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공감 능력을 키우자. – 2. 공감 불능의 통합적인 치료법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홍아야, 앞에서 사이코패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의 심리와 행동 특성,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와 그래서 이런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들의 치료 방법을 살펴보자. 이들의 치료방법은 정신의학적인 방법과 다른 하나는 사회심리학적인 방법으로 나눠지더라. 정신의학적인 쪽은 주로 전두엽을 활성화시키는 약물치료를 많이 하고 사회심리학 쪽에서는 대인관계에서 공감 경험으로 능력을 향상시키는 치료 방법을 많이 쓰더라.

정신의학 쪽에서는 세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약을 많이 쓴다더라. 세라토닌은 감정을 조절하여 평온하게 하고 행복감과 창조적인 집중능력을 높여주는 호르몬이라서 행복물질, 공부물질, 조절물질이라고 불린대. 이런 세라토닌이 부족하게 되면 충동성이 커지고 우울함이 많아져 우울증, 자살, 중독, 수면 부족, 만성 피로감, 식욕조절 못함, 따위 증상이 생긴대. 그래서 의사들이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인 우울에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약을, 감정 조절을 못해서오는 절대적인 우울이나 공격성에는 세라토닌을 분비시키는 약을 처방한대.

그런데 왜 세라토닌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을까. 세라토닌 생산 유전자가 활발하게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래. 그럼 왜 세라토닌 생산 유전자가 활발하지 못하냐고? 두 가지 원인이 있대. 하나는 전두엽 이상이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아이가 머리를 부딪치거나, 출산할 때 아이의 두뇌가 손상되거나, 임신 기간 중에는 음주나 흡연, 마약복용 등으로 태아의 전두엽에 이상이 생긴 거래. 다른 하나는 세라토닌을 쓰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져서 생산하지 않게 되었대. 왜 쓰지 않았느냐고? 경쟁 과열로 공격적인 삶을 살아야 하니까 늘 만성 스트레스가 쌓여서 불안하고 우울하니까 마음을 진정시키는 세라토닌보다는 공격적이고 흥분시키는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만 필요했어. 그러다가 아예 세라토닌 생산 유전자가 제 일을 잊거나 제 기능을 잃어버린 거지. 아마 생산 기능이 아주 사라졌다기보다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필요한 때가 되어도 필요한 만큼 생산하지 못하는 걸 거야.

전두엽에 세라토닌이 부족하게 되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병적인 증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이코패스이며 의사들은 약물 치료와 함께 운동이나 수면 또는 명상, 일광욕 따위를 권한단다. 그러나 약물 치료 방법들이나 여러 가지 권유가 일시적으로 증상을 덜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방법들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구나. 그래서 앞서 얘기 했던 대로 우울한 생활이 지속되면 세라토닌 생산 유전자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근본적인 치료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야. 그렇다면 거꾸로 세라토닌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왕성하게 분비되는가를 찾는 것이 정답을 찾는 것이잖니. 세라토닌이 행복감을 갖게 하는 물질이라서 행복물질이라 불린다니까 공감과 관계된 행복감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생기겠니.

바로 공감을 얻을 때야. 친밀한 사람이 공감해 주면 부정적인 감정인 슬픔은 반절로 줄어들고 긍정적인 감정은 두 배로 는다더라.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대변하는 의견과 감정을 존중하는 거야. 누구에게 공감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존중받는다는 것이고 결국은 사랑받는다는 거지. 바로 이 때 세라토닌이 분비되어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행복하게 만들어 준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세라토닌이 분비되어 더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돈보다도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감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 것이 세라토닌을 분출하게 한다면 그러한 경험들이 계속될 때 세라토닌의 생산기능이 차츰 되살아날 거야. 그러려면 긍정적인 삶의 형태로 바꾸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와 공감을 주고받는 경험이 계속되어야 세라토닌 생산기능과 공감 능력을 동시에 되살릴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나는 홍아가 몇 십억 원짜리 수표보다 홍아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을 선택하여 홍아가 세라토닌이 넘치고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기를 바란단다.

어떤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랑이라면 홍아는 자신의 감정과 언행에 공감해주는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가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여 그를 행복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랑이 세라토닌의 생산기능을 활성화시키고 공감능력을 기르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사랑이 공감을 통해서만 나타나며 공감에는 세라토닌이 필요하고 행복해지려면 사랑을 주고 받아야한다면 세라토닌과 공감과 사랑과 행복은 하나의 상황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른 이름들일거야.

그러니까 공감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또 거꾸로 사랑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지. 세 살인 홍아의 새로운 말이나 행동을 엄마가 기뻐한다는 것을 알기에 뭔가 새로운 말과 행동을 해보려고 애쓰며 자랑스럽게 엄마를 바라본다. 그리고 엄마가 홍아의 기대대로 놀라고 기뻐하면 스스로 대견해 한다. 이것이 공감 나누기이고 엄마와 아이 사이의 유대감이며 사랑의 애착 관계이고 바로 이 행복한 사랑의 공감이 세라토닌 생산능력을 기르는 거야. 홍아야, 엄마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행복해 보였어. 옥수수를 좋아했는데 그걸 먹을 때는 행복해 보였어.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에게는 세라토닌이 언제나 넘치는 듯이 보였단다. 홍아야, 엄마에게 세라토닌을 분출시켜서 행복하게 되는 비결을 배우렴. 아니 그 엄마의 그 딸이니까 홍아도 마음을 다스려 언제나 세라토닌이 넘치고 행복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거야.

홍아야, 행복해지는 데에 어린 시절의 행복 경험이 매우 중요하대. 3~6세인 유치원 시절의 전두엽이 일생 중에서 가장 빠르게 발달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단순 반복적인 지식교육보다 공감에서 오는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 정서와 도덕성을 기르는 데에 아주 중요하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이 새삼스러워지는구나. 가족 특히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엄마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보호하고 지지한다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끼는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야. 그러면 엄마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고 엄마를 즐겁게 하고 싶어 자신의 감정을 조절 하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거야. 사랑받으면 사랑하는 것으로 공감이 나타난다는 거야.

그런데 하버지는 이미 알려진 얘기 말고 하버지 얘긴 없으면서 왜 사이코패스 얘길 꺼낸 거냐고? 홍아야, 나도 할 말이 있단다. 분과 학문의 한계를 넘어서서 종합적인 원인과 치료방법을 찾고 싶어서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얘기를 바탕으로 우리가 어떻게 공감능력을 길러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 찾아보자는 거지.

먼저 사이코패스가 생기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말대로 반드시 선천적인 원인이 때문이냐는 것이다. 보통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등한 특징이 나타나면 정신과 의사들은 유전자 결함을 지목한단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가 다양해지기는 했지만 열등한 유전자는 끝없이 걸러져서 본래의 유전자는 건강했었다는 것이 인간의 유전병에 대한 나의 전제란다. 많은 경우 유전자의 결함이 아니라 다양성의 일부이며, 또 많은 경우 태아시절에 엄마에게 미친 환경오염이나 약물 중독, 기아, 질병, 스트레스 따위가 태아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출산 이후라도 어린 시절에 받은 충격이 컸거나 나쁜 영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단다.

그렇다고 유전자 결함을 아주 배제하는 것은 아니란다. 요즘 비만이 문제되지만 유전자의 지방 축적 효율이 좋다는 것이 다양성의 일부이지 결함은 아니며, 비만의 유전적인 원인이 환경적인 원인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단다. 먹고 살기 힘든 옛날에는 에너지 비축 효율이 좋은 이들이 훨씬 아름답게 보였고 힘든 일도 잘 했으며 건강하게 살았단다. 사장님이란 말이 오늘날 회장님 정도로 돈 많이 번 사람을 높여 부르던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배좀 나오면 사장님이라고 부러워했고 부잣집 맏며느리 감으로는 살집이 두툼해야 한다고 했단다. 그러나 인류의 진화적인 경험으로는 오늘날처럼 먹을 것이 넘치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었어. 비만의 주범은 인간의 유전자가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바뀐 환경변화야. 옛날에는 에너지 효율이 높아 우등하다고 믿었던 유전자를 오늘날에 갑자기 열등한 것으로 몰아가서는 안 되며, 이는 유전자의 다양성을 결함이라고 문제 삼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하버지는 생각하고 있어.

내가 지금 문제 삼는 것은 정신질환에서 선천적인 유전자 결함을 문제 삼는 주장의 대부분이 사실은 결함이라기보다는 다양성의 하나였으며, 대부분 후천적인 원인 때문에 병적인 현상으로까지 발현되는 것이지 결코 유전자 결정설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거야. 사이코패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신질환을 정신의학은 생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유전자 결정설에 기대어 이를 선천성이라 진단하면 치료 방법도 생리적인 방법으로 증상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키는 약물치료에 주력하게 되어 있어.

그러나 사회 환경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며 후천성을 강조하는 사회심리학은 사이코패스가 되게 만드는 생리적인 작동 과정과 약물 효과를 잘 몰라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럼에도 환경적이고 후천적인 요인이 보다 결정적이라고 내가 강조하는 이유는 실제로 이렇게 볼 때 정신의학의 분과 학문적 한계인 임상적이고 일시적인 치료방법을 넘어서서 통합적인 치료 방법을 찾을 수가 있고, 치료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하버지가 찾은 통합적인 방법은 심리나 정서, 행동의 장애의 원인을 생리적인 분야와 환경적인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찾고 이에 맞는 약물 치료로 증상을 완화시키면서 동시에 정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공감 경험을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문제는 공감경험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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