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소금장수 김두원, 집념의 방식

- 권보드래

“소금장수 김두원이라 하면 지금 삼십세 가량만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알 만한 유명한 소금장수이다.” 1920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서두를 연 솜씨로 보면, 당시로선 김두원이 거의 대중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해방 후에도 소문이 끊이진 않았고 근래 재발견되기도 해서, 고은의 『만인보』에도 「소금장수 김두원」편이 있고 희곡도 진작 한 편 나와 있다는 정황이다. 그렇다곤 해도 1900년대 당시 “누구든지 알 만”큰 유명했던 데는 비할 수 없다. 『황성신문』을 참조하면 해마다 관련기사가 근 10종에 이를 만큼 ‘소금장수 김두원’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모양이니 말이다.

발단은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개항한 지 20년, 김두원은 인천·부산과 더불어 애초 개항장 중 하나였던 원산 출신 상인이었다. 지금은 ‘국경선’ 너머의 땅이지만 근대 이전부터 상업의 중심지였고 명태의 집산지로 특히 유명했던 원산. 개성상인 못잖게 원산상인도 명성을 떨쳤던 모양인데, 김두원은 그 중에서도 진작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출처는 확실치 않지만 짝사랑하던 기생에게 박대당한 후 절치부심해 거액을 모았다고도 하고, ‘십년지한불부단명(十年之限不富斷命)’, 10년 안에 부자가 되지 않으면 죽고 말겠다는 살벌한 문자를 붙여놓고 돈벌이에만 골몰했다고도 한다. 구전(口傳)되는 내용으로 짐작컨대는 집념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경상도 해안가에서 소금을 사 들여 관북 지방에서 되파는 방법으로 돈을 모았던 것 같은데, 승승장구하던 그가 덜컥, 일본인 상인의 사기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기무라(木村)이라는 성을 가진 형제였다고 한다(이름에 대한 기록은 엇갈린다). 김두원이 사들여 쌓아둔 1천 88통의 소금을 한꺼번에 매수하겠다고 한 후, 울릉도까지 유인해 놓고 밤사이 소금 배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기록대로라면 “엽 2만5천990여냥”, 원화로는 “5천1백90원 90전”이었다고 하는데, 엄청난 돈이었으나 이미 거상 대접을 받던 김두원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잖았을까 싶다. 하여튼 ‘소금장수 김두원’이란 이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다. 김두원은 사기당한 사실을 외부(外部)에 호소했고 외부에선 다시 일본 공사에 문의했지만, 기무라 형제를 처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소금값을 받진 못했다. 은닉한 재산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측의 답신이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아울러 약간의 위로금을 지급할 것을 제안하지만 김두원은 단연 거부한다. 백만금이라도 ‘구휼금’은 싫다, 소금 대금을 받고 싶을 뿐이라고 고집하면서 말이다. 이때부터 장장 20여 년에 걸친 김두원의 ‘명원(鳴願)’의 나날이 시작된다.

방법은 갖가지였다. ‘명원서’라 이름 붙인 편지를 일본 총리대신이며 중의원, 일본 공사 등에게 보내는 방략을 가장 애용했지만 직접 항의방문을 하기도 하고 외부대신이며 일본 공사가 지나는 길목을 지키기도 했다. 1903년에는 인력거를 타고 귀가하던 일본 공사 하야시 앞에 뛰어나와 ‘대성질호(大聲叱呼)’하는 서슬에 하야시가 놀라 인력거에서 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논리도 정연했다. 명원서에도 썼다는 유명한 구절인데, 일찍이 홍주군 장고도에서 일본 상선이 바위에 부딪혀 파선했을 때, 바위의 주인은 한국정부라 하여 배상금을 받아냈던 사례와 비교하면서, 기무라 형제의 사기도 마땅히 일본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배상금을 받기는커녕 체포되어 근 한 달간 옥살이를 했지만 김두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돼도, 시간이 지나도, 쉰줄에 접어든 ‘원산 거상’ 김두원은 결코 집념을 저버리지 않는다.

서한을 보내고 신문사를 찾아가고 “도로에서 사설”하면서 보낸 이 몇 해를 통해 김두원은 일약 유명해졌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일본(인)에 수탈당하고 차별당하고 있던 시절, 도무지 꺾일 줄 모르는 김두원의 끈기는 동정과 분노와 카타르시스의 염(念)을 동시에 일으키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위로금 제안이 반복되었지만 김두원은 시종일관 정당한 판매대가를 지급해 줄 것을 고집했고, 가산을 탕진하고 식솔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 사이 나라가 사라지고 일본제국의 위세는 더욱 등등해졌는데도 말이다. 김두원이 마지막으로 언론에 모습을 비친 것은 앞에서 든 『동아일보』 창간 초기의 지면. 71세의 노인이 된 김두원이 스스로 찾아와 그 사이 내력을 호소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에 명원서를 보내기를 그치지 않아 새로 총리대신이 된 하라 타다시에게 보낸 횟수만도 20여 차례였다고 하니, 1910년대를 통해서도 김두원의 생애는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호소하고, 주장하고, 무시당하고 때로 체포당하고. 김두원은 이때도 “소금값에 별리와 제반 손해를 합하여 곱절만 달라는” 요구를 계속한다. 이미 20여 년에 이른 싸움이라, “돈을 받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는 김두원의 말이 수사로 들리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렇게 끝났다. ‘소금장수 김두원’은 유명해졌다. 1920년 갓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공채를 모집하면서 김두원의 사례를 들어 ‘나라 없는 부’의 덧없음을 설득했을 정도다. 논거도 김두원 자신이 찾아냈던 바로 그것이었다. 국권이 당당한 일본 정부의 상선은 당찮은 배상금도 받아낼 수 있었지만 소금장수 김두원은 백주에 빼앗긴 돈을 한 푼도 되돌려 받지 못하지 않았느냐면서. 그러나 김두원 자신이 상인으로서 마땅한 몫을 받아내겠다는 비원(悲願)—비원,이다—을 이루진 못했다. 어디서 어떻게 수명을 다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 반일의 심정이 작용했을 것이나 김두원의 20여 년 고집을 지탱한 것은 민족 정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공의 주춧돌이었을 집념은 1899년 이후 그를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아내겠다는 한 가지 목표에 몰두하게 했고, 이 외곬수의 집념은 세월에 따라 통로가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했다. 저마다의 기질과 내력에 따라 가지게 된 외곬의 길이 평생 세상과 만나기야 어디 쉬우랴. 김두원은 상인으로서 성공했었고, 1900년대에는 국가-사회의 화제가 되었고, 이후에는 잊혀졌다. 길은 다른 길과 만났다가, 가끔은 여러 갈래 길과 합쳐졌다가, 또 갈라지기 마련. 그래도 김두원이 마지막 나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달리 어쩔 수 없었노라, 였을까.

응답 1개

  1. 말하길

    마흔이나 먹었는데도 사실 김두원이란 인물은 몰랐어요. 하지만 정말 재밌고 대단한 인물이네요. 루신의 잡문(노라는….)에 보면 청 말의 짐꾼 ‘청피’들은 그 고집과 집념이 대단해서, 짐이 가벼워도 2원을 내라하고, 가까워도 2원이라 하고, 심지어 안 맡기겠다고 해도 2원을 내라 했다고 하네요. 루신이 그 집념에 탄복했는데, 김두원이란 사람을 알았다면 그 사람을 예로 들었을 듯….재밌는 글 잘 읽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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