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S에게 보내는 편지

- 지오

S에게

안녕합니까. 카프카 세미나를 시작한다며 열에 들떴던 봄의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었고 카프카 세미나도 종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단편이 끝나고 장편 세편을 남겨놓고 있지요. 이미 여러 차례 고백했다시피 이 작가가 저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해서 전 요즘 무엇을 하던 카프카를 떠올립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적인 것들이 저와 너무나 닮아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람 왜 이런거야, 란 말을 할 때마다 속으로 뜨끔하곤 해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 그러나 말하기를 강요받는 사람들, 카프카는 그것이 권위라고 말하고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없는, 그래서 달리 살 방법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카프카 또한 그런 삶을 살았기에 그의 글은 난해하지만 진솔합니다. 지금 사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논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인정받을 수 있고 말로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면 이내 너무 감정적이다, 란 말로 무시당하고 말죠. 저는 그런 것에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카프카를 읽으면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첫 장편소설 [실종자]의 앞부분을 읽었어요. 이번 세미나부터는 새로운 회원분들이 함께 했는데 그 중 한 분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너무 쉽게 체념하고 순응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카프카와 연결 지어 얘기하려 하자 그 분은 작가가 아닌 이 소설 속 인물에 대한 것만 말할 수는 없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저는 약간의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봄의 계절을 지나며 여름 내 땀 뻘뻘 흘리며 사투를 벌였던 편지와 단편들을 통해 카프카라는 한 인간은 결코 능동적으로 맞서 싸우는 인물을 창조해 낼 수 없고 얼핏 체념이나 순응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사실은 그만의 저항방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우월감이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작가의 삶과 과도하게 연결 지어 읽는 것을 그닥 즐기지 않습니다만, 카프카만은 글과 카프카 그 자신의 삶을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편지를 먼저 읽은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고 몇 개월 앞서 카프카를 펼쳐든 자가 남몰래 약간의 자부심으로 그 시간들을 위안 삼았던 것쯤은 허락될 수 있겠지요.

카프카는 글을 쓰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그가 글을 쓰는데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권위적인 아버지는 가업을 물려받길 원하고 어머니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걱정만 합니다. 낮에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법률가로 일을 해야 했으므로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밤 시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두 가지 모두 다 놓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집 안 테이블에 자신의 소설을 올려두는 방식으로 가족들에게도 인정받기를 갈망했습니다. 카프카는 결혼을 하게 되면 글을 쓸 시간이 없어짐과 동시에 아버지처럼 권위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 차례의 파혼은 무능함이나 이기심이 아닌 사회 안으로 들어가고자 시도하는 끈질김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글과 현실 둘 중 하나를 포기했으면 편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지요. 자신은 사회가 만든 틀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갈망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어 그 생활로 들어가고자 시도를 하고, 밀어내지 않고 마주함으로써 더욱 자신만이 아는 고립의 세계를 따로 쌓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간극에서 오는 불안과 죄책감,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중간자’의 고뇌가 그의 글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의 유명한 단편인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거대한 벌레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레고르는 분노하지 않고 변화된 자신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을 많이 드러내지 않는 방법으로 가족들과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오해만 불러올 뿐이지요. 언뜻 순응하는 듯 보이는 그레고르의 이런 자세는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레고르를 대하는 태도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저는 이것이 카프카가 구현해내는 저항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스꽝스럽지만 비극적이고,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삶의 이면들을 표현해 내지요. 한편 나가려하지만 나갈 수 없는 그레고르의 모습은 어울리고 싶으나 어울릴 수 없는 실제의 카프카와 많이 닮았습니다. [변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글들에서 카프카의 모습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작품 안에서 주인공들은 언제나 기다려야만 하며 출구가 없는 시공간 속에서 뱅뱅 돌아야 합니다. 그 자신이 현실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시공간을 살았듯 말입니다. 불안과 죄책감, 글과 현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 되어 어느 순간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때문에 이제는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한 삶이 그런 글을 쓰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그런 글을 쓰기 위해 그 자신이 글과 현실 둘 다 잡고 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고뇌로 흔들렸던 작가의 비범함은 결국 이런 면이 아닐까요.

저는 아직까지 카프카 외에는 작가의 삶까지 파고들어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삶과 작품이 단 하나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작가는 카프카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카프카의 단편전집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경험이 아닌 감정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카프카스럽다’라는 형용사로 끝맺어지고 말지요. ‘나다운’ 글을 쓰기위해서는 경험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의 고백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될 거에요. 한페이지짜리 짧은 소설도 많이 썼는데 사물에 빗댄 글들을 읽어보면 불안과 막막함 더 깊은 곳에는 사물에 대한 애정이 담겼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애정은 바탕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막막함 뒤에 후려치듯 전해오는 느낌을 잡으려고 하면 거기엔 이미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자체만이 남아있지요. 어쩌면 그것이 ‘카프카스러움’인지도 모르겠네요.

비록 불안한 상태이긴 하지만 카프카를 통해 저 자신을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이더군요. 이런 이야기들이 당신에게도 자극이 될 수 있으면 합니다. 워낙 자기성찰은 뚜렷한 분이니 자극만 좀 받아가도 좋겠어요. <위클리 수유너머>에 글을 싣게 되어 또 다시 당신을 빌렸습니다. 조잡한 글이라고 보이지도 않고 두 번이나 써먹었으니 이번엔 꼭 당신 손에 건네줄게요. 더불어 당신이 요즘 꽂혀있는 이야기도 (짐작되는 바 있습니다만) 글로 보게 되길 기대합니다. 저 먼 남쪽에서 만나게 되겠군요. 바다 앞에서 당신과 나, 좋네요.

응답 1개

  1. 비포선셋말하길

    글에서 선명히 드러나네요.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난 사람의 표정이 깊어지듯 카프카를 만난 당신의 글도 달라졌네요…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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