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가을소풍

- 박정수(수유너머R)

주말에 가족들과 부산에 가을소풍을 갔다왔습니다. 원래는 저 혼자 한 연구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었는데 내친 김에 부산 영화제도 둘러보고, 김진숙 지도위원도 만날 겸 아내(황진미)와 매이까지 데리고 가족 나들이로 다녀왔습니다. 초대받은 연구모임은 ‘공간주권’ 포럼이라고, 삶의 주체들을 소외시키는 공간의 배치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부산 지역 연구자들의 모임입니다. 법학, 정치학, 여성학, 공공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재개발문제에서부터 일상공간의 젠더화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를 파괴하는 공간형성의 실상을 해부하고 해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배움의 열의와 실천적 고민에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부산지역 젊은이들이 서울에 와서 서울말 배우느라 애쓰는 코미디가 있는데 실상은 어떠냐고 여쭸더니 부산의 제조업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간다고, 창원이나 구미 같은 산업도시로도 많이 간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제조업이 빠져나간 자리에 호화롭게 들어선 해운대 센텀지구나 수영만의 초고층 빌딩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광안리 앞 바다를 가로지르는 휘황찬란 ‘상들리에’ 대교나 세계 최대라는 신세계 백화점, 공사대금만 1천 7백억 들인 세계 최대 영화제전용관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거품처럼 솟은 건축물들이 주인없는 비석이 되는 환영을 잠깐 보았습니다.

영화는 안 보고 영화제만 봤습니다. 내용물과 안 어울리게 포장지만 화려하다는 느낌입니다. 저래서야 영화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감상할 수나 있겠나 싶게 자본의 포장지가 두껍습니다. 영화는 없고 영화제의 스펙타클만 있는 씁쓸함 속에서 기적같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85호 크레인에서 277일째 농성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지하는 영화 감독, 스텝, 평론가, 사진작가 들이 부산영화제를 구원했습니다. 세상의 온갖 고민을 담은 영화 전시장이 세상의 고민을 응축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을 덮어버리는 휘장이 되지 않게 김진숙 지지선언을 하고 지지방문을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영화’를 보기 위해 85호 크레인으로 향했습니다. 진미씨가 영화평론가라 매이와 함께 영화인들을 실은 소형 버스에 탔습니다. 역시 봉래삼거리에서 막혔습니다. 세상에! 그 잘난 ‘자유민주주의’의 경찰들은 우리가 어디로, 어떤 의도로 갈지 모르면서 ‘이동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저는 영화인들 무리에서 나와 평범한 가족의 모양새로 버스를 타고 85호 타워크레인이 마주 보이는 정류장에 내렸습니다. 수십대의 경찰버스와 수백의 경찰들로 봉쇄된 암흑의 공장에 85호 타워크레인의 불빛이 고독해 보였습니다. 등대같은 불빛 속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초조한 듯 좁은 공간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쩌면 내려올 근육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도 같습니다. 센텀시티 ‘영화의 전당’과 수영만의 초고층 빌딩들은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데 영도의 85호 타워크레인은 육중히 지상을 동경하는 모습입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희망버스 사람들을 만나러 부산역으로 갔습니다. 부산역 광장은 군복을 입고 머리에는 “전쟁불사”라 쓴 머리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든 극우파 노인들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희망버스 사람들을 색출하려는 눈빛에는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희망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남포동으로 갔고 부산역에는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노래소리만 가득했습니다. 부산이라는 공간은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로 뒤섞여 어지러웠습니다.

이번 <위클리 수유너머>의 특집은 ‘카프카’입니다. 루쉰, 맑스, 벤야민에 이어 ‘시대를 거스르는 사상가’ 제4탄입니다. “메시아는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도래한다. 최후의 날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래하는 날이 최후의 날이다.” 카프카가 노트에 적었다고 하는 문장인데요. 때(시대)에 맞지 않는 도래, 도래로서 한 시대를 닫아버리는 그런 도래, 현기증 속에서 그런 희망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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