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노마드 유대인, 카프카

- 박정수(수유너머R)

카프카는 유대인이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지금의 체코 남부지방의 유대인 ‘게토’ 출신으로 프라하에 입성하여 주류사회에서의 성공을 꿈꿨다. 1924년 폐결핵으로 죽지 않았다면 카프카는 그의 연인 밀레나나 여동생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문학적 후견자 역할을 했던 막스 브로트는 시온주의 정당의 지도자였으며, 이디시어로 연극활동을 했던 절친 이삭 뢰비를 만나면서 카프카는 이디시어와 유대교에 빠져 들었다. 그는 1911년 빈에서 열린 11차 시온주의자회의에 참석했고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소수문학(이디시어)’에 관한 강연을 했다. 또한 약혼녀 펠리체에게 유대인 국민보호시설 자원봉사를 주선하기도 했고 사망하기 1년 전 1923년에는 시온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계획까지 세웠다. 카프카의 문학은 유대인들의 신앙 체계와 카발라 서사에 깊이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카프카 문학에 대한 주류적 해석도 종교, 신화, 상징적 해석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 실존의 본원적 유죄성과 종교적 구원을 향한 좌절된 욕망을 그리고 있으며, 문학적 스타일도 신학적 알레고리에서 왔다는 식으로.

카프카가 자신을 유대인으로 동일화하는 건 ‘불안’을 통해서이다. 그는 유대민족의 고유함이 존재의 불안정성에 있다면서 이 세상 어디에도 자기 고향과 자기 소유물을 가질 수 없는 유목민의 운명에서 유대민족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킨다. 자기 영토와 소유가 없는 것은 원죄나 결핍이 아니라 유목민 특유의 끊임없는 변신 능력과 연관된다. 자기 것이 없기에 항상 타자를 수용하고 변화시키는 능력 말이다. 거기에 유대민의 인류사적 사명이 있다.

유대 민족은 씨가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종자가 주위 세계의 물질들을 끌어당기고, 물질들을 비축해서 자신의 성장을 높이듯이 인류의 힘을 흡수하고 정화해서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유대인의 운명적 과제예요.(<카프카와의 대화>)

카프카는 시온주의자였지만 그것은 “미친 듯이 남의 거주지를 차지하려는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자신과 세계 어디에도 고향은 없다.” 두고 온 고향도 없지만 도달할 이상향도 없다. 유대인의 고향은 방황과 변신의 땅, 즉 ‘사막’뿐이다. 정확히 말해 유대인은 세계를 사막으로 만든다. “세계를 황폐화시킬 능력”이야말로 유대인의 선택받은 능력으로 그런 황폐화의 능력과 접속함으로써 인류는 고향, 영토, 소유물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되고 변신한다. 그것이 카프카가 생각한 바, 고향을 상실한 “인간 고유의 법칙을 되찾는” 시온주의이다.

카프카의 문학적 스타일은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의 몽환적인 이야기는 숨겨진 의미를 비유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 까마귀(체코어로 Kafka는 까마귀를 의미한다)의 관점에서 본 세계의 존재방식이다. <변신>의 주인공이 어느날 딱정벌레로 변신했다는 건 쓸모없는 인간이 됐다는 것의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욕망과 감각이 인간의 표상세계에서 이탈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가족, 회사, 사회와 맺는 관계와 감성의 형식이 변했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카프카에게 존재의 본질은 사실적이든 알레고리적이든 ‘모방’해야 할 형상이 아니라 흐름과 운동, 속도와 관계 속에 있다.

알레고리란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면서 현실을 모사하죠. (…) 우리 유대인들은 본래 화가가 아니에요. 우리는 사물을 정적으로 묘사할 수 없어요. 우리는 사물을 언제나 흐르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상태에서, 변화로 보죠. 우리는 이야기꾼이에요.(<카프카와의 대화>)

카프카 문학의 몽환적(비리얼리즘적) 스타일은 존재의 본질을 고정된 형태(표상)에서 찾는 게 아니라 흐름과 운동, 관계와 감성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관념론의 대부인 플라톤이 사물의 원형(idea)을 찾아 동굴 바깥으로 올라간 것과 달리 카프카는 땅굴 속으로, 표상의 심층, 토대 아래로 내려간다. 플라톤의 말처럼 땅굴 속에서 사물은 불분명하고 몽환적으로 표상된다. 하지만 모방의 정확성(합리성)과 의도의 명료성이 감소하는 그만큼 감성(욕망)의 강렬도와 운동(관계)의 구체성은 증가한다. 유물론자는 지상에 보이는 ‘형상’을 쫒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지표면 아래 잠재한 운동과 욕망(감성)의 소리를 듣는 자이다. ‘형상을 빚지 마라’. ‘신의 소리를 들어라’ 라는 유대교의 금언을 카프카는 유물론적으로 번역했으며, 그의 “슬그머니 달아나는” 스타일은 이런 유대-유물론에서 발로한 것이다.

추방의 토포스와 함께 카프카 문학의 유대교적 스타일을 이루는 건 메시아주의이다. 유대교의 메시아주의는 지상의 법을 종식시키면서 도래한다. 유대인은 항상 제국의 법에 의해 핍박받고 추방되어 왔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는 제국의 법을 파괴하면서 온다. 단적으로,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법 파괴자’다. 카프카는 이점에서 철저한 유대인이다. 그는 메시아가 새로운 제국, 새로운 법의 주권자가 될 가능성에 항상 불안해했으며 영원히 법 파괴자로서 도래하는 메시아의 형상을 포착하려 발버둥쳤다.

법 파괴자로서의 메시아는 야만인(유목민)의 형상과 결부되어 있다. <낡은 쪽지>에서 황제의 성을 점령한 “북방의 유목민들”은 “지나칠 정도로 청결하게 유지되는 이 조용한 광장을 하나의 진짜 마구간으로 만들고” 모든 상점을 약탈했다. 그들은 카프카 말대로 “세계를 황폐화시켰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북방의 유목민들은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말로 협박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육체와 형상을 가진 외부 침략자가 아니라 백성들 내부의 “작은 동물들”, 세균들, 분자들, 혹은 “소리들”일지도 모른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며 형상을 벗어버린 인디언들처럼.

진짜 인디언이라면,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땅 위에서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마침내는 박차도 없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마침내는 고삐 없는 말고삐를 내던질 때까지,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뿐일 때까지, 벌써 말 목덜미도 말머리도 없이.(<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

또 이상한 점이 있다. 유목민의 침입으로 황제의 궁궐을 지키는 보초병도 사라지고 궁궐문도 닫혀져 있지만 사람들은 아직 황제의 메시지가 담긴 ‘낡은 쪽지’를 기다린다. 통치하지 않고서도 존재하는 황제, 아무 의미도 없지만 유효한 법질서, 메시아는 이런 조건에서 도래한다. 카프카에게 법은 원래 이렇다. 아무 의미도 없이 유효하며, 내버려 두면서 포획한다. 법 바깥에 던져져 있지만 여전히 법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 법은 그런 자들로 인해, 혹은 그런 자들 속에 존속한다.

그때 메시아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그들이 기다리는 ‘낡은 쪽지’, <낡은 쪽지>에서는 나오지 않고 <황제의 칙명>에 나오는 쪽지, ‘죽어가는’ 황제의 전언이 담긴 쪽지, 즉 ‘황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에 온다. 황제는 죽었다. 신은 죽었다. 이 황폐한 사막에서 우리를 빼내 줄 신은 없다. 그 부재의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사막은 구원의 땅이 되고, 황폐함은 풍요로운 생성의 터전이 된다. 카프카에게 유대교의 신은 영원한 사막의 신, 유목민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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