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85살 현역기자의 생일파티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지난 9월29일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 기자실에선 특별한 파티가 있었다. 올해 85살이 된 닥터 고든 마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동료 기자들이 베풀어 준 바비큐 파티가 그것이다. 영국 태생인 고든은 젊은 시절 로이터 통신 기자로 일할 때 중부 아프리카에서 부족 분쟁을 취재하다 원주민 전사가 쏜 독화살을 맞고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총탄이 아니라 ‘독화살’이다. 의식불명 상태로 본국으로 후송된 고든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동료들이 슬픔에 잠긴 눈으로 애처롭게 지켜보는 사이에 갑자기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고든은 제네바 기자클럽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눈을 막 떴을 때 병상 주변에 둘러선 검은 양복 차림의 동료들이 꼭 저승사자처럼 보였다”고 했다.

지팡이에 의지해 2초에 한 걸음씩 천천히 걷는 이 영국신사는 지금도 현역기자다. 비록 프리랜서 신분으로 바티칸 방송을 비롯한 몇몇 매체들을 위해 건강이 허락할 때만 간헐적으로 기사를 보내긴 하지만, 내 책상에서 왼쪽으로 네 칸 떨어진 책상에 앉아 있는 분명한 동료기자다. PC 세대가 아닌 그는 아직도 타자기로 기사를 쓴다. 나는 그가 ‘따닥 따닥’하는 소음을 내면서 기사를 쓰고 있을 때면 살아있는 역사가 같은 공간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일종의 행복감을 느낀다. 그가 유엔 유럽본부 프레스룸 #1을 들고 날 때 무거운 출입문을 대신 열어주면 한국에서 온 손자뻘의 기자에게 매번 엷은 미소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지난해 유엔 유럽본부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내부 행사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마이크를 잡고 사무차장에게 낮고 느린 어조로 “당신이 다양한 직위에 있을 때 내가 쭉 지켜봐왔는데……”라며 입을 열었다. 그 말 한 마디에 유엔 유럽본부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사무차장의 권위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든, 어서 말씀하세요”라고 공손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든뿐만 아니라 유엔 유럽본부 출입기자 중에는 고령의 원로기자들이 참 많다. 내게 가끔 “자네가 내 아들이 될 수도 있었을 걸.”이라며 농담을 건네는 오스트리아 출신 피에르 시모니치는 올해 75살이다.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가장 자주 대화를 나누는 그는 ‘철의 장막’이 무너지던 시절의 모스크바를 비롯해 아프가니스탄과 레바논 등 온갖 역사의 현장을 누볐다. 제네바에 주재하지는 않지만, 매년 1월 말에 열리는 다보스포럼에서 2년 연속 조우했던 AP 통신의 백전노장 여기자 메레디스도 칠순이다. 작은 키에 야무진 인상의 그녀는 샐러드 바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줄서있는 내게 먼저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걸더니, 대뜸 자신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연합뉴스에서 은퇴한 선배 기자의 안부를 묻는다. 그녀는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200명도 넘는 기자들의 눈치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하이 톤의 낄낄 거리는 웃음을 날리는, 젊은 후배들의 틈바구니에서 무게가 실린 해설기사를 척척 써내는 매력적인 현역기자다.

전문성을 강조하는 시대다.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는 온갖 종류의 책과 신문의 칼럼에서 수없이 나오지만, 정작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듣기 어렵다. 언론계와 법조계, 의료계, 시민단체 등 모든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확보하려면 현장에서 오래도록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연륜과 권위를 갖춘 개인이 많아지면 시민사회의 힘이 커지고, 관료사회가 함부로 여론을 호도하거나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한국 사회에서 기자들은 40대 후반이면 대개 취재 현장을 떠나 데스크에서 앉은뱅이 생활을 하게 된다. 아직 팔팔한 젊은 나이에,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현장을 떠나게 되니 언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손실이 된다.

공직사회도 마찬가지다. 외교관들을 예로 들면 통상 한 임지에서 3년이 임기다. 그나마 최근에는 미국 워싱턴 D.C와 뉴욕, 제네바와 같은 인기 있는 공관의 경우 초임 서기관의 임기가 2년6개월로 줄었다.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임지에 도착해서 집을 구해 이삿짐을 풀고, 자동차를 사고 자녀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는 등 정착 과정에만 짧게는 6개월이 걸리고,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1년 이상이 걸린다. 다른 임지로 떠나기 전에도 후임자를 위해 인수인계를 준비하고 새로 옮겨갈 곳의 현황을 파악하고, 출국 절차를 챙기는 데 6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정작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1년6개월이 안 되는 셈이다. 이래서야 5~6년이 기본인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 경쟁이 될 수 없다. 현장에 대한 이해와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진 이들의 눈에 한국의 외교관들은 잠시 있다 갈 손님 취급을 받을 공산이 크다.

우리 사회에서 기회의 균등은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은 전문성을 가진 개인들이며, 그들이 가진 소중한 지식과 경험, 네트워크다. 위에 소개한 쟁쟁한 원로 현역기자들이 한국에서라면 기자 노릇을 계속하는 것은 고사하고, 저임금의 궂은 일 외에 다른 일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 함께 조금씩 천천히 가는 게 더 효율적이고,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응답 1개

  1. cman말하길

    맞습니다. 해외근무를 하다보면 현지 법과 문화에 정통한 인재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것은 업무 외적인 것일뿐 업무적인 면에서는 기회의 균등을 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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