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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HERO>로 세상이 <CHANGE> 될까 ?

- AA


<HERO> + <CHANGE>

<HERO>와 <CHANGE>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는 드라마이다. 두 드라마 모두 연출과 각본 등 제작 스탭에 겹치는 인물이 많으며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을 맡았다. 플롯과 구성 또한 매우 닮았다. 권력과 관성으로 일그러진 조직사회에 엉뚱하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는 주인공이 이야기를 주도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검찰과 정치권이라는 소재를 탄탄하게 구축된 주인공과 조연들의 캐릭터의 힘으로 풀어간다. 캐릭터와 사건이 시너지효과를 내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웃음이 나오고 (업계 용어로 ‘시바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드라마 전체적으로 ‘쉽고 재밌게 볼 수 있다’는 평을 받는 것도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HERO>는 2001년 1월 TBS에서 방송되었다. 평균 시청률 34.3%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역대 드라마 최고 시청률로 기록되어 있고, 당시 결혼발표로 인기를 위협받던 기무라 타쿠야는 이 드라마로 ‘시청률의 남자’라는 호칭을 지켰다. (이 드라마를 포함하여 일본 역대 드라마 시청률 best 1~5위는 전부 기무라 타쿠야의 출연작이다.) 이야기는 최종학력이 중졸인 날라리 출신의 쿠리우 코우헤이라는 검사가 도쿄지방검찰청 죠사이지부에 오며 펼쳐진다. 위신과 체통 혹은 출세와 권력이 중요한 여느 검사들처럼 일상을 보내던 죠사이부의 검사들과 사무관들은 쿠리우의 등장에 크게 당황한다. 정치인 비리 수사와 같은 ‘대박’ 만을 바라던 검사들이 보기에 ‘동네 여성 속옷 절도사건’에 매달려 몇 번이나 현장을 조사하고 기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쿠리우는 돌연변이이며 민폐다. 하지만 쿠리우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사건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어떤 케이스든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사법구조상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은 ‘검사’ 뿐이기 때문이다.

<CHANGE>는 2008년 후지TV에서 방송되었다. 정치인의 차남이지만 정치와는 상관없이 시골 초등학교의 교사로 살아가던 아사쿠라 케이타는 아버지와 장남인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공석이 된 지역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거절하던 그는 ‘아이들에게 희망이 가득한 미래를 준비해주고 싶다’는 순박한 동기로 ‘당연히 선거에 질 테니’ 출마했다가 정치판의 권력들에 의해 단숨에 ‘국무총리’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과 비슷하다.)가 되어 총리직을 수행한다. 관성에 젖어 정치 초보인 국무총리를 무시하는 정치인, 관료들 사이에서 아사쿠라는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그는 자신이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총재선의 거리 연설에서 했던 약속은 이렇다. “여러분과 같은 눈으로 현 정치의 문제점을 찾아내 그것을 바로잡고, 여러분과 같은 귀로 약자인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고, 여러분과 같은 다리로 문제가 일어난 곳에 망설임 없이 달려가고, 여러분과 같은 손으로 땀범벅이 되도록 일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로또 한 방으로 팍팍한 인생이 바뀌길 꿈꾸듯, 슈퍼히어로가 등장하여 이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 불평등을 고쳐주길 바란다. 왜냐? 쉬우니까. 본인은 힘들지 않아도 되니까. 슈퍼히어로가 특유의 능력으로 (이리 저리 다치긴 해도 결국에) 승리하는 과정을 나는 그저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슈퍼히어로가 바꿔놓은 행복한 세상을 누리면 되니까. 그래서 헐리웃(=미국)과 거대자본, 권력들이 합세하여 슈퍼맨부터 시작하여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등, 한 방의 로또와 같은 히어로의 이미지를 뿌려댔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다. 풀뿌리가, 시민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세상이다. 안철수 원장이 서울시장이 된다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대통령이 된다고 이 나라가 하루아침에 정의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으로 바뀔 수 있을까. 오히려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스템이 중세의 그것과 비슷하게 허약하고, 성숙하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진정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무슨무슨맨’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이 바뀌지 않으면,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에그먼드 버크의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명언을 비롯해 고 김대중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도 시민사회의 각성과 행동을 이야기했다.

7년의 터울을 두고 마치 시리즈처럼 완성된 이 두 편의 드라마는 한 명의 주인공이 부패한 판을 바꾸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드라마가 현실에 전하는 주제는 ‘주인공이 진정한 히어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진짜 주인공은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부, 명예, 가치관 등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각성하고 불이익을 감수한 채 ‘정의’가 구현되게끔 행동한 수많은 조연들이다. 사장의 성추행을 보았지만 못 본 척 했던 비서와 운전기사가 자신의 직장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 증거를 건넸기에 사장의 기소가 이루어지고, 자신의 목이 온전한 것만 신경 쓰며 살아온 부장검사는 ‘부조리’를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자신의 목을 내놓고 부하 검사를 지지한다. 일평생 관료로 시스템 내에서 살아왔지만 그 시스템이 ‘부당함’을 동감하여 과감하게 상사에게 큰 소리를 내어 올바른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도 있다. 주인공은 오히려 이들의 촉매제일 뿐, 역설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한 명’의 히어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원이라는 것이다.

드라마 막판에 두 드라마 모두 주인공은 철저하게 기존 권력의 응징을 받는다. 쿠리우는 거물급 정치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기소했다가 시골로 좌천당하고 아사쿠라는 노련한 권력자의 시나리오에 말려 선대 정치인들의 선거자금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퇴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거봐, 튀다가 찍히면 자기만 손해지.” 라던가 “권력과 자본을 고작 진실이나 신념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자포자기식 비아냥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당장은 실패했을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이 시작되고, 그리하여 견고했던 기득권층에 작지만 우직한 파문을 주며 세상이 바뀔 수 있음을, 모두가 <히어로>가 된다면 세상이 <체인지> 될 수 있음을 여운처럼 남긴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온 국민의 조롱거리가 된 높으신 검찰청에 시청각 교육물로 <히어로>를, 대선과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유권자에게는 <체인지>, 특히 마지막 회의 23분짜리 ‘대국민 TV 연설’ 롱테이크 씬을 추천한다.

덧붙여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드라마 내내 살짝 살짝, 로맨스가 발전될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이렇다 할’ 애정씬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검찰이나 정치권에 대한 드라마는 다수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축이 대부분 로맨스에 치중하여 사건과 그 해결은 로맨스를 발전시키고 돋보이게 하는 보조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즉 비중을 따진다면 ‘로맨틱 검찰 스토리’ 혹은 ‘로맨스 정치물’ 이 맞다. 물론 우리나라의 미니시리즈는 일본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분량을 방송하기 때문에 (일본은 보통 드라마가 10부작, 11부작이고 우리나라는 미니시리즈가 12~14부작, 보통의 주중 드라마는 20부작이 평균적인 방송분량이다.) 로맨틱한 장면이 좀 더 많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남녀상열지사가 끼지 않으면 시청률이 좀처럼 올라가지도 않고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어 순위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어느 날부터인가 드라마 뿐 아니라 유행가도 ‘남녀 간의 사랑’이 없으면 판이 돌아가지 않는다. ‘네가 없어서 죽을 것 같은’ 절절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로만 가득하고 ‘~~키스씬’ 만이 화제가 된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못 사는 로맨틱한 민족이 된 걸까. 아니면 드라마나 유행가에서 ‘로맨스’를 추구하여 대리만족을 얻어야 할 만큼 현실에서 더 이상 로맨틱한 삶을 살 수 없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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