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6-처음으로 적을 알게 되다

- 고병권(수유너머R)

1. 속수무책

10월 1일, 점거 15일째. 내가 찾아간 곳은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허드슨 강 부두 95호(Pier 95)였다. ‘핵 없는 미래(Nuclear-Free Future)’라는 이름의 ‘핵발전소 반대’ 집회장이었다. 일본인 친구 유코(Yuko)의 제안으로 찾아간 곳이었다(그는 일본의 ‘3-11 재앙’ 이후 나온 여러 글들을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하고 있다. jfissures.org). 사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 핵발전소 방사능 유출은 자연재해가 인간재해와 만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당하기 전에, 자연을 재해의 형태로 먼저 생산한다. 미국 자신이 키운 테러리스트 빈 라덴이 미국 비행기를 빌어 무역센터를 날려버렸듯이, 일본의 재앙은 지진에 몸을 실은 원전의 공격이다. 이제 자연은 테러리스트처럼 무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지난 9-11 십주년을 맞아 뉴욕이 난리를 치렀다. 공안 활동이 대단히 강화되었다. 엊그제는 9-11 이후 특별히 만들어진 초법적 조치(테러와의 전쟁에서 적으로 규정된 자는 사법심사를 거치지 않고 살해할 수 있다)에 입각해서, 정부가 무인 폭격기를 이용해서 자국 시민을 재판 없이 살해한 일도 있었다. 그냥 대외정책을 수정하면 쉬울 것 같은데, 제 스스로 세상을 온통 테러리스트의 배양지로 만들어놓고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온갖 공안조치를 취하고 있다.

‘방사능의(radioactive) 내일보다 활력있는(active) 오늘이 낫다’

‘방사능의(radioactive) 내일보다 활력있는(active) 오늘이 낫다’

참고로 이런 상황에서도 ‘최고의 원전기술을 가졌다고 원전홍보대사로 세계를 누비는’ 이명박 대통령 때문에 참 무안한 일을 겪었다. 이 날 집회에서 케빈(Kevin)이라는 반핵운동가는 미국의 핵폐기물 저장시설이 한계에 이르고 안전성에도 문제가 생겨 당국에 따져 물었는데 결국 지난 수십 년간을 대책 없이 지내왔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즉 세계는 공식적으로 핵폐기물에 대해 대책이 없는 게 진실이라고 했다.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그는 ‘이명박 대통령’ 이야기를 꺼냈다. 핵발전소 세일즈맨. 내가 왜 미안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할머니가 힘내라며 말했다. ‘난 늙어서 금방 가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그런[이명박 같은] 인간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2. 의견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브룩클린다리 위의 경찰과 시위대(사진 출처: 뉴욕타임즈)

브룩클린다리 위의 경찰과 시위대(사진 출처: 뉴욕타임즈)

속수무책인 것은 원전만이 아니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도 현재로서는 속수무책이다. 10월 2일로 점거 16일째다. 어제 반핵집회에 가느라 월스트리트에 가지 못했다. 뉴스에서는 브룩클린 다리로 가던 시위대 수백 명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다. 지금 경찰은 인도에서 구호를 외치며 다니는 것은 허용하지만 도로에 내려오면 연행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어제 행진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경찰도 처음에는 교통 통제를 하며 다리까지 시위대를 에스코트한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경찰이 행진을 허용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이 다리에 들어선 시위대를 갑자기 에워싸고는 연행을 시작했다. 시위대는 함정이라고 항의를 했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해서 700명이 연행되었다.

카드보드에 자기 요구를 적는 사람들. 오늘은 특히 아이들이 많이 왔다.

카드보드에 자기 요구를 적는 사람들. 오늘은 특히 아이들이 많이 왔다.

꽤나 걱정을 하며 월스트리트 점거장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려 700명이 연행되었는데도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그만큼의 사람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점거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새로 쓰고 있었다. 매일 그렇게 수십 개의 피켓들이 만들어지고 또 갱신된다. 새로운 요구들이 계속 탄생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시위대의 통일된 요구가 없다고 문제 삼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자기 생각을 새로 만들어낸다. 즉 여기는 생각을 드러내는 곳이면서 또한 생각을 만드는 곳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란 이미 만들어진 의견에 지지/반대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견을 만들어내는 힘 자체일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로 요구를 모아야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그에 대해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토론의 결과로 그런 것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제발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Don’t hold your breath!).

오늘 점거 상황과 의견, 행동 지침 등을 알리고 제안하는 신문이 발행되었다. 신문 이름은 <The Occupied Wall Street Journal>이다. 단체 이름도 없었고, 각 기사 끝에는 그 글을 쓴 사람 이름만이 쓰여 있었다. 신문을 배포하던 이에게 ‘누가 발행한 신문’이냐고 묻자 그냥 ‘시위자들(protesters)’이라고 답했다. 아마도 제너럴 어셈블리를 운영하는 이들이 아닌가 싶지만, 어떻든 글의 내용도 그렇고 필자 이름을 넣은 것도 그렇고 ‘대표자’나 ‘조직’의 느낌을 지우려고 했다. 신문 뒷면에는 ‘당장 할 수 있는 다섯 가지’라는 이름의 행동 지침 같은 게 적혀 있었다. <1) 점거하자 -침구류 등 장비를 챙겨 점거에 참여하자. 2) 말을 퍼뜨리자 -다운로드하고 인쇄하고 디스플레이하고 의견을 나누자. 트윗과 페이스북 등을 통해. 3) 선물하자 -돈을 기부해도 좋고 음식들, 옷가지와 양말 등도 좋다. 4) 점거 상황을 체크하자 -예정된 행사나 현재 진행되는 일을 참고할 수 있는 사이트를 소개한다. 5) 당신 자신을 교육하라.> 특히 이 다섯 번째 지침이 인상적이었다. ‘당신 자신을 교육하라’는 것. 말하고 듣고 쓰면서, 먹고 노래하면서, 외치고 행진하면서 당신을 교육하라는 것.

3. 적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춤과 노래는 사람을 모을 뿐 아니라 유연하게 한다.

춤과 노래는 사람을 모을 뿐 아니라 유연하게 한다.

즉석에서 만든 곡을 부르며 배우는 사람들.

즉석에서 만든 곡을 부르며 배우는 사람들.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건 의견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곡을 만들거나 율동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점거를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게 만드는 데 음악과 춤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음악과 춤에 이끌려 점거 장소에 들어오고 있다. 누군가 연단에서 ‘우리 안에 경찰 끄나풀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전달해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웃으면서 손을 아래로 내리며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그런 경직된 태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찰도 참여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박수를 받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었다. 감출 것도 없다. 2008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경찰은 모든 것이 드러나 있을 때 항상 ‘엄청난 배후’를 제 멋대로 상상하고 그것 때문에 머리를 쥐어 뜯는다. 그냥 드러나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룹을 이루어 온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공원 아래 쪽 입구에는 교사들이 모여 있었다. 연방 정부 예산이 삭감되면서 많은 교사들이 계약해지 되고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이 축소된 모양이다. “교육 문제는 교사들 때문도 아니고 공교육 시스템 때문도 아니며 성적평가시험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교육에 닥친 진정한 문제는 부의 끔찍한 양극화와 가난한 아이들의 증대, 공교육 시스템의 기업형 사립학교로의 전화, 인종주의 등이다.” 아마 한국 교사들도 똑같이 말하지 않을까. 교사들은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월스트리트를 점거한다고 말한다.

공원 앞 쪽으로 두 개의 피켓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아이 둘과 서 있는 젊은 엄마(?)가 든 피켓인데 내용인 즉 이렇다. “나는 석사 학위를 갖고 있고, 5만불의 학자금 대출 빚을 안고 있고, 연금이나 보험이 없는 파트타임을 2개 뛰고 있고, 건강보험도 없고, 집도 없다. 그리고 아이가 둘 있다. 아주 엿 같다.” 일종의 퍼포먼스인지 자신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적은 항목 한두 가지는 해당될 것이다.


그녀와 아이 곁에는 군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내 나라를 위해 다시 참전했다. 처음으로 내 적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반전의 메시지, 철군의 메시지였지만, 또한 이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 그것은 맨하튼의 어느 거리에 있는 기업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현재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4. 민주주의를 낳아야 한다


공원을 나오며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조앤(Joane)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현재 시스템이 민주주의가 아니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이것은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라 기업지배체제(Corporatocracy)입니다.” 설명을 더 해달라고 하자, “지금 선거에 어마어마한 돈이 쓰이고 있는데다 미국 대법원은 기업도 법인이니 인격을 가졌다고 돈을 자유롭게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그럴듯한 광고를 보고] 우리 표가, 민주주의가 돈에 팔린 겁니다. 지금 후보들 보세요. 사람들의 진정한 이해가 아닌 돈의 이해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재탄생’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공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주주의는 저기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진정한 이해는 저기서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신문을 보니 10월 5일 대규모 행진이 있을 모양이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행진을 한다고 되어 있다. 경찰이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다. 정치권도 아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점거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가는 중이다. 오늘 받은 안내문에는 미국의 70개 정도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점거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 보스톤에서는 제법 강한 시위도 있었던 모양이다.
대통령 선거까지 맞물리면서 좋든 싫든 미국의 정치인들은 지금 대중들을 동원하거나 자극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극우적인 대중운동 ‘티파티’가 현재 공화당을 견인하고 있는 마당에 오바마 정부는 현재의 시위를 자기 목소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당분간은. 하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대중들의 움직임은 이미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은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계급전쟁’이니 ‘혁명’이나 ‘봉기’니 하는 말들을 반쯤은 농담으로, 반쯤은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가 본 공원의 대중들은 그 말을 할 때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위는 확대되는 양상이지만 분명 폴리스 라인은 있다. 그 선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금은 대중들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얼마 안 있어 경찰과 대중, 권력과 대중이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진짜 지혜를 발휘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응답 3개

  1. 고추장말하길

    네… 아마 이번 시위가 뉴욕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 중 제일 큰 게 그걸 겁니다. 분노했지만 항상 개인과 인종, 계급의 벽에 막혀 있었는데, 서로 그 열정과 분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모두 함께 ‘말랑말랑한 신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자신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과지요.

    • ‘말랑말랑함..말캉말캉함이 더 나으려나’ㅋㅋ 제가 생각하기에 뭔가 이상한표현이라고 아주 잠시나마 스쳐지나가는생각에 제 스스로 좀 비웃었습니다..ㅋㅋ 결코 적절한 단어가 아니라는 생각에 비웃은게 아니라는점 밝혀둡니다..ㅎㅎ 생각나는김에 덧붙여서 암튼 개방된 유연성 그리고 편하게 시위를 즐길 수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거같아요 ㅎ 댓글 다셔주신게 고마워서 어설픈 헛소리 좀 했네요..하하핫;;

  2. 열정과 분노가 그리고 말랑말랑함이 아주 자유롭게 펼쳐지는 모습이 참 뭉클해지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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