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언감생심, 공주의 남자

- 오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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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쓰는 말, 언감생심. 한문이다. 한자가 아니라. 어찌 언(焉), 감히 감(敢), 날 생(生), 마음 심(心), 어찌 마음이나 먹어 보겠느냐, 어찌 꿈이나 꾸겠느냐는 말이다. 이 말을 왜 하느냐 물으신다면? 모르고 쓰는 분이 많은 것 같아서…. 아닌가? 나만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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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김종서와 세조를 다룬다며 연락이 왔다. 늘 그렇듯이 거절할 수 없는 이의 소개를 받았다는 압력과 함께. 관심이 있는 주제다.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전후하여 펼쳐지는 무도(無道)의 역사! 그래서 후대 어느 무렵부터 ‘계유정난’은 ‘계유사화(癸酉士禍)’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안정시킨 게 아니라, 멀쩡한 인재들 죽인 재앙이라는 뜻.

왕정에서는 나이 어린 것이 양위(讓位)의 명분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가 죽어야 자식이 왕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수명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다행히? 재수없게?) 아버지가 오래 살다 보니 마흔, 쉰이 넘어 왕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살 전후도 왕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어릴 때는 고명(顧命) 신하를 정하거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여 경험 부족을 보완한다.

단종은 나이 어리다며 숙부 수양에게 양위했다. 단종 3년의 일이다. 단종 1년에 수양은 계유사화를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을 때려죽인다. 지 맘대로. 반칙이다. 그리고 자신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한다.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다 하는 셈이다. 1980년의 전 뭐 닮았다. 물론 이것도 반칙이었다.

태종 무렵부터 조선 사람들은 종친(宗親), 그러니까 왕의 형제, 부마 등은 공적 영역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룰을 정했다. 종친부라는 관청을 만들어 품계와 녹봉을 주어 품위는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종친은 대개 한량이거나 예술가였다. 세종의 아들이자, 글씨 잘 쓰기로 유명했던 안평대군, 탁월한 예술가였다. 그 역시 형인 수양에게 반역죄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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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사육신(死六臣) 사건은 세조가 즉위한 뒤인 1456년(세조 2) 병자년이다. 계유사화로부터 3년 뒤. 이 역시 후대사람들은 병자사화라고 부른다.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가 중심이 되어 단종을 복위시키고 세조 찬탈을 바로잡으려던 사건. 김질(金礩)이란 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지처참, 참수, 멸족의 화를 당한다. 죽은 사람은 사육신, 산 사람은 생육신. 여섯 명이라는 숫자는 별 의미 없다.

이 사건의 의미.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자들이 공신(功臣)이 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다. 더 큰 손실은 원기(元氣)의 손상이다. 그 첫 번째 현상은 뜻있는 사람들이 과거를 보지 않고,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 김시습. 두 번째로는 욕 하면서 닮는다는 그 무서운 내면화 효과. 공부 열심히 하고, 남들과 함께 어울려 살려고 노력하고, 잘못 된 데가 있으면 바로 잡아보고 등등, 그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 또는 그렇게 살아봐야 나만 손해지 하는 태도를 조선 사람들이 갖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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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새삼 김종서와 세조를 다루려는 뜻은 다름이 아니다. 요즘 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방영되는데, 아마 두 프로그램의 시너지 효과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공주의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아파서 안 본다. 계유사화, 병자사화, 두 사화 뒤로 100년 동안, 퇴계와 율곡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조선은 허우적거렸다. 나라도, 사람도. 요즘 사실과 허구, 역사와 문학을 요모조모 고민하는 중이라 챙겨보아야 하는데, 그 시대를 생각하면 답답해져서 썩 내키지 않는다. 다만, 공주는 문채원이라는, ‘바람의 화원’에서 처음 보았던 배우라고 알고 있고, ‘남자’는 관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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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은 물론 계유사화지만, 더 직접적인 계기는 《금계필담(錦溪筆談)》이라는 설화집이다. 서유영(徐有英 1801 순조 1~ 1874 고종 11)이라는 사람이 효성, 의리, 사랑, 여걸, 청렴, 신동, 풍류 등 141편의 일화, 민담을 엮은 책이다. 각각 한두 쪽 정도의 짧은 얘기다. 거기에 실린 처음 다섯 편은 계유사화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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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과 추강 남효온이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을 업어다 아차고개(노량진)에 묻었다는 얘기, 단종이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 뒤 영월군수가 되는 사람은 영문을 모르게 죽었는데, 여차저차 해서 무덤에서 단종 시신의 목에 걸린 활줄을 풀어주었더니 그런 일이 그쳤다는 얘기, 문종의 왕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비 권씨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시숙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한 뒤 세자로 있던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죽었고, 세조는 화가 나서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을 파헤쳤다는 얘기,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남편과 사별하고 쫓겨나 동대문 밖 어떤 봉우리에 매일 올라 영월을 바라보았고 사람들이 그걸 슬퍼하여 그 봉우리를 동망봉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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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얘기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세조에게 한 공주가 있었는데 성품이 어질었다. 계유, 병자사화를 보면서 무척 마음 아파하며 밥도 못 먹었다고 한다. 세조의 노여움이 커지자 정희왕후가 몰래 유모를 딸려 멀리 도망치게 했는데, 충청도 보은 땅 산골짜기에 이르러 한 총각을 만났다. 둘이 가까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 혼례를 하고 그때야 서로 신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 총각이 바로 절재 김종서의 손자였던 것이었다. 세조가 속리산에 왔다가 딸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고, 김종서의 손자에게도 관직을 내려주겠다고 했는데, 며칠 뒤 가보니까 다른 데도 숨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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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이야기가 다 사실은 아니다. 일례로, 첫 번째 이야기인 사육신에 대한 서술에서, “을해년에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물려주고 영월에 물러가 있을 때, 성삼문은 취금 박팽년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도모하여 … ”라고 되어 있는데, 을해년은 세조 원년(단종 3년)이고 이 때 단종은 상왕(上王)으로 한양에 있었다. 영월로 유배 가는 것은 사육신의 상왕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이다. 그리고 영월에서 단종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공주의 남자’의 모티브가 된 얘기에도 어설픈 데가 많다. 세조의 딸이 하나라는 설, 둘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세조가 속리산에 왔을 때 어떤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마를 멈추었는데, 세조가 우는 연유를 물어보니 자기가 대궐을 떠나 피해 다닌 얘기를 줄줄, 첨 보는 사람에게 했다는 대목은 더욱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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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금계필담》은 계유, 병자사화에 대한 사실이 아니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실이다. 왕조사회에서, 세조 이후의 왕들은 모두 세조의 후손인지라 단종과 사육신이 쉽게 복위, 복권될 수가 없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무려 240년 만에, 장희빈만 기억하는 숙종 때, 바로 그 장희빈이 쫓겨난 뒤에, 조선판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루어진다.

240년, 말로 하긴 쉽다. 나는 지금 하루가 여삼추(如三秋)이다. 혹시, 세조에게 착한 딸이 있다고 치고, 절재 김종서에게 살아남은 손자 한 사람이 있다고 치고, 둘을 여차저차하게 만나게 해서라도, 아니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은 뒤틀린 역사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도 이 이야기를 흉내 내어 뒤틀리는 역사를 견디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나 지어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 잠시 생각했으나, 언감생심, “이 장로에게 어질고 착한 딸이 있었는데, … ”로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떨어져서 … .

응답 2개

  1. 말하길

    푸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했습니다. 이장로에게 어진 딸이 있었는데….정말, 아무리 ‘문학적’인 정권이라지만, 너무 리얼리티가 떨어지네요.

    • 여하말하길

      고건 그냥 팁이었구요…(^^) 5년 또는 10~20년과, 240년을 견주어 잠시 보고 싶었습니다. 왕정이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노여움과 슬픔 등 칠정은 같으니까요. 내가 그런 참을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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