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8-미국의 가을 -행진 스케치

- 고병권(수유너머R)

1. 점거에서 행진으로

10월 5일. 행진이 예고된 3시가 되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점거가 시작된 지 19일 째. 쥬코티 공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인파를 만났다. 공식적으로 오늘 행진은 점거를 지지하는 대학생들과 노동조합이 함께 준비한 것이다. 사람들은 약간씩 들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대중이 스스로의 규모에 놀란 것이다. 평화재향군인회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뉴욕에서 이런 게 가능하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자기 대학을 찾느라 분주히 움직였고, 동호회나 트윗에서 만들어진 모임들도 피켓을 만들어 회원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행진 전 공원에 모인 사람들

행진 전 공원에 모인 사람들

멤버들을 확인하는 동호회들

멤버들을 확인하는 동호회들

3시 30분 쯤 ‘제너럴 에셈블리’의 한 사람이 곧 행진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차도가 아닌 인도를 통해 걷게 될 것이며 경찰과 충돌하지 말라고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점거자들로서 이번 행진을 주도한 학생과 노동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평화롭게 이곳 점거 장소까지 안내”할 것임을 강조했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을 집회장소로 맞이하러 가서 이곳으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와 학생을 맞이하러 간다는 말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한 말이었다. 이미 상당수 노동자와 학생들이 함께 행진하기 위해 이곳 공원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노동자와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장소는 법원 앞 ‘토마스 페인 공원(Thomas Paine Park)’이었다. 그곳은 미국 혁명의 주역이자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간의 권리>>의 저자 토마스 페인을 기리는 공원이자, ‘참된 정의의 행정이야말로 좋은 정부의 가장 굳건한 기둥(The True Administration of Justice is the Firmest Pillar of Good Government)’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법원 건물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라는 말은 ‘미국정신’을 강조하며 보수주의자들이 요즘 애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토마스 페인을 기리는 공원에서 월스트리트 점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인간의 권리’를 외치며 집회를 연 것이다. 한편에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름으로 미국의 배타적인 자부심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들의 장소에서 그들의 행위를 반복하려는 사람들, 즉 나라를 뜯어고쳐 나라를 다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은 애당초 점거를 통해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던가. 참 역설적이다. 미국을 만든 전략이 미국을 위협하는 전략이기도 하니 말이다.

참고로 <<뉴욕열전>>의 저자 고소 이와사부로는 그의 글 <뜰=운동(avant-gardening)>(부커진 R 창간호)에서, “미국의 형성에는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경위”가 있기에 거기서 최소한 두 가지 윤리적 요구를 받는다고 했다. 하나는 그들이 폭력적으로 침탈한 선주민의 특권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불법점거자’로서의 조상들의 행태를 인지하고 모든 이들의 유입을 “한정으로라도 계획적으로 승인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의 행위는 조상들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자 조상들의 행위(이후 미국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죄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행진 -우리는 99%다

행진이 막 시작될 때의 모습

행진이 막 시작될 때의 모습

경찰이 행렬이 차도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경찰이 행렬이 차도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3시 30분쯤 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 직전에는 비폭력에 대한 강조와 함께 세심한 법률적 조언도 제공되었다. ‘미등록이주자의 경우’, ‘등록이주자의 경우’, ‘시민의 경우’로 나누어서 문제가 될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나자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99%다. (그리고) 당신도 99%다(We are the 99%, so you are the 99%).” 행진을 하면서 사람들은 구호를 노래처럼 불렀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당신도’라는 말을 덧붙였다. ‘99%’라는 말은 특권층의 사람들을 1% 속에 고립시키고 다수의 사람들을 한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프레임웍’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곳을 점거하자(Occupy Everywhere)”를 외치기도 하고 “단결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를 외치기도 했다.

행진 중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할아버지

행진 중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할아버지

아이들의 구호 “우리는 99%다, 지구온난화를 멈춰라.”

아이들의 구호 “우리는 99%다, 지구온난화를 멈춰라.”

행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기본적으로 노동자들과 대학생이 많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보수 언론에서는 점거자들을 불과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사회불만세력’으로 묘사했지만, 뉴욕시민들은 점거자들 하나하나가 수많은 시민들의 분신이며, 자신들은 점거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현했다. 다양한 시민들이 참가한 만큼 행진은 축제의 퍼레이드 같은 느낌도 주었다.

<<Shock Doctrine>>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N. Klein)과 <<Blackwater>>의 저자 제레미 스카힐(J. Scahill)

<<Shock Doctrine>>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N. Klein)과 <<Blackwater>>의 저자 제레미 스카힐(J. Scahill)

뮤지션들(Local 802)의 행진

뮤지션들(Local 802)의 행진

사서모임. “사서들이 행진을 시작하면 일들이 모두 엉킨다는 거 알죠?”

사서모임. “사서들이 행진을 시작하면 일들이 모두 엉킨다는 거 알죠?”

사회안전망을 잘라내는 월스트리트의 돼지

사회안전망을 잘라내는 월스트리트의 돼지

3. 집회 -나는 다시 태어난 미국인이다

사람들이 공원 너머 법원건물쪽까지 다 차면서 경찰은 결국 도로도 내주어야 했다.

사람들이 공원 너머 법원건물쪽까지 다 차면서 경찰은 결국 도로도 내주어야 했다.

두 시간 정도의 행진이 이어졌다. 하늘에는 헬기 두 세대가 정지한 채 대열을 감시하고 도로에는 경찰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위압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지난 번 일부 점거자에게 최루 스프레이를 사용한 것, 그리고 브룩클린 다리에서 평화롭게 행진을 하던 시위대를 대량 연행한 것 때문에 뉴욕 경찰은 현재 고소 고발된 상태다. 토마스 페인 공원에 이르니 이미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집회가 진행 중이었다. 행진하던 수가 계속 유입되면서 넓던 공원은 어느 새 사람들로 꽉 차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은 공원 건너편, 그러니까 법원 앞 쪽으로 이동했고 그곳을 마저 다 채웠다.

만 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평일 오후에 뉴욕 맨하튼에 그 정도의 대중들이 운집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뉴스쿨(New School) 학생들이 ‘아랍의 봄 유럽의 여름 미국의 가을(Arab Spring European Summer American Fall)’이라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했다. 계절을 따라 운동이 세계를 순환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의 계절은 공간적으로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는 것이 아니다. 봄 옆에 여름이 놓이고 여름 옆에 다시 가을이 놓이고 있다. 봄과 여름, 가을이, 다시 말해 아랍과 유럽, 아메리카가 드디어 동시간대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얼마나 그 호소가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이들이 행진 중 10월 중순을 ‘세계행동의 날’로 만들자고 외치고 있다. 당장에 얼마나 큰 호응이 있을지, 솔직히 ‘세계혁명’이라는 네 글자는 여전히 몽상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 네 글자 중에서 앞의 두 글자까지는 와 있다고.

미국의 가을

미국의 가을

ARAB SPRING EUROPEAN SUMMER AMERICAN FALL

ARAB SPRING EUROPEAN SUMMER AMERICAN FALL

뉴욕이라는 도시는 세계가 가진 문제의 축소판이자 세계가 가진 가능성의 축소판이기도 한 것 같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나는 세계의 온갖 인종 온갖 문화가 유입되는 뉴욕이야말로 어떤 가능성의 공간이 아니냐고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내게 말했다. 여기는 세계에서 인종과 계급의 경계가 가장 확연한 곳이라고.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도시의 블럭 안에 한 인종으로서, 한 계급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이번 행진은 뉴욕의 문제가 뉴욕의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온갖 인종들, 온갖 문화를 가진 이들이 함께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99%다.” 그들은 분명 1%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모였지만, 그보다 먼저 그들 모두가 99%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개인적, 인종적, 문화적 차이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되었다. 오히려 그 차이들은 여기 온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인지, 말 그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함께 했는지에 대한 증명이 되었다. 그동안의 차이가 고립과 격리를 의미했다면 지금 차이는 힘과 다양성의 표현이 되고 있다.

행진을 시작할 때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양한 구호와 다양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서로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의 유모차 부대처럼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왔다. 귀여운 아이들이 ‘단결한 엄마들(Mamies United)’이라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을 벌였다. 그 옆으로는 환한 표정을 한 한 여성이 이런 피켓을 들고 지나갔다. “나는 다시 태어난 미국인이다(I AM A BORN AGAIN AMERICAN).”

엄마들의 단결, 아이들의 행진

엄마들의 단결, 아이들의 행진

나는 다시 태어난 미국인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 미국인이다.

4. 점거 -내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고 그녀의 목소리다

실시간 지지메시지 중계

실시간 지지메시지 중계

저녁 6시쯤 행진은 다시 점거 장소인 쥬코티 공원으로 오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어둠이 찾아왔지만 공원은 야시장이 열린 듯 오히려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곳곳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공원 한쪽에서는 페이스북을 통한 실시간 지지 메시지가 중계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응원 메시지가 이들에게 전해졌다.

마이클 무어의 연설

마이클 무어의 연설

그리고 곳곳에서, 이번 집회의 최고 상징어 ‘마이크 체크’가 울려 퍼졌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다. 내 말을 지금 전해달라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의 연설이었다. 그리 긴 연설은 아니었지만 오늘 행진을 정리하는 말로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역사적 날입니다. 이 운동은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민중들이 그것이 일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리더 때문도 아니고 큰 조직이 원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간 마이크를 원합니다. 왜냐구요? 이것은 바로 내 목소리이고 그의 목소리이고 그녀의 목소리이고 우리 모두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 집회를 유지시키는가. 정치가들이 이 집회를 제멋대로 이용하게(coopt) 두지 맙시다. 오늘 여러분 각자가 수십만의 미국인들을 대표하는 겁니다. 오늘 여기 올 수 없었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은 오늘 여기 있는 여러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그 사람들입니다. 이제 점거는 그들의 도시에 있을 것이고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곳을 점거합시다(Ocuupy Everywhere)! 그리고 이 빌딩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 특히 당신들 골드만 삭스. 누가 이 집회를 조직했느냐고? 바로 당신들이야 골드만 삭스. … 지금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대선이 있는] 내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말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미국은 ‘그만됐어(Enough)!’입니다. ‘더 이상 안 돼. 이제 충분해!’라고 말합시다.”

저녁 8시 발길을 돌리려는데 한쪽이 시끄럽다. ‘월스트리트로 행진하자’고 하는 강경파들이 나선 것 같다. 그들은 지금 집회 방식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경찰 사이렌이 연이어 울리고 큰 소란이 일었다. 밤늦게 뉴스에서는 수십 명이 다시 연행되었다고 나온다. 예전 촛불집회 경험으로는 조금 걱정되는 대목이다.

응답 3개

  1. 마이클무어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를 봤는데 남의일이 아닌거같아 눈물찍찍,콧물찍찍 흘렀습죠. 확실히 그가 100%좋은사람이 아닐수도 있지만 확실한건 그또한 99%임에는 틀림없겠죠..ㅎ
    그나저나 그 1%가 무슨짓을 저지를지 그게 걱정이더군요.ㅠ
    너무나 교묘하고 세련되게 교활해서 무슨짓으로 그들의 해체를 돕는 음모를 꾸밀 수도 있단 생각이 들더군요..쩝;;

  2. 고추장말하길

    글을 쓴 뒤 점거장소에 갔더니,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우리는 모두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함께 있다’는 피켓을 들고 있더구나. 그리고 마이클 무어 연설 참 잘하지? 한국에서도 ‘쇼셜테이너’라는 말이 있는데, 왜 이들의 영향이 커질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뜻. 정서노동처럼 노동에서만 정서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 사회운동에서도 ‘정서’가 정말 중요하지. 단순히 대중매체의 영향 탓으로 돌리기보다, 이 점에서, 탁월한 역량을 지닌 소셜테이너들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듯.

  3. tibayo85말하길

    우리는 99%다 라는 구호가 처음엔 팍 안 와 닿았는데, 글을 읽으니 감이 팍 오네요. 1%를 고립시키고 이질적인 것들을 한 데 모우는 그런 효과가 있군요. 마이클 무어의 연설, 감동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