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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살아간다> 슬픈이야기, 그 존재이유

- AA

우리나라 방송제작 평균 ‘눈높이’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다.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니 2학년쯤으로 그 기준이 내려갈지도 모르겠다.) 이는 대박 시청률과 광고 완판을 달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 조건의 하나다. 물론 지식인인양 있어 보이는 단어를 쓰지 않고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선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생에 준하는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본심은 다르다. TV를 보는 동안 ‘사고’하지 않고 말초적으로 ‘반응’ 해야 프로그램이 팔린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아무려나, 실제로 시청자들은 TV를 보는 동안은 잠시라도 각박한 현실을 잊고 꿈과 환상, 욕망과 이상을 누리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상황이다.

오늘 소개할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는, 힘든 현실을 잊자가 아니라 힘들어도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자며 조용히 대화를 건넨다. 모두 다 잊고 웃으려고 TV를 켠 당신에게 툭, 툭 공을 던진다. 마치 캐치볼을 하자는 듯. 당신이 지금껏 구별해놓은 선과 악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현실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하여 직면해야 할 진실을 놓친 것은 아닙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인 여동생이 함께 놀아달라고 하는 걸 떼어내고 당신은 오로지 친구와 야한 비디오를 빌려 볼 생각에 들떴다. 그런데 여동생이 다음날 호숫가에 둥둥 뜬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여동생을 죽인 범인은 당신의 친구다. 동네에 떠들썩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망치로 머리를 여러 차례 무참히 가격당해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집에 경찰이 들이닥쳐 중학교 2학년생인 오빠를 연행한다. 당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자상했던 오빠가 ‘그’ 살인범이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에 방영된 이 드라마는 극본을 쓴 작가의 전작 <마더>도 그러했듯 소재가 다분히 자극적이다. (이순신의 혼령에 빙의되거나 점 하나 찍었는데 사람 못 알아보는 드라마에 길들여진 분들께는 별 것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 사카모토 유지의 훌륭한 점은 자극적인 소재를 사람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 그들의 내면에 집착적이리만큼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이다. 즉 극한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겪는 고통, 공감, 변화, 성장이 온전히 드라마의 축이 된다. 충격적인 설정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넣을 ‘상황’일 뿐, 그 설정을 과장하거나 흥미 위주의 전개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후카미 히로키, 토오야마 후타바라는 젊은 남녀다. 위에 언급했듯 후카미 히로키는 여동생이 살해당한, 피해자의 오빠고 토오야마 후타바는 오빠가 살인범으로 밝혀진, 가해자의 여동생이다. 사건으로부터 15년이 지난 어느 날 히로키의 집으로 후타바가 찾아온다. 그녀가 그를 만나러 온 이유는 가족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15년 동안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고 전화번호와 성까지 바꾸었지만 얼마 못 가 동네에 ‘그 사건’에 대한 전단지가 붙고, 집으로 뚝 끊기는 전화가 30분마다 걸려왔다. 이웃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기본이요 이사를 요구당하기 일쑤고 직장에서도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하며, 같은 이유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는다. 어릴 적 학교에서 왕따의 제 1순위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로한 할머니와 15년을 그렇게 살았지만 더 이상은 한계라고 생각하여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5년간 끊임없는 공지를 해온 사람이 피해자의 가족인 히로키라고 판단한 후타바는 할머니를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사건으로부터 15년이 지난 현재, 두 가족의 삶은 언뜻 보기엔 달라 보인다. 그리고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피해자 측인 히로키의 부모는 사건 후 곧 이혼했다. 아버지와 줄곧 함께 살았지만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남동생을 데리고 사는 어머니는 가면을 쓴 것 같이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15년째 남처럼 살고 있다. 가해자 측인 후타바의 부모는 서류상으로는 이혼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수단이었을 뿐, 어딜 가든 가족이 함께다. 가해자인 후미야와의 인연을 끊은 가족은 마치 그런 일이, 그런 가족구성원이 없었던 것처럼 화목하게 살고 있다.

피해자의 가족은 그 사건이 모두 자신들의 탓이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고 가해자의 가족들은 가해자 본인의 잘못인데 가족이란 이유로 비난받는 것에 대해 어쩐지 반감마저 있는 듯 한 모습. 하지만 잔잔한 표피 아래로 복잡하게 깔린 내면은 작은 세포 하나 예외 없이 15년 동안 고통스럽게 묶여 있다. 다른 입장이지만 ‘사람’으로서 느끼는 같은 감정으로.

이야기는 15년 만에 대면하게 된 히로키와 후타바가 각자의 가족에게서 15년이라는 세월을 박제시킨 가해자 후미야를 찾는 과정으로 발전된다. 한 컷 한 컷 세심하게 연출된 영상 안에서, 한 겹 한 겹 등장인물의 속내를 드러내는 대사들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어우러져 흐른다. 두 가족은 15년 동안 감히 생각한 적 없던 희망, 내일, 삶과 같은 단어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어떠한 의미인지를 억지스럽지 않게 천천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찾아간다. 그 과정이 ‘과장된 해프닝’이 아닌 오로지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결을 따라 흐르므로 시청자는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 질문하고, 대답을 찾게 된다.

히로키의 여동생이 죽기 전, 히로키에게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는 왜 태어난 걸까? 아무 좋은 일도 없이 살다가 그렇게 죽을 거라면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슬픈 이야기는 대체 뭘 위해 있는 거야?”

동네 8살짜리 꼬마가 불쑥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선뜻 답할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 슬픈 이야기가 있는 건지, 이 드라마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매회 참고 보기 힘들 만큼 감정의 일렁임이 심하다고 해도 끝까지 본다면 이 이야기가 내놓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라 생각한다. 조그만 힌트로, 15년 만에 마주 앉은 후미야에게 히로키가 건넨 대사를 소개한다.

“오늘 아침, 해를 봤어. 아침에 화장실에 갔는데 냄새가 너무 나서 창문을 열었더니 냄새나는 화장실 창문 밖으로 아침해가 보였어. 그곳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는데. 다시 오늘이 시작되는구나, 라고. 즐겁든 괴롭든, 행복하든 허무하든, 사는 것에 가치가 있든 없든 오늘이 시작되는구나, 라고. 화장실 창문에서는 지난 15년간 매일같이 계속 오늘이 시작되는 게 보였던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하루하루가 오롯이 현실 그 자체인 ‘오늘’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우리는, 그래도 살아간다. 덧붙여, 드라마 속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다. 젊은 주연남녀 배우를 비롯해 가족으로 나오는 일본의 중견 배우들까지 전원, 작품 안에서 마음껏 ‘진짜 연기’를 한다. 오로지 작품만으로 승부한다고 한다면 어떻게든 이런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고 할 배우들이, 스탭들이 대한민국에도 아직 많다. 좋은 드라마의 3대 필수 요소는 연출, 각본, 연기와 같은 ‘사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시청률, 붙은 광고개수, 포털사이트 검색어순위와 같은 ‘숫자’가 아니니까.

응답 1개

  1. tibayo85말하길

    영화 < 그을린 사랑>이 생각나네요. 마치 드라마 전편을 본 듯해요. 보고 싶지만 어디서 어떻게 봐야하는지, 엄두가 안 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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