 절반에 가까운 것만 보아도 미국의 국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잖니. 이는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란다. 문명의 발달사처럼 자기완성을 위해 독서와 사색의 중요성에 대하여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동물들은 먹이를 찾거나 외적을 경계하는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을 진화시켰지만 인간은 눈으로 보고 본 것을 머리로 분별하며 살게 되어 있잖니. 인간은 동물처럼 예민한 감각이나 날까로운 발톱과 이빨도 빠른 다리도 질긴 가죽도 없어서 생존에는 아주 불리하지만 그 대신 생존을 위해 밝은 눈과 눈을 이용해 생각하는 머리를 진화시켜왔잖니. 그리고 생각한 것을 책으로 정리했지. 그래서 인간의 생명력은 지적 호기심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눈으로 나타게 되어 있으니까 수안이의 눈은 책을 읽으며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즐거움으로 생기가 넘쳐야 되잖니.

나는 수안이 눈이 거대한 호수같이 깊고 맑으면서도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며 때로는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생기가 넘치기를 바란단다. 동물은 먹을 것을 찾아 눈을 번득인다. 그러나 수안이의 눈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찾는 지적 호기심이 넘친다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네게서 바라는 모습이란다.

수안아. 너무 길어 미안하다. 사실 할 얘긴 더 많단다. 그러나 네게 잔소리일까 봐 애써 줄였는데도 길어졌구나. 잔소리가 많은 만큼 널 사랑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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