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고대 성추행 사건 선고 공판

- 황진미

9월30일 아침 10시. 고대성추행 사건의 1심 선고를 보러 간 취재진과 방청객들로 법정은 꽉 찼다. 지난번 판사에게 읍소하던 ‘귀농부부’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공판에서 ‘모두 징역 1년 6월’이라는 비교적 낮은 구형이 내려진 가운데, 결국 집행유예가 선고될 것인지,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던 배씨는 변호인의 다채로운 변론에 힘입어 과연 무죄가 선고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조금 늦게 법정에 들어온 판사가 입을 열자 취재진은 일제히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고대 성추행 사건에 앞서 다른 사건의 선고가 먼저 잡혀있었다. 엑스트라에 해당되는 엉뚱한 피고인이 들어오자, 전혀 앞뒤를 모르는 관심 밖의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을 지켜보게 된 취재진들은 김빠진 표정으로 멀뚱거렸다. 판사의 지루한 서술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런데 듣다보니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다. 국제 마약운반 사건으로, 중국, 수리남, 페루를 오가는 스케일도 장난이 아니거니와 범죄액션영화 저리가라는 스펙터클이 살아있다. 수리남 국적의 피고인에게 내려진 선고는 징역 10년에 추징금 1억 원. 허걱. 저 사람 잡범이 아니었다! 어쩌면 관심이 집중된 고대성추행 사건보다 더 막강한 사건이 아닌가. 이런 드라마틱한 사건이 이렇게 무미건조한 방식으로 기술될 수도 있구나, 싶은 잡생각에 빠지려는 찰라 마약 운반 사범이 나가고, 고대 성추행 사건의 피고인들이 들어왔다.

# 배씨, 변호인 선임 후 경찰 진술을 번복하였지만, 양성평등 상담소 진술을 근거로 1차 추행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하여 모두 유죄

다들 얼굴이 굳어있다. 박씨, 한씨, 배씨를 순서대로 출생 년과 주소를 재확인하고 박씨와 한씨는 공소사실을 인정하나 배씨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판사는 판결문을 줄줄 읽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배씨는 경찰서에서 작성한 조서를 이후 부인하였지만, 고대양성평등센터에서 박씨를 면담한 내용과 배씨가 메일로 보낸 답변서가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판사는 배씨의 메일이 스스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왜곡의 가능성이 낮고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래도 되는 거냐며 가슴과 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는 기제내용이 피해자의 상의나 속옷을 내려 주려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되며, 배씨도 1차 추행에 가담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말하였다. 또 박씨도 상담소 면담에서 배씨가 가슴과 배를 터치하는 등 1차 추행에 동참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배씨가 1차 추행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판사는 배씨가 변호인 선임 후 진술변화를 보였다고 지적하며, 배씨가 박씨에게 추행을 중단하라고 제지하지 않고, 직접 피해자의 옷을 내려주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2차 추행에 대해서 피해자의 진술이 피고인들의 추행 순서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다소 엇갈림이 있지만, 주요 부분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있으며 내용도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판사는 피해자에게 추행 과정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과 기억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또한 피해자의 진술이 한씨의 진술과 일치한다고 덧붙였다. 피해자가 2차 추행 후 다른 친구와 나눈 카카오 톡 대화는 1차 추행에 배씨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보낸 것으로, 이는 배씨에 대한 신뢰관계 때문에 배씨마저 함께 했을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또 배씨가 피해자에게 사과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은 (나중에 배씨가 주장하듯이 박씨, 한씨와 피해자 사이의) 중재자로서 한 행위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을 포함한 이의 잘못을 사과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변호인은 펜션이 4명이 나란히 잘 수 없을 만큼 좁았다고 주장하였지만, 한씨의 진술에 의하면 옆으로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갈음하였다. 항거불능성에 대해서는 피고인들이 피해자가 잠이 든 상태에서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여 2차 추행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피고인의 인식 기준에서 항거불능성이 인정된다고 하였다. (피해자에게 약간의 의식이 있었으니 항거불능이 아니라고 판단할까봐 우려했는데, 항거불능성은 피고인들이 피해자가 완전히 잠 든 것으로 알고 한 짓이라는 ‘피고인의 인식’을 기준으로 삼는구나) 판사는 “따라서 3명 모두 유죄”라고 선언했다.

# 박씨는 피해자가 잠자리를 옮겨도 쫓아가며 추행. 한씨는 합동의 정도가 낮고 배씨는 가담정도가 낮음. 박씨는 징역 2년 6개월, 한씨와 배씨는 징역 1년 6개월.

양형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3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되는 특수준강제추행죄가 성립되나, 감경 사유에 해당되는 것을 꼽자면) 박씨와 한씨는 깊이 반성한다고 하였고, 피해자를 추행하기 위해 여행을 갔다거나 계획적으로 범행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점, 박씨가 사진을 삭제한 점, 피고인들이 형사처벌의 전력이 없는 점, 배씨가 피해구제를 위해 공탁금을 낸 점 등을 꼽았다. 그러나 세 명 간의 양형의 차이가 있는 이유로 다음과 같이 꼽았다. 박씨는 2차 추행까지 지속적으로 추행하였고, 2차 추행에서도 피해자가 잠자리를 옮기자 쫓아가서 계속 추행한 점 등 가담정도가 상당히 무겁고, 한씨는 1차 추행에서 한씨는 피해자와 단둘이 남은 상태에서 추행을 하다가 박씨가 들어와 함께 추행을 하는 것을 알고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합동의 정도가 낮으며(2인 이상이 합동으로 추행을 저지르면 가중되는데, 합동의 정도가 낮으니 감경사유가 된다는 뜻), 배씨는 1,2차 모두 가담하였으나 가담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또한 피해자가 이들과 같은 과 친구로 정신적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고, 지나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 신상이 알려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으며, 피고인들에 대해 강한 처벌을 원하고 있어 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선고를 내렸다. “박씨는 징역 2년 6개월, 한씨와 배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처하고 촬영에 쓰인 메모리 카드와 휴대폰을 압수하고 이들의 신상을 3년간 공개한다.” (“단 형의 집행을…”하는 집행유예의 멘션이 따라 붙는지 귀를 쫑긋 세웠지만, 없었다.)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가 살짝 웅성댔다. 판사는 피고인들에게 형량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며 발언을 마쳤다.

# 여자애가 술 취해 자면 안 건드릴 남자가 어디 있냐고?

세 명의 피고인들의 표정은 허탈한 듯 하얗게 굳어 있었다. 방청석을 꽉 채웠던 취재진들은 구형보다 높은 선고에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옆 사람에게 살짝 확인하기도 하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는 “여자애가 술 취해 자면 안 건드릴 남자가 어디 있느냐”는 중년 여성의 볼멘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리는 가운데, 취재진들은 스마트 폰을 들고 문자와 전화를 해댔다. 초기에 혐의를 인정했던 배씨의 진술을 뒤집고 펜션의 현장 검증을 제안하는 가하면, 한번 잠들면 안 깬다는 배씨의 잠버릇을 증언할 증인이라며 동기생을 불러놓고 피해자에게 ‘그런 이미지’가 있는지 묻고, 피해자의 사생활을 날조하고, 급기야 피해자가 배씨를 무고한다고 주장하는 등 성추행 변론의 진기명기를 다 펼쳐보였지만, 결국 모두 ‘뻘 짓’이 되어버린 변호사에게 선고에 대한 소회를 묻고 싶었지만, 선고 일에 변호인은 출석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나오지 않았다. 선고 당일 3명의 피고인들은 모두 항소하였다.

당연하다. 피고인들의 입장에서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난번 공판에서 한씨의 변호인은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와 “사실 이 사건, 범행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데, 여론에서 관심을 갖는 바람에…명문대 의대생에 집단 성추행이라니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하필 영화 <도가니>의 흥행으로 당시 집행유예를 판결한 판사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판국에 재판부에게 심리적 부담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언제나 그러하듯, 선거정국과 맞물려 여론의 관심이 꺼지고 <도가니>의 분노도 잊혀 지면 항소심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피고인들의 염원도 그것이리라. 그날 밤 EBS 금요극장에서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일본의 법정영화가 방영되었다. 무고한 피고인이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몰려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지만, 유죄를 선고받고 ‘항소합니다’라는 대사로 끝나는 영화이다. 우연치고는 얄궂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나쁜 넘들이라고 하고 싶지만, 나쁜 사람들! 무책임한 사람들! 이라고 정정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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