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전장의 기억

- 윤여일(수유너머R)

1.

2007년 여름 오키나와로 향했습니다. <아시아․정치․예술>이라는 행사가 오키나와에서 열렸습니다. 장소는 마루키(丸木) 미술관. 오키나와를 무대로 활동하는 화가와 다큐멘터리 작가로부터 그들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전시실에는 묘하게 금속성 느낌이 강한 추상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습니다. 흙빛과 핏빛의 강렬한 색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상영된 다큐멘터리는 오키나와 방언으로 가득해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본행사가 끝나고 이어진 오키나와 전통춤 공연이었습니다. 일흔을 넘기신 어느 할머니가 청중을 가르고 무대 한복판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오시더니 오키나와 음악의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치셨습니다. 한 번은 왼쪽, 한 번은 오른쪽으로 두 손을 모아 꺾어서 터는 동작과 할머니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감상하는 동안 몇 번이나 웃었다. 아마도 오키나와의 해학성을 담은 춤이겠거니 짐작했습니다.

2.

공연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춤의 유래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간 오라버니가 전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리는 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오지 않는 오라버니, 예감 속에서는 이미 같은 세상에 있지 않을 그 오라버니를 기다리며 바닷가로 나가 수년을 수십년을 춰온 춤.

그 말씀을 듣는 동안 몇 차례나 크게 웃었던 일이 너무나 민망해졌습니다. 제 웃음소리는 왜 그리도 큰지. 하지만 제가 본 할머니의 표정에는 분명히 어떤 해학성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민망함도 민망함이지만 전혀 헛것을 본 것인지가 궁금해서 망설인 끝에 질문을 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신산의 세월, 슬픔만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생이 내 표정에서 본 것은 아마도 그 여러 감정의 한 가지일 것이다.”

3.

쉬는 시간, 한 친구가 미술관 옥상에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올라가보니 뜻밖에도 바로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미군기지가 내려다 보였습니다. 마루키 미술관은 <원폭의 그림>,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 등 반전 작품을 그린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마루키 토시(丸木俊) 부부를 기념하여 세워졌습니다. 어려운 싸움 끝에 굳이 이곳 미군기지 옆에 미술관의 터를 잡았다는 전언입니다.

애초 나흘 일정으로 방문했지만, 행사가 끝나고 체류를 열흘로 늘렸습니다. 좀 더 머물러 할머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오키나와를 여행하는 동안 미군기지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본도의 20% 이상은 미군기지로 덮여있습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땅이지만 재일미군 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해 있는 기지의 섬입니다.

4.

첫 번째 단서는 할머니의 공연을 접한 전시실에 있었습니다. 전시실 벽의 한 면을 거대한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죽은 자들, 죽으려는 자들, 죽음을 망설이는 자들 수십 명의 표정들이 전시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작품은 집단자결을 주제로 삼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신산을 핥아온 할머니가 소녀였던 때,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게라마(慶良間) 제도를 공략하기 시작해 4월 1일 오키나와 본토에 상륙했습니다. 6월 23일 총지휘관이었던 우시지마(牛島滿) 사령관의 자결로 전투가 끝나기까지 18만 미군과 7만 일본 수비대가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습니다. 사망자수 24만 명. 다수의 오키나와 민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미군이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천황을 위해 옥쇄(玉碎)하라는 일본군의 강압으로 다수 주민이 집단자결을 해야 했습니다.

5.

오키나와 평화기념관과 박물관, 미군기지처럼 오키나와의 과거와 오늘을 엿보고자 돌아다니기를 수일. 그 무게에 지쳐 한가로이 바다에 몸을 맡기고자 이도(離島)인 자마미(座間味)섬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집단자결의 흔적과 마주쳤습니다. 마을을 구경하다가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집단학살의 현장이 있다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산길을 따라 이십 분쯤 올라가니 위령탑이 나왔습니다. 내려와 끼니를 때우려고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옆 자리 앉은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인데, 2005년에는 자마미 섬의 ‘집단자결’을 파헤친 오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향해 자유주의사관의 우익단체가 ‘군명(軍命)’이 있었는지를 두고 소송을 걸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전의 집단자결 혹은 집단학살을 둘러싼 ‘실증성’의 논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가족과 벗들의 죽음을 증언하기 위해 다시 쓰라린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 짐을 지고 있습니다. 오키나와를 떠나고 나서 한 달 뒤. 오키나와에서는 십 수만 명이 모인 항의행동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이 강요하여 집단자결한 오키나와인에 관한 교과서 기록이 삭제된 것에 항의해 일어난 집회였습니다. 아울러 미군 기지를 향한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인 항의행동으로 오키나와-일본-미국의 부조리한 삼각관계가 드러났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에는 숱한 주검들 곁으로 소도(小刀)를 들고 품에 있는 아이를 응시하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습니다. 일본군의 협박으로 그림 속의 어머니는 자신이 죽기 전에 갓 태어난 아이의 목숨을 스스로 거둬야 했을 것입니다.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어머니가 자식을 죽여야 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칼로는 쉽사리 사람을 죽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꼬챙이 하나 쥐고 자결해야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6.

오키나와 평화기념관. 남부 이토만시(絲滿市)의 마부니(摩文仁)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부니는 수면에서 100m 정도 솟아있는 절벽인데, 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가 내려다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우시지마 사령관이 자결한 장소이며, 또한 집단자결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에서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평화기념관의 한 영상물에서 보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대체 어떻게 촬영했을지.

카메라는 건너편 절벽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영상물 안에서 한 여성이 갑자기 절벽 위의 숲에서 뛰쳐나옵니다. 그 여성은 사력으로 달려 그대로 절벽으로 뛰어내렸습니다. 15분 간격으로 반복상영되는 영상물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다시 보았을까요. 그 수초의 장면이 안긴 충격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한 시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다시 그 여성이 숲에서 뛰쳐나오더니 바다로 떨어집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성은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숲에서 뛰어나온 걸음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대체 그녀는 숲속에서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길래 멈춰서지도 못한 채 절벽을 뛰어내려야 했을까요.

아마도 미군에게 쫓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미군에게 잡히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도망쳐 절벽으로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앞에도 뒤에도 결국 죽음뿐인데 대체 미군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기에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선택이 가능했을까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그 장면에서는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저질렀을 만행과 함께 일본군의 세뇌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을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일본군은 정보가 새나갈 것을 두려워해 미군에게 잡히면 죽음보다 끔찍한 고초를 당할 것이라고 오키나와인들에게 선전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애당초 일본군에게 승산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상태에서 오키나와는 시간을 벌기 위한 사석(死石)에 불과했습니다. 그 동안 할머니는 고향땅에서 숱한 이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그 오라버니는 다른 전장으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넋이 되고 말았습니다.

7.

어쩌면 오키나와 전통음악에 맞춰 할머니가 춤으로 그리고 표정으로 보여준 신산의 세월은 오키나와 전투보다 더 오래되었는지 모릅니다. 오키나와 전통음악은 일본 본토의 음악과 음계가 다릅니다. 1879년 일본의 현으로 속하기 전까지 오키나와는 류큐(琉球)왕국이었습니다. 류큐는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중계무역을 하였는데, 일본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여 강제 병합한 것입니다.

결국 류큐 복속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청일전쟁의 결과는 조선만이 아니라 오키나와의 운명도 갈라놓았습니다. 이후 강제적인 동화정책으로 오키나와는 자신의 문화를 잃어갔습니다. 오키나와 전투 시기에는 오키나와 말로 대화하는 자는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분한다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고 일본이 패전한 후 오키나와는 일본의 주권 아래 있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947년 6월,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인 당시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에 일본인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 발언은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그 발언은 ‘천황의 메시지’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맥아더에 의해 패전 이후에도 존립한 쇼와(昭和) 천황은 미군의 오키나와 장기점령을 희망한다는 내용을 미국의 국무성에 보내는 동시에, 명목상의 주권을 일본에 두고 미국이 조차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일본 국민의 이해도 얻을 것이라며 조언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10월 당시 외무장관 아시아 히토시(芦田均)는 연합군사령부(GHQ)에 대한 요청을 정리하여 극비리에 전달했습니다. 그 문서에는 “일본의 바깥이지만 일본에 접한 지역의 몇 군데 전략지점에”(on certain strategic points in areas outside of but adjacent to Japan)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소련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다며, “평시의 대치는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小笠原)에 주둔하는 미군으로 대신하고, 유사시에만 일본 본토에 미군의 진주를 허가하는” 방식을 취하면, “일본의 독립을 손상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without compromising Japan’s independence)고 설명했습니다.

본토의 시간벌기를 위해 미군과의 격전지가 되었던 오키나와는 본토를 위해 이번에는 미군의 지배 아래 놓였다. 대신 태평양전쟁의 사석이었던 오키나와는 미군의 통치하에서 태평양의 요석(要石)으로 변하였습니다. 냉전 하의 전략적 거점이 되어 오키나와에는 미국의 군사기지가 대폭 증강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1957년 미일정상회담에서는 일본 본토에서 지상전투부대를 철수시키기로 합의되어, 육군은 한국으로 해병대는 오키나와로 주둔지를 옮기는 방침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의 아시아전략에서 일본과 한국, 오키나와는 분업을 맡았습니다. 일본 본토는 군사적 부담을 덜고 경제적으로 안정화되며,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에는 군사 우선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오키나와는 극동의 군사 거점으로 확장되는 동시에 점령 비용의 효율화를 위해 달러 경제로 전환되었습니다. 본토에서 이전한 군사 기지들이 들어섬에 따라 오키나와 본섬의 20% 이상이 군용지가 되었습니다.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이 되었습니다.

8.

오키나와를 떠나기 전날 오키나와 현청 앞에서 만난 시위자들을 따라 기지건설이 예정된 해노코(辺野古)로 향했습니다. 일본과 미국 정부는 1997년 후텐마 기지를 대신하여 이곳에 헬리포트 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주민투표로 반대의사를 밝힌 뒤 10년 동안 투쟁을 이어가고 계셨습니다. 해노코에 도착했지만 도무지 비좁은 바닷가 어디가 건설부지인지 알 수 없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철망 넘어 바다를 가리켰습니다. 바다를 메워 미군기지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미군기지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는 분들을 찾아뵈었습니다. 거기에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미군기지 없는 평화를! 평택에서 오키나와까지”

일 년 전 이맘때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과 시민들을 한국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고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대추리는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의 비행장으로, 한국전쟁기에는 미군의 비행장으로 개발된 땅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농민들은 번번이 농지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시 활주로를 넓히고 이번에는 잠수함도 들어오도록 기지가 확장될 예정이었고,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그들은 또 다시 쫓겨나야 했습니다. 대추리 주민들은 “올해에도 농사짓자”를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대추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소박하지만 절절한, 그 땅에서 살아가겠다는 염원이 담긴 구호였습니다.

그러나 운동은 패배했습니다. 기지 확장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정마을입니다. 저는 강정마을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체류 경험과 대추리의 기억을 되살려 강정마을을 얼마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강정마을의 소박하고도 억척스러운 일상은, 대추리의 농사일은, 그리고 오키나와 할머니의 저 알듯모를듯 한 표정은 얼마나 무거운 역사를 짊어지고 있을까요. 지난주 ‘재주 해군 기지, 탈영토적 전쟁 거점’에 이어 약간 뒤늦은 편집자의 말을 올립니다. 하지만 결코 늦은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합니다.

9.

왼쪽에 새로 등장한 코너가 보이시나요. <AA의 일드보기>는 드라마 작가를 준비하시는 AA님께서 앞으로 일본드라마를 비평해주실 것입니다. 일본에서 한류 드라마가 붐이라지만, 일본드라마도 참 좋은 것이 많습니다. AA님의 참신한 글을 기대해 주세요.

오랫동안 사진 연재를 해주신 임종진님이 이어 박정훈님께서 바통을 이어받으셨습니다. 박정훈님은 다큐멘터리 작가십니다. <행복한 사진관>으로 코너명을 달았는데, 실은 박정훈님은 ‘길 위에 서서’를 코너 제목으로 생각하셨어요. 길 위에서 만난 소통의 장면을 이번호부터 한 호씩 꺼내실 것입니다.

<뉴욕통신>이 올라왔습니다. 권용선님께서 할렘에 둥지를 튼 ‘이본의 다락방’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고병권님께서 월스트리트 시위를 속보로 때려주셨습니다. Beilang님이 뉴욕에서 만난 있었던 위안부 할머니와의 만남을 기록해주셨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뉴욕이 또 한 곳의 실감 어린 현장으로 다가옵니다. 잠시 뉴욕으로 시선을 옮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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