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우리는 레기온(Legion)이다” -월스트리트로부터

- 고병권(수유너머R)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뒤 기자가 다 된 것 같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수첩과 사진기(전화기능이 정지된 스마트폰입니다만)를 챙겨서 월스트리트의 쥬코티(Zuccotti) 공원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조그만 공원을 몇 번씩 돕니다.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16일째인 오늘(10월 2일)도 어김없이 갔습니다. 어제 뉴욕의 허드슨 강가에서 열린 ‘원전반대집회’를 가느라(원전홍보대사 이명박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 눈빛들이란… 제게 ‘기죽지 말고 원전세력 맞서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격려하는 할머니까지 있었지요. ㅠㅠ), 브룩클린 다리 행진에 함께 하지 못했는데 거기서 무려 700명 정도가 연행되었더군요. 여기 뉴욕에서 만난 친구 한 명도 연행된 것 같습니다. 뉴스 화면에 그 친구 얼굴이 슬쩍 비치더군요.

브룩클린다리 행진(10월1일)-무려 700명이 연행되었답니다(사진출처: 뉴욕타임즈)

브룩클린다리 행진(10월1일)-무려 700명이 연행되었답니다(사진출처: 뉴욕타임즈)

어제 700여 명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지금 공원에서 잠을 자며 점거시위에 나선 적극적인 이들이 그 정도 되거든요. 아무리 지도부 없는 시위라고 하지만 행진에 나설 정도면 상당한 열의를 가진 사람들일 텐데, 그 정도 규모의 연행은 점거 시위에 큰 타격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오늘 가보니 그 사람들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아저씨가 이런 피켓을 만들었더군요. “우리 중 하나를 연행해봐라, 그럼 두 명이 새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레기온이다. 우리는 여럿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생각조차 구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99%다(Arrest one of us and tow more appear. We are legion… For we are many. You can’t arrest an idea. We are the 99%).”

이제 월스트리트 점거는 처음과 달리 주류 언론까지 주목하는 시위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뉴스 앵커들이 현장의 기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직도 통일된 지도부나 요구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네, 아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늘어납니다.” 참 재밌는 대화입니다. 지도부가 분명치 않다는 것, 아니 수백 수천 명이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 게다가 요구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 아니 요구가 매일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이 점거 시위가 힘을 갖는 이유일 겁니다. 경찰이 어찌 대처해야할지 골치 썩는 부분이기도 할 거구요.

점거자들은 오늘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이름 하여 ‘The Occupied Wall Street Journal’. <월스트리 저널>이라는 주류 신문 이름에 ‘점거된’이라는 말만 슬쩍 집어넣은 거지요. 여하튼 신문에서 아룬 굽타(Arun Gupta)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많은 이들이 메시지가 분명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게 왜 문제지요? 미리 완전하게 만들어진 운동은 바닥으로부터 나온 게 아닌 겁니다. 그것[메시지]은 창조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풀뿌리(grassroots)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지요. 지금 시위자들은 아주 많은 복잡한 생각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법인을 인격으로 간주한 판결을 철회하라[기업같은 법인도 인격이므로 자유롭게 선거자금을 기부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 돈이 말하게 하는 미국식 시스템], 주식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라, 은행을 국유화해라, 의료를 사회화하라, 실질적 경기부양으로 공공일자리를 늘려라, 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라, 버려진 집들을 공공 주택으로 돌려라, 녹색 경제를 만들어라 등등. 어떻게 이것들에 대해 광범위한 합의를 이끌어낼 거냐고 걱정하세요? 만약 시위자들이 이미 만들어진 요구들만 갖게 된다면 그들의 잠재력은 제약될 겁니다. … 정당성을 갖는 진정한 해결책은 오직 공동의 투쟁과 논쟁, 민중들의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참고로 이번 시위가 어떻게 기획된 것이고 어떤 이들이 참석하고 있는지 등 몇 가지 궁금한 내용은 다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thenation.com/article/163719/occupy-wall-street-faq)

매일 사람들은 뭔가를 적고 있습니다. 피켓들은 엄청난 속도로 갱신됩니다. 새로 온 사람들이 새로운 요구를 적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이들이 생각하기에 민주주의란 이미 만들어진 요구를 여론조사해서 그 지지를 묻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어느 정당을 고를 것인가, 어느 대표를 고를 것인가 그런 문제는 여기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들이 여러 요구를 서로 나란히 적어두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 오늘 만난 어느 할머니는 사람들이 여기서 민주주의를 다시 낳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당이든 저당이든 어차피 월가에서 돈 받는 놈들이고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제게 손으로 공원을 가리킵니다. 저게 민주주의라고.

당분간 틈나는 대로 공원에 갈 겁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 거기서 든 생각들을 ‘뉴욕통신’으로 계속 싣겠습니다. 우리 <위클리 수유너머>가 이때만큼은 <데일리 수유너머>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ㅎㅎ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도 월가의 소식을 전합니다.

참 <위클리 수유너머>의 기획과 편집을 맡고 있는 ‘수유너머R’이 용산에서 성신여대입구 쪽으로 이사를 했습니다(약도는 commune-r.net 참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뉴욕에 있는 저로서는 ‘거기 찾아가 공간도 보고 선물도 전하고 싶은데’ 그저 서울에 있는 분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아울러 용산에서의 5년을 접고, ‘수유너머 남산’도 ‘남산 강학원 Q&?’라는 이름으로 충무로로 이사했답니다. 이로써 지난 십년 넘게 하나였던 <수유너머>는 ‘함께’하기도 하고 ‘갈라’서기도 하면서 모두 새롭게 출발합니다(이미 새로 출발한 그룹도 있지요). 남산강학원, 수유너머문, 수유너머N, 수유너머R, 문탁네트워크. 수유너머였던 모두에게 그리고 여전히 수유너머로 남은 모두에게 응원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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