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4-USA OSA

- 고병권(수유너머R)

1. 셀 수 없는 힘 -척도를 넘어설 때 척도가 바뀐다

월스트리트는 네로다. 그리고 로마는 지금 불타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네로다. 그리고 로마는 지금 불타고 있다.

9월 28일. 점거는 갈수록 활기가 넘친다. 시위에서 규모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5만 명이 모여도 그것이 정점으로 느껴지는 시위가 있는가 하면(가령 2008년 6월 10일 시청 주변에 60만 가까이 모였을 때가 그랬다), 단 500명이 모여도 그것이 이후 일어날 폭발의 단지 첫 단계임을 예감케 하는 시위가 있다(다시 2008년 예를 들자면 4월 말일에 있었던 시위가 그렇다).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진숙 지도위원 한 명이 크레인에서 한 달, 두 달, 100일을 넘게 점거 농성을 벌였을 때 그 때 고양된 힘이란 1년에 한 번씩 노동자 수만 명이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노동자 대회를 열고 정권 타도를 외칠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래서 힘이란 셀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든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쥬코티(Zuccotti) 공원에서는 셀 수 없는 묘한 힘이 느껴진다. 적어도 내가 준비 모임을 보며 예측한 것과는 아주 달랐다. 계산을 넘어섰다. 적어도 준비모임을 보면서 가진 내 느낌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면, 나의 ‘놀람’은 분명 준비자들의 ‘놀람’이기도 할 것이다. 한 운동이 성공하라면 준비한 자들, 기대한 자들을 넘어서야 한다. 정치는 혹은 사회운동은 공학과 달라서 성공 이상을 산출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척도를 넘어설 때 척도가 바뀐다.

2. 함성과 고요

오후 3시 40분. 일부 사람들은 뉴욕 증권 거래소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증권거래소 폐장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거기서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하루 일과는 대개 이렇다.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사람들은 둘러앉아 오늘 하루에 있을 일들에 대해 말한다. Morning Circle. 그리고 9시가 되면 증권거래소 개장 시간에 맞춰 행진을 한다. 10시부터 1시 사이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어떤 이들은 휴식을 취하고 또 어떤 이들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1시에서 3시 반 정도 사이에는 ‘제너럴 어셈블리(General Assembly)’가 열린다. 일종의 전체 집회인 셈이다. 그리고 4시 쯤에는 다시 행진을 하고 이후에는 음악 연주, 토론회, 휴식 등을 여기저기서 벌인다. 그리고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에는 다시 제너럴 어셈블리가 열린다. 하지만 이는 점거를 제안했고 전체를 조율하고 있는 이들이 제시한 것이고, 사람들은 여기 일정을 따르면서도 또 각자의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아무런 문제 없이 공동의 리듬을 타며 움직이고 있다.

누구보다 이들 자신이 신났다.

누구보다 이들 자신이 신났다.

누구보다 이들 자신이 신났다.

누구보다 이들 자신이 신났다.

오후 4시 일부 사람들이 증권거래소 쪽으로 행진을 시작한 후에도 공원에는 수백 명을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일부 그룹이 명상을 시작했다. 주변은 소란스러운데도 그곳은 고요가 지배한다.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 이 고요의 세계 옆에는 강력한 비트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신나게 북을 두드려대고 거기에 맞춰 온몸을 흔들어대는 사람들. 섹소폰 소리는 귀를 잡아서 사람들을 끌어오고, 드럼 소리는 발바닥과 어깨 밑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추어올린다. 상당수 사람들이 이론과 논리가 아니라 이 비트를 따라 공원에 들어오고 있었다.
참 묘했다. 함성과 고요가 섞이지 않고 나란히 있다니. 함성은 침묵을 방해하지 않고 고요는 소란을 어색하게 만들지 않는다. 고요는 스스로 하나의 함성이고, 함성은 나름의 고요이다. 그것은 그것 나름의 발언이고 그것은 그것 나름의 침묵이다.

밴드에 빨려든 사람들의 열광

밴드에 빨려든 사람들의 열광

음악에 맞춰 아이가 춤을 추고 있다. “비트를 떨어뜨리라구, 폭탄 말구!”

음악에 맞춰 아이가 춤을 추고 있다. “비트를 떨어뜨리라구, 폭탄 말구!”

3. 먹는다는 것

오른편 검정윗옷을 입은 이가 그날 음식 배분을 담당했던 라피엘이다.

오른편 검정윗옷을 입은 이가 그날 음식 배분을 담당했던 라피엘이다.

여기 매우 중요한 장소가 하나 있다. 그곳은 바로 음식을 나눠먹는 키친. 여기서는 누구나 차려진 음식을 그냥 먹을 수 있다. 음식을 차리고 있던 라피엘 베리오(Rafiel Berrio)와 짧은 대화를 나누어봤다. “여기가 이 점거 시위의 상징적 장소로 보입니다. 여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곳이랄까요. 이게 바로 민주주의로 보입니다.” 네 말에 그가 답했다. “그들(월스트리트) 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다 가지려고 하지요. 그들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나눕니다. 여기 있는 음식들 모두가 누군가 선물을 한 것들이지요.” 사실은 나도 지난 번 간식을 여기에 놓고 갔다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월스트리트와만 다른 게 아니라 유엔과도 달라요. 여기는 온 세계의 사람들이 모이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국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4. 빈 자리

광장 한편에 얼마간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주재하고 있는 이는 지난 번 집회에서도 사회를 봤던 이였다. 그런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활동가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기 온 이유를 말하면서 자기 처지의 답답함과 어려운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영어도 영어려니와 거리가 있어 좀처럼 말을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단어는 아주 부수적인 것이었다. 혀가 아니라 표정이 이미 너무도 많은 말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어쩌면 이곳을 점거해주어서. 여기 이 자리를 만들어줘서. 그때 이 점거를 제안한 이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여기를 검거했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여기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말이다. 단지 비어 있다. 미디어가 더 이상 중계를 하지 않기에 텅 빈 곳. 정치가가 더 이상 대의하지 않기에 텅 빈 곳. 여기가 비어 있다. 그저 여기를 직접 점거하면 된다. 단지 귀를 열어주고 말할 시간과 장소를 주는 것. 시간과 장소를 민중이 직접 점거하는 것.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때 어떤 이가 곧 워싱턴에서도 점거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 일은 어렵지 않기에 분명 가능할 것 같다. 누구나 점거하면 된다. 그리고 모방하면 된다. 모방은 결코 창조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일어나기 위한 첫 스텝이다. 월스트리트의 점거를 모방하라. 그러면 세계에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때 누군가 미국 지도를 들고 일어나 외쳤다. 지금 우리는 66곳을 점거하고 있다.

왜 지금이라도 안 되겠는가, 혁명이.

왜 지금이라도 안 되겠는가, 혁명이.

아메리카합중국이 아니라 아메리카점거국이다. United States of America가 아니라 Occupied States of America. 주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점거된 주들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USA가 아니라 OSA. 미국만이 아니라 지금 세상이 충분히 말라 있다. 여기 작은 불꽃처럼 보이는 월스트리트 점거가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일 갖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세상은 지금 불이 타기 좋은 환경이 되고 말았다. 공원 입구에는 누군가 이런 문장을 붙여놓았다. “We’re gonna spread it around the World.”

5. 육성을 전달하라

경찰이 마이크 사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 사람들은 인간 마이크를 이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온 ‘마이크’ 내지 ‘소리통’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전달 및 증폭 장치가 되어 큰 소리로 메시지를 옮기고 있다. 오히려 대형 마이크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지도부에 종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유명인사라도 자기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서로의 말에 훨씬 더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 사람이 말을 하면 주변 사람이 그 말을 잘 들었다가 큰 소리로 증폭 전달하고, 그 다음엔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서 다시 전달한다. 그러다보니 말 한 마디가 ‘메아리’를 오랫동안 친다. 음성이 파장이라는 건 물리학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상식이지만, 정치학에서는 매우 위험한 진실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중요하다.

한국 대학생의 요구와 미국 대학생의 요구는 같다

한국 대학생의 요구와 미국 대학생의 요구는 같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 이 돈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겠다. 나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여기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 이 돈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겠다. 나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여기 있다.

응답 3개

  1. 고추장말하길

    사람마다 다른 걸 보겠지요. 하지만 어떻든 저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제가 머무는 시점에 맞춰 이런 일이 일어난게. 하지만 어찌보면 꼭 여기가 아니어도, 꼭 지금이 아니어도,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일이었고, 또 한국에서도 2천대 이후 일어났던 일이며, 지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날 일이기도 할 겁니다. 재밌게 보셨다니 고맙습니다.

  2. 라이프타임말하길

    아~ 선생님이 머물고 계신 장소에 너무 멋진 공간이 활짝 열린채 진행되고 있군요. 연재를 통해 재미나고 유익한 소식들을 접할 수 있어 좋아요. 직접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을 것들을, 선생님의 눈과 입을 통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3. 김보근말하길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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