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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칼럼

반년 후의 마을이, 40년 지속된 마을에게~

- 신지영

마을만들기 파트2-7
반년 후의 마을이, 40년 지속된 마을에게~
-3월 11일 이후 반년이 흐른 시점에-

# local: 전기 콘센트 저 너머의 삶

우연이었지만, 최근 ‘지방’을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도쿄에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큐슈를 거쳐 도쿄로 돌아오는 여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방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불과 며칠 동안 외부사람으로서 살짝 엿본 경험일지라도. 겪은 것은 구체적이며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 버린다.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중심과 주변의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운동이 무의미하게 귀결되었던 경험이 반복될 경우, 평범한 폐쇄성은 일종의 전통적 외장을 취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절박한 전통에 대한 튼튼한 믿음과, 믿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지방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이 흔하고 절박한 전통은 지방 토박이와 외부자 모두에게 울분을 품게 한다. 지방 토박이의 울분은 외부에 대한 것이고 외부자의 울분은 지방 내부를 대한 것이지만, 그 둘 모두 상대방의 구체적인 내면을 향해 발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이질적인 상대방의 내면을 향해 있는 만큼 우리들의 울분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말할 수 없다.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도쿄나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동할 때, 그 구체적인 무엇이 감각을 육박해 온다. 서울과 지방 사이, 도쿄와 동북지방 사이, 그리고 어쩌면 도쿄와 미국 사이. 또 어떠한 중심과 주변사이의 말하기 어려운 구체적인 온도차 속에서, ‘지방을 둘러싼 토박이와 외부자들의 울분’을 생각하면서, 10월을 맞이했다.

3월 11일에 일어난 쓰나미 지진 원전 사고 이후 반년이 지났다. 일본의 언론은 9월에 접어 들면서 부쩍 3.11을 9.11과 비교했다. 이 비교급 담론은 마치 3.11을 9.11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듯이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때 동등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패해지의 삶이나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이라는 중심과 미국이라는 중심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고, 그 때문에 구체적인 무언인가는 망각된다. 이 망각과 ‘지방’이라는 경험이 겹쳐지면서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어떤 블로거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도쿄 한 구석에 사는 나는 과연 전기 콘센트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전기 콘센트 저 너머, 즉 전기를 보내주는 지방의 삶을 느끼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대답하기 어렵다. 이 대답하기 어려움은 도쿄에 사는 모든 토박이, 외부자, 떠돌이의 명확한 한계이자 느슨한 잠재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 9.11: 人工의 꽃, 데모대 제군! 걸어라.

9월 19일, 깃발의 물결

9월 19일, 깃발의 물결

도쿄에서는 9월 내내 이름 모를 다양한 집회가 열렸다. 그 중에서도 9월 11일에 <가난뱅이들의 반란>이 주도가 되어 연 집회와 19일에 6만명 이상이 모인 집회는 단연 눈에 띤다. 그러나 11일의 집회와 19일의 집회가 지닌 분위기는 판이했다. 9.11 신주쿠 원자력 발전을 멈춰라 데모(9・11 新宿・原発やめろデモ)는 <가난뱅이들의 반란>팀이 3월 11이 이후 매달 개최해 왔던 것으로 젊은이들의 집회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날의 탄압은 노골적이었다. 원래 신주쿠 아루타 앞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집회는, 시작 직전에 경찰에 의해 중앙공원으로 장소가 변경되었다. 이유는 “공공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였다. 아루타 앞 보다 중앙공원이 불편함은 명백했다. 장소가 변경된 줄 모르고 아루타 앞으로 갔던 나는, 나처럼 길을 헤매는 사람들과 함께 중앙공원으로 삼십분 이상을 걸어갔다. 언젠가부터 신주쿠 아루타 앞에는 투명 벽이 설치되어 모이는 것을 방해했다. 그 투명벽에는 달력에 나올 법한 꽃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벽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에는 흰색이었는데 누군가 낙서를 하자 낙서가 보이지 않도록 벽을 투명하게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소리 없이 찾아들어 모임을 해체시키는 투명한 벽, 그것은 일본 경찰 권력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날 집회에서는 12명이 체포당했다.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한국은 체포도 많은 편이고 하루 이틀 만에 쉽게 풀려나지만, 일본은 한번 체포당하면 석방이 쉽지 않다. 요미우리 신문은 “탈원전 데모 12명 체포, 기동대원 폭행 등으로”라는 제목을 뽑았지만 이건 거짓말이다. 이날은 출발 직전부터 사운드 데모를 위해 음악 셋트를 올리는 사람들 사이로 경찰이 끼어들었다. 일본에서는 교통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집회 대열을 50명~100명 단위로 끊어서 행진하게 하는데 나로서는 이 점이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경찰이 무리를 훨씬 작은 단위로 끊어서 행진시켰기 때문에 놓아서 대열이 자주 멈추고 흐름을 형성할 수 없었다. 경찰이 “빨리 가”라고 소리를 치거나 몸으로 부딪쳐 도발하거나 행진하는 무리에 도중에 합류하는 행위를 막기도 했다. 결국 체포에 대비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잡혔다.(http://www.youtube.com/watch?v=xnruDaMxPO0 http://www.youtube.com/watch?v=RKmMUJUpo5U / http://www.youtube.com/watch?v=D58H9LEZFV8&feature=related)) 나는 사람이 잡혀가는데 왜 모두 달려들어 막지 않는가, 왜 이렇게까지 교통질서를 착실하게 지키며 행진하는가 등이 다소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저항이 쉽지 않은 것은 일본 경찰이 매우 교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경찰은 경찰복을 입은 상태로 대열 속으로 조용히 끼어들어 경찰들 사이의 대열을 형성하곤 목표물을 확실히 체포한다. 경찰복을 입고 있어도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권력이다.

9월 19일, 후쿠시마 출신자의 메시지

9월 19일, 후쿠시마 출신자의 메시지

이런 무리한 진압은 19일의 대규모 데모에 대한 경고성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기에 얕잡아 본 점도 있었다. 경찰은 데모에서도 나이를 따지는 예의바른 족속들인가보다. 경찰들이 훌륭히 알아챈 것처럼 <가난뱅이들의 반란>집회가 지닌 힘은 가난한 청년층에 있다. 행진하면서 한국의 청년빈곤이나 실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생기넘치는 활동가들이 많이 참여한다. 이번 대규모 체포는 경찰들이 이 혈기왕성한 프레카리아트들의 범람하는 연대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뉴욕의 월가 집회는 이곳 탈원전 가난뱅이들의 반란과 이어진다.

11일 인기를 끈 랩은 이렇게 외친다. “데모대 제군! 너희들은 거리의 꽃이다! 번개처럼 가로지르며 피는 식물이다! 순간처럼 거리에 흔적을 남기는 자들이다! 풀을 얽고, 차를 멈추고, 들판을 무성하게 하는 자들이다! / 데모대 제군! 자네들은 人工의 꽃이다! 건설적인 인간이다!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인류의 역사를 새기자! 바람에 흔들려, 일곱 색으로 부풀어 올라,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중략- 원자로를 폐기하라 폐기하라! 원자로를 폐기하라! 폐기하라! 원자로를 폐기한 뒤 꽃으로 뒤덮자!(いとうせいこう×DUB MASTER X http://www.youtube.com/watch?v=46O2Mg4bzVE)” 이 젊은 인공의 꽃들은 동북지방이나 피해지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꽃들이 나이가 들었을 때, 뜨거웠던 2011년의 가을은, 새로운 거리의 꽃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을까?

# 9.19: 결코 소박할 수 없는 ‘local’, 40년 간의 울분.

9월 19일에 만난 미야시타 공원 사람들

9월 19일에 만난 미야시타 공원 사람들

19일에 열린 <모여라 5만인! 안녕 원전 1000만인 액션-탈원전, 지속 가능한 평화로운 사회를 향하여(さようなら原発、1000万人アクションー脱原発・持続可能で平和な社会をめざして)>는 다양한 측면에서 기록될 만했다. 6만명이 집회에 참여한 것은 3~40년 만이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입장들의 사람들이 한데 섞였다. 엄청난 양의 깃발과 <밤을 걸고>의 배우 야마모토 타로를 보았다. 미야시타 공원 나이키화 반대활동 등 다양한 운동이 19일 거대 데모 속에서 각각 목소리를 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소련의 수소폭탄 실험에 대한 찬반차이로 갈라졌던 공산당과 사회당이 함께 집회를 하게 된 것도 몇 십 년 만이라고 한다.

19일 집회를 전후해서 다양한 집회와 이벤트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18일에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대표들이 <총평회관>에서 모여 <원전 폐지를 향해서! 전국 교류 집회(原発廃止に向けて!全国交流集会)>를 열었다. 피해지인 후쿠시마(福島) 대표는 190만명이 20만톤에 달하는 오염물 속에서 강제 피폭을 당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팔려나가는 식품에 대한 조사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주민들에 대한 방사선량 측정도 행동반경을 기록한 뒤 그것에 근거해 20만명을 뽑아 샘플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 모두에 대한 건강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야기(宮城) 대표는 오나가와(女川) 원전 사고는 막을 수 있었지만, 그 주변 마을이 전부 사라졌다고 했다. 마을의 부흥을 위해서 원전이 재가동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둘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이바라키(茨城)대표에 이어 니가타(新潟), 하마오카(浜岡), 시마네(島根)원전 대표들이 원전 재가동을 막기 위한 활동을 소개했다. 하마오카 원전은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곳에 있을 뿐 아니라 도회 지진이 예상되던 곳으로, 1800명의 서명으로 원자로 폐쇄에 성공했다. 그런데 재가동을 막기 위한 여러 지역의 활동을 듣던 중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많은 원전이 멈추어 있어도 전기 공급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전은 이대로 없어도 좋지 않을까?

원전 건설지로 예정되어 있는 가미노세키(上関)와 아마쿠사(天草) 대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보고했다. 아마쿠사의 경우 가난한 마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원전유치뿐이라는 논리가 있었지만 3.11 이후 분위기가 변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아시하마(芦浜), 쿠마노(熊野), 마키(巻) 등 원전 유치를 막은 마을에 대한 소개, 핵연료 사이클로 이용되고 있는 아오모리(青森)와 오카야마(岡山)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전 재가동, 원전 유치, 핵연료 사이클을 막는 데 성공한 곳은 지역 주민들의 의지가 강하고, 지역주민과 노동단체의 원활한 네크워크가 있던 곳이었다. 마을의 운명은 결국 그 마을사람들에게 달려 있었다. 아사쿠사의 예가 보여주듯이 마을 사람들이 원전 유치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마을을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골이나 지방은 이러한 이유로 도시보다 더욱 더 자본주의와 개발주의에 노출되기 쉽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학교도 병원도 변변이 없는 지방의 울분을 개발주의와 자본주의는 이렇게 쉽게 이용한다. 그러나 원전 사고는 개발주의적인 마을 살리기가 실질적으로는 마을을 죽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9월 19일에 만난 배우 야마모토 타로- 밤을 걸고-

9월 19일에 만난 배우 야마모토 타로- 밤을 걸고-

이날 총평회관에 모인 각지에서 온 대표들은 30년~40년간 반원전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3.11 이후에 반원전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원전 재가동이나 신설을 막는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분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노력해 왔음에도 3.11의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 분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막지 못한다면 과연 얼마나 더 큰 사고가 닥쳐와야 원전을 막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두렵다고도 했다. 3~40년 동안 지방 각지에서 반원전 운동을 해오면서, 이 운동이 누군가의 죽음 없이는 진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장 아프게 경험한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들은 지방의 깊은 심연을 통해서, 도시의 그 어떤 비평가보다도 더 날카로운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다. 원전이나 개발은 마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인다는 것을.

이 모임에 참여한 이후, 6만이나 모인 것은 40년만이다, 공산당과 사회당이 함께 한 것도 40년 만이라는 말들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다시 말해 40년 전에는 6만이나 모인 반원전 데모가 있었고 공산당과 사회당이 함께 했으며, 그들이 지금까지도 운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내 사촌동생 련이가 울 언니가 사주는 맛난 것들을 쏙쏙 받아먹고 볼이 동그스름해지듯이, 이들이 지닌 40년 운동경험을 9월 11일의 <가난뱅이들의 반란>이, 원전 유치를 거부하는 지방이, 쏙쏙 받아들여 풍성해지는 그러한 역사를 만들 수는 없을까? 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 없이. 방사능을 피해 큐슈 사가현으로 두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이주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평생 살고 싶어요. 이 작은 아이가 사가현 사투리를 쓸 때가 오면 그때에는 모든 원전이 다 사라지면 좋겠어요”.

# 메구미와 유코, 그리고 메구미의 아들과 만난 날.

한 블로그에 따르면 지난 5개월 간 큰 집회가 20번 있었다고 한다. 가난뱅이들의 반란이 5회, 트위터 데모가 4회, 야채 데모가 2회, 이와키시에서 2회, 후쿠시마에서 1회, 도쿄전력 앞에서 1회, 세다가야 1회, 타치가와 1회였다. 여기에 9월에 열린 집회를 합산하면 일주일에 최소 1회 이상의 대규모 집회가 열린 셈이다. 반원전 탈원전 분위기와 활동을 어떻게 하면 지속시킬 수 있을까? 활동의 즐거움은 중요하다. 또한 그 즐거움은 각자의 삶 전체와 잘 결합되어야 오래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규모 집회와 소규모의 집회가 동시에 일어나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탈원전 반원전이라는 슬로건이 각각이 처한 조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가 모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9월 19일의 모습1

9월 19일의 모습1

재해시에 가장 피난이 어려운 것은 장애인, 아이들, 노인, 동물들이다. 9월 15일 2시에는 IPACS(어리인들의 안전을 위한 전국적 부모의 회)가 주최한 <칠드런 프라이드(チルドレン・プライド)>가 열렸다. 장애인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현재 남 소우마시, 이와키시, 코리야마시에서는, 재해시의 피난에 있어서의 개호 시간 초과분에 대해서, 중증 방문 개호의 시간 연장, 개호 급부의 증가등의 조치를 결정해, 장애자의 피난 생활을 보상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개호 증가에 대한 보상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타무라시를 중심으로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피난지에 남겨진 동물들을 찍고 구출하는 활동을 벌이는 사진가 오오타 야스스케(太田康介)의 사진전 <남겨진 동물들- 후쿠시마 제 1원전 20킬로 권내의 기록(のこされた動物たち-福島第一原発20キロ圏内の記録(http://ameblo.jp/uchino-toramaru)이 열린다. 피난의 권리 블로그에는 다양한 서명서들이 등장하고 있다. (http://hinan-kenri.cocolog-nifty.com/blog/2011/10/post-6036.html 자신의 신체적 조건 속에서, 자신이 아끼고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통해서 발언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이러한 접속은 탈원전 반원전 운동을 다양화하고, 지속적인 삶의 활동으로 변화시킬 힘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들의 움직임이다. <원전을 반대하는 후쿠시마의 여성들(原発いらない福島の女たちhttp://onna100nin.seesaa.net/article/228900129.html)>은 경제산업성 앞 농성을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경제산업성 앞 농성장에서는 나베파티가 열렸다. 이 농성은 <9조 개헌 저지의 회(htt//9jiyo.asia/)>가 주축이 되어서 하고 있지만, 246표현자회의의 요시다라는 분이 노상 나베파티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메구미와 유코 그리고 메구미의 건강한 5살짜리 아들을 만났다. 직장 동료라는 메구미와 유코와 나는 야채는 어떻게 사서 먹고 있는지, 물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집회에서 잡히면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하는지 등의 정보를 교환했다. 통신판매로 서쪽 일본의 야채를 사서 먹는다는 메구미는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서쪽 사람들이 먹을 야채는 어쩌나 싶기도 하고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있으니까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다. 농성장 한쪽에는 후쿠시마로 야채를 보내준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후쿠시마 아이들이 그린 그림일기가 걸려 있었다. 그녀들이 싸 온 야채들을 잔뜩 넣은 나베(일종의 찌개)를 간만에 맛나게 먹고 함께 집에 돌아왔다. 농성장에서 나베파티를 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앞으로 주부들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 제공처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지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과 후쿠시마의 아이들을 함께 생각하면서.

# 집회에 참가할 때 잊어버리는 것들.

집회에 다녀온 날은 정보도 얻고, 수다도 떨고, 뭔가 사회적 역할도 한 것 같아서 어쩐지 안심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 나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어떤 현기증을 느낀다. 나 자신의 말이 소란스럽게 느껴지고 전기 콘센트 저 너머의 구체성과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하다. 만약 내가 피해지에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과연 얼마나 강렬하게 탈원전 반원전을 외칠 수 있었을까?

9월 19일의 모습3

9월 19일의 모습3

반년 전에 비해 후쿠시마, 미야기, 이바라키 등의 피해지역 소식은 더욱 듣기 어려워졌고 후쿠시마를 느끼기 위해선 집회에 가야 한다는 모순적인 상황도 있다. 집회에서 만난 후쿠시마 출신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후쿠시마에서 떠날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났어요. 남아 있는 사람들은 떠날 수 없으니까 차라리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해요.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도 있어요. 저는 후쿠시마 출신이지만 도쿄에 살지요. 후쿠시마의 위험을 말할 수 있는 건 저 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후쿠시마의 위험은 명확하지만 해결할 길이 없는 채로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그 위험을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지방의 무서움은 이것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문제지만 그 속에 있을 때는 말할 수 없고, 그곳을 벗어나면 느낄 수 없어지는 것들.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나쁜 것을 두 눈 꼭 감고 묵인해 버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진다. 나는 혹시라도 지금 후쿠시마를 비롯한 피해지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싶어 두렵다. 또한 도쿄에서는 집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치 책임을 다한 양 안심하여, 도쿄의 위험성과 피해지의 구체성을 보려하지 않을까봐 두렵다.

두려움 때문에 정말 보고 정말 말해야 할 것들에 盲目이 되어 버린 지방은, 지방에만 있지 않다. 도쿄 한 가운데에도 이렇게 맹목이 되어버린 지방이 있다. 집 근처 대형 쇼핑몰에 가면 후쿠시마 산 토마토, 이바라키산 야채가 즐비하다. 어느 날인가는 식료품 안에 다음과 같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후쿠시마현 지사 사토(佐藤雄平)가 쓴 글로 <소비자의 여러분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이 글에 따르면 후쿠시마현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후쿠시마와 전국을 연결하는 프로젝트 <후쿠시마 신발매>가 스타트했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여러분에게 본 현에서 나온 농림수산물을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방사능 모니터링 검사를 매일 실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품명이 규제치를 대폭 밑돌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말임을 우린 모두 직감적으로 안다.

최근 일본에서는 지방이나 마을을 말하기 어려운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원자력 무라(原子力村)”라는 말도 있는데 원자력 기술자, 산업, 중력회사, 브랜드메이커, 경찰관청,등의 기관의 관련성을 부르는 말이다. 이 원자력 이른바 “무라(마을)” 속에서는 탈원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러한 결속에서는 스스로의 윤리감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자각이 무뎌져 버린다. 그러나 동시에 마을을 말하기에 좋은 조건들이 형성되고 있기도 하다. 40년의 세월에도 3월 11일의 비극을 막지 못해 ‘분하다!’ 이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고 외치는 활동가 할머니‧할아버지와 주민들과, 순간의 피는 거리의 꽃인 도쿄의 떠돌이․외부자‧젊은이들과, 주부․아이들․장애자․여성, 그리고 이름 없는 그 모든 우주가 함께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마을이 있다. 나는 이 또 하나의 마을이 미래를 말하기 이전에 지금을 말함으로써 과거로부터 바꿔내는 힘이 되길 기대한다. 원전과 관련된 구체적이어서 말하기 힘든 지방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삶의 문제를 언어화해주길 기대한다.

3월 11일 이후 반년이 지났다. 잠시 반년 전을 돌이켜 본다. 문득 1년 전에는 뭘 하고 있었더라…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반원전‧탈원전은 1~2년 사이에 쉽게 이루어지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또 기회만 있다면 원전은 다시 고개를 들 것이 분명하다. 노다 정권은 안전장치만 확보된다면 재가동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년 이맘때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혼을 치고 지나가는 盲目적인 마을의 시간 속에 둔감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마을이 내년 이맘 때쯤 무성하게 피어나,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두려움과 마주하고 있기를. 먼저 가본 반년 후의 마을이, 40년 간 이어져 온 마을에게 보내는 편지가 지금 여기에서 씌어지고 있기를.

응답 1개

  1. 말하길

    ‘번개처럼 가로지르며 피는 거리의 꽃’ 랩 듣고 싶다. 정말 화끈하고, 시적인 가사다. 반전 시위 현장 소식 자세히 알려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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