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공감 능력을 키우자 – 1. 사이코패스가 생기는 이유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수안아,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마지막 수업을 들어다오. 오래돼서 다 기억나지는 않으니 주요한 대목만을 요약해보겠다. 그 시간 공개홀에서 네 엄마와 아빠는 그리고 본교 선생님, 전교조 조합원선생님, 제자들, 친지, 친구들과 함께 너도 할아버지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읽기 바란다.

홍아야. 너도 사이코패스라는 말 들어봤지? 풀 섶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덮쳐 뒤꿈치를 무는 뱀같이 갑자기 해코지를 할 것 같은 사람, 도대체 불쌍함을 한 번도 느껴본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곁에 있으면 왠지 소름이 끼치는 사람이래. 이번에는 사이코패스가 어떤 사람이고 왜 그런 사람이 생겼으며 정말 치료 방법이 없는가를 알아보고 이 이야기에서 정서적 공감 능력이 인간에게 왜 중요하며 또 어떻게 그것을 길러야 하는지 알아보자꾸나.

사이코패스는 공감능력이 없어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이 없는 성격 장애자란다. 그들은 오로지 이기적인 동기에서 움직이고 이기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므로 은밀하고 치밀하게 그러나 때로는 즉흥적인 폭력으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대. 또 그들은 말을 잘 둘러대어 일시적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나 들통이 나도 결코 자신의 언행을 책임지려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대.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은 남들이 비난하는 짓이며 그래서 처벌받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지만 오히려 감쪽같이 남몰래 그리고 치밀하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과대 망상적인 자기 존중감이나 자기 만족감에 빠져 있대. 이렇게 비뚤어진 인간이 되는 까닭은 남들과 공감에 맞추어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조절하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래.

양심이라. 양심이 대체 뭘까. 사전적인 의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인 기준이래. 이 도덕적인 기준, 즉 양심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학자들에 따라 주장이 다르더구나. 직관주의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근거를 대어 따져보지 않고도 판단할 있는 기준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한단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에 쌓인 경험으로 현재의 사건을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자들은 양심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규범(지켜야할 관습이나 도덕이나 법률)에 대한 경험이 마음속에 체계적으로 내면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대. 한편 행동주의자들도 이와 비슷해서 계속된 사회적인 자극에 따라서 학습된 행동의 기준이라고 보아 경험설을 지지한대.

만약에 양심이 경험 이전에 완전하게 주어진 것이라면 경험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잖니. 그러나 이를테면 전쟁터에서 살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고 신병에게 적군 포로를 잔인하게 죽이게 하고 전투에 내보내면, 그 신병이 계속하여 적을 쏘아 죽이고 내가 살아남았다는 승리감에 도취되다가, 나중에는 살인 자체에 대한 쾌감마저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들은 일이 있어. 전쟁 경험이 한 개인의 인간성(양심)을 어떤 과정을 거쳐 마비시키는지 드러나는 사례이지. 또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것 따위 관습적 규범과 처첩제도 따위 도덕적 규범과 사형제도 따위 법률적 규범에 대한 양심적인 판단이 문화권이나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달라서 똑같은 행동이라도 한 쪽은 비난하고 다른 쪽은 칭찬하지. 만약에 이와 같이 양심이 개인이나 한 문화권의 사회적인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양심을 선험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잖니.

그러나 같은 행위를 문화권(사회)마다 다르게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부야. 맹자가 든 유명한 사례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냈으면 칭찬을 받을 일이지만 우물에 밀어 넣거나 못 본 체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 정직은 문화적 차이나 개인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인 선행으로 칭찬받으며 거짓은 보편적인 악행으로 비난받지. 이와 같이 양심이 구체화된 규범들, 관습이나 도덕 법률 전체를 비교·대조해 본다면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행위의 공통분모가 문화권이나 개인적인 차이를 넘어서 우연으로 돌릴 수 없을 만큼 훨씬 크다는 것을 우리 바로 알 수 있잖니. 만약에 문화권이나 개인 차이를 넘어서는 공통된 규범이 훨씬 더 많다면 양심은 사회적인 기준(규범)이 내면화된 것이 아니라 선악에 대한 판단 기준과 능력인 양심은 누구에게나 경험 이전에 비교적 완전한 가능태로 주어졌음을 뜻하지. 공통된 규범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은 규범보다 양심이 먼저 존재하며 규범은 양심의 구체화에 지나지 않음을 뜻하니까.

그렇다면 양심의 선험설과 경험설 어느 쪽이 옳은가. 하버지는 양 쪽 다 옳다고 본단다. 가능성 없는 현실성이 없고 현실성 없는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지. 양심의 가능성은 선험적이지만 양심의 현실성은 경험적이라고 생각한단다. 공감 능력의 가능성도 선험적이지만 공감 능력의 현실성은 경험적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공감과 양심과 규범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하버지는 규범은 한 문화권의 양심이고 양심은 한 개인에게 들어있는 규범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서로를 지지하며 규정하는 보완관계로 본다는 말이다. 어느 문화권이든 규범이 있게 마련이고 어느 개인이든 양심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인간의 규범적인 능력 즉 공감이라는 공약수로 갈등을 해결하여 공존·공영할 수 있는 양심의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한 문화권이 사회·역사적인 경험에 따라 약간씩 다른 관습과 도덕과 법률 등의 규범을 가지게 되듯이 한 개인도 경험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양심의 현실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공감과 규범 또는 공감과 양심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거야. 똑같은 문제 상황에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마다 또는 문화권마다 서로 다른 감정적 반응을 한다면 사회의 규범이나 개인의 양심에 인류적인 보편성은 없었을 거다. 공감 때문에 규범과 양심이 생기고 보편성이 생긴단다. 가진다. 거꾸로 규범이나 양심이 공감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실제 상황에서 작동될 수 있다는 사실이나, 한 사회의 규범체계나 한 개인의 양심에 내면화된 행동 기준이 분명할수록 그 사회나 개인의 공감이 더욱 민감하고 분명해진다는 사실에서 공감과 규범 또는 공감과 양심의 관계가 서로 의존적이고 보완적임을 알 수 있어.

규범과 양심 그리고 양심과 공감이 서로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공감으로 행동의 기준인 사회적인 규범이나 개인적인 양심을 세울 것을 제안했구나. 예수님의 적극적인 행동 기준은 내가 대접 받고 싶은 그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며 공자님의 소극적인 행동 기준은 남이 싫어하는 일을 그에게 하지 않는 것인데 모두 공감을 전제로 말씀하신다. 입장을 바꾸어 내가 네 입장이나 처지라면 또는 네가 내 입장이나 처지라면 무엇이 좋고 싫을 것인지 그래서 무엇을 하고 말 것인지 그 기준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거다. 성현들의 말씀은 공감으로 행동의 기준을 찾고 그 기준이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인 양심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 쌓여서 사랑과 인(仁)과 자비가 가득한 마음이 되므로 공감하는 만큼 사랑이나 인 또는 자비를 알 수도 있고 실천할 수도 있다는 거다.

바람직한 인간성 가운데 성현들이 강조하는 공감 능력을 진화과정에서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새끼를 위한 파충류 어미의 역할은 뇌간의 생식본능에 따라 적당한 환경에 알을 낳는 것까지가 전부이다. 알을 낳고 떠나는 어미와 알 또는 새끼 사이에 감정적인 소통이 불가능했고 불필요했다. 그러나 새끼의 사랑스러움에 완전히 공감하는 포유류의 어미에게는 새끼를 낳아 자립할 때까지 돌보는 보호 본능이 헌신적으로 작동된다. 새끼 또한 어미의 보호본능을 자극하여 자신의 요구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야 생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새끼를 낳아 길러야 하는 포유동물에게는 어미와 새끼 사이에 강력한 유대감이 생기고 이에 따라 감정을 처리하는 중심 신경계가 발달한 것이 변연계란다.

포유류가 파충류의 뇌간 위에 감정을 처리하는 변연계를 덧붙였는데 이를 구피질이라 한다면 영장류들은 변연계 위에 감정을 조절하는 장치로 신피질이라는 또 한 층의 덮개를 만들었구나. 여기서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현실 상황에 맞게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한다는 말이란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상황은 단독 생활보다 훨씬 복잡해서 풍부한 감정만으로는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단다. 그래서 문제 상황에 맞게 감정을 조절하면서도 생존 문제 해결에 대한 지속적인 집중력을 가져야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지. 뇌의 바깥 부분에 있는 것이 신피질인데 그 중에 이마 쪽의 신피질인 전두엽은 뇌간에서 올라온 본능적인 욕구와 변연계에서 올라온 감정을 현재의 문제 상황에 대한 정보들 특히 그 문제를 대하는 상대방의 감정적 정보에 맞추어 행동을 조절한단다.

정상인이라면 문제 상황에 맞추어 감정을 조절해야 하고 남들과의 공감으로 할 일과 말 일을 구별하는 행동 기준을 세운다. 그러나 전두엽이 고장 난 사람들, 그래서 공감을 잘 못하므로 양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이른바 사이코패스라는 이들은 어떤 기준을 따라서 행동할까. 이들은 공감으로 공동선을 찾아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충류처럼 오직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에서만 움직인다고 한다.

정신 의학 쪽에서는 유전적인 요인으로 세라토닌이라는 신경 전달 호르몬의 분비가 부족하니까 전두엽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남들과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생긴단다. 그러나 이런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고 하여도 공감능력을 기를 수 있는 사회·환경적인 성장 조건에서 자라면 이런 사람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다. 어린 시절에 이런 장애가 있어도 실제로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열에 한둘이라는 연구 결과들이 무엇을 뜻하니. 이 병이 생기는 원인 중에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요인보다 후천적이고 사회 환경적인 요인이 훨씬 더 결정적이라는 뜻과 인간성에서 공감능력이 아주 중요한 능력이라는 뜻과 그래서 공감 능력을 기르는 취학 이전의 어린 시절에 엄마와의 유대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 있구나.

아마 유전적인 원인으로 전두엽에 장애가 있지만 좋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남의 감정을 느끼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남들의 감정을 느낌이라는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추리하여 객관적인 방식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게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이렇게 이성적인 능력으로 부족한 정서적인 공감능력을 보완하면서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유지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남의 감정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한 경험들이 무의식 속에 계속 쌓이다 보면 경험과 같은 상황에서 거의 직관적으로 남의 감정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버지는 이런 과정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런 방식을 치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전두엽에 장애가 있는데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대. 다른 행동들에서 공감능력이 의심 되는 정치인들이 별 느낌이 없더라도 표를 의식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계산된 연기로 사회적인 약자들인 아이들이나 장애인 또는 가난한 사람들과 친밀한 듯이 사진을 찍어 자신의 공감능력을 널리 과시할 수도 있을 게다. 정치가나 군인들 사이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하며 이들은 과대망상적인 권력욕망과 자기 과시욕으로 교활하고 잔인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어떤 일을 밀어부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듯이 어떤 업적을 쌓기도 한대. 요즘에는 화이트칼라 계층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대. 아마 이들도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좀 더 많은 공감을 경험하게 되고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간관계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게다.

생화학자인 레인 교수는 전두엽 장애가 유전적인 원인으로 생기지만 아이가 머리를 부딪쳐 부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하며, 출산할 때 아이의 두뇌가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하고, 임신 기간 중에는 음주나 흡연, 마약복용 등을 절대로 하지 않아야 건강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 말대로만 판단한다면 사이코패스가 유전적인 요인이나 임신과 출산 이전의 요인으로 생기므로 출산 이후에는 그 어떤 치료 가능성도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출산 이후의 경험을 중시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공감 능력이 엄마나 보호자와의 사랑의 애착 관계에서 길러지며 공감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삭막한 환경에서 자라면 전두엽 장애자가 사이코패스가 되어 남에게 교활하고 잔인한 공격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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