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한미FTA비준을 눈앞에두고 허세욱을 생각한다

- 이계삼

지난 주말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켠 이들은 심란한 장면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 ‘가카’께옵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야구 모자를 쓰고, 디트로이트의 GM 공장에서 연설하는 장면, “내가 오바마와 함께 약속하건대, 한미 FTA가 여러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운운하며 어설프게 팔을 휘젓는 모습 말이다.

한미 FTA로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의 표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오바마가 가장 원했던 그림이었겠지만, FTA 체결 당사국의 대통령이 와서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다독여주는 저 장면은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모든 준비가 끝났고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래서 나로서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치욕인 것이다.

이제는 진보언론에서도 한미 FTA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사이 이 나라를 갈기갈기 물어뜯을 것 같던 한미 FTA가 온순한 양이 되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5년 전 나는 한미 FTA에 거의 미쳐 있었다. 지역에서 한미 FTA 저지 실천단을 만들어 저녁마다 거리에서 선전전을 했었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다만, 우리의 삶이 완전히 거덜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나의 절실함을 부채질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미 FTA 최종 협상장인 하얏트 호텔 앞에서 분신한 허세욱 열사가 생각난다. 끝내 운명하신 그날, 선전전을 하면서 그가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들고 시내 한복판에서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그 사이 한미 FTA는 달라지기는커녕 더 나빠진 것 같은데, 한미 FTA는 이제 누구도 말을 꺼내기 싫어하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도 그렇고, 한미 FTA도 그렇고, 다들 참여정부가 시작한 일들인데,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결자해지를 촉구하는 것은 야권대통합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소심한 정서가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난 10월15일자 <경향신문>에 정태인 새사연 원장의 칼럼이 실렸다. 참여정부의 핵심 경제참모였다가 한미FTA의 저격수로 변신하여 온 천지를 누비던 논객이 한미 FTA 비준을 코앞에 두고 쓸쓸한 글을 남겼다. ‘모두 지쳤다. 그러나 초록이 지쳐 단풍든다던 서정주의 싯구절처럼 이제 붉은 단풍 같은 촛불을 들자고, 1%를 위한 제국을 막아내자’고 애처롭게 외친다.

그 5년 전 내가 날마다 접해야 했던 낯선 경제용어들, 투자자-국가 소송제, 래칫 조항, 비위반 제소, 약제비 적정화 방안(포지티브 리스트), 최혜국 대우, 얀포워드 규정 따위를 떠올려본다. 메탈클래드사가 멕시코에서 어떤 짓을 저질렀고, 그 메탈클래드사가 어떻게 멕시코 정부를 굴복시켰는지 따위 이야기들, 김현종, 김종훈, 웬디 커틀러 따위 이름들. 그때 나는 한미 FTA의 쟁점들을 내 일상 속에서 비춰보았다. 아이들이 PC방 가서 ‘스타 한 판’, 농구 한 게임 할 시간을 벌기 위해 숨이 차도록 뛰어가는 저녁 급식에서부터 약국 소파에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들의 약봉지까지, 시장에 파는 두부 한모에서부터 길거리에 나다니는 자동차들의 배기가스까지 도무지 걸리지 않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나면, 이 나라의 하드웨어가 미국식으로 옷을 싹 갈아입게 될 것인데, 그래서 힘없고 약한 것들, 글로벌 스탠다드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들은 모두 냉정하게 버려져야 한다는 사실, 누구도 그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아득한 두려움이 있었다. 정태인의 글에 나오듯, 한미 FTA를 추진한 노무현은 선진 시스템을 가진 국가와의 FTA를 통해 우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의도로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다. 그것은 저 위에서 민중들의 삶을 내려다보는, 철저히 가진 자의 시선이었다. 그의 핵심참모들이 ‘외부적 충격’이라 표현했던 이 한미 FTA는 말하자면, 이 나라 민중들의 평범한 삶이 ‘너무 나른하고 한심해 보여서, 한 번 크게 휘저어놓고 싶은’ 충동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들만 살아남아도 좋으니 이 나라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수준으로 올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돈놀이로 먹고 사는 나라, 다른 말로 금융자본의 천국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월가를 주름잡고 있는 격렬한 분노의 외침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먹여살리기 위해 국민경제 전체가 감당해야 했던 부담은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체결된 FTA도 그러했지만, 경쟁력 있는 삼성과 현대의 물건들을 팔아주기 위해 희생되는 경쟁력 없는 존재들, 이를테면 농업과 중소기업들이 누려야할 본연의 가치, 그리고 그들이 지켜져야 할 이유에 대해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밥과 된장을 먹지 않고 휴대폰과 반도체와 벽걸이형 텔레비전과 자동차를 먹고 살아야 할 것인지, 몇 개의 ‘초일류’들의 독주로 인해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이 땅 삶터의 자립의 기초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삐까번쩍한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농사짓고 소 몇 마리 키우는 사람들, 구멍가게 꾸려가며 하루하루 벌어먹는 사람들은 정말 한심했을 것이다. 경쟁력이 없으니까. 그래서 경쟁력 없는 너희들은 우리가 어떻게든 보상해줄 테니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들 발목 잡지 말고 잠자코 찌그러져달라는 것이 바로 한미 FTA였던 것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난 뒤 내뱉은 노무현의 발언 속에서 내가 가장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농민들에게 ‘폐업보상’을 운운한 대목이었다. 당신들 늙은 농민들은 우리가 미국하고 벌인 도박에서 나온 개평 얻어서 몇 푼 드릴 테니 그것 받아먹으면서 집에서 노시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정말 화가 났고, 그래서 그를 지금도 용서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상대를 자신처럼 귀한 존재로 여기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일진대, 인간의 노동에 대해, 자신을 인간으로 길러준 흙과 농민의 삶에 대해, 노동으로 영위되는 인간의 위엄에 대한 조금의 성찰도 고려도 없는 몽매하고도 파렴치한 논리가 바로 ‘폐업보상’ 따위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4년 반이 흘렀다. 그 무렵, 한미 FTA 체결을 눈앞에 두고서 내가 썼던 격한 글들을 다시 꺼내어 읽으면서, 그리고 그때 나에게 한미 FTA의 실상을 가르쳐주었던 매체와 지식인들의 발언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대체로 침묵하고 있다. 지친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이미 우리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허세욱 열사의 존재가 안타까웁다.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가 허세욱의 분신 이후 쓴 기사를 읽어본다. 철원군 농민회 회원들이 시위하다가 붙잡혔을 때,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다가 풀려나는 그 분들을 버스터미널까지 태워 모셔다 주었다는 이야기, 택시를 운행하다가 자신이 후원하는 시민단체 사무실 근처를 지날 때는 꼭 간식거리를 사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대접했다고 하는 이야기, 서울대 앞 ‘그날이오면’ 서점으로 유인물을 실어나르고, 자식뻘인 관악주민연대 활동가들을 선생님으로 공대하면서 그들에게 항상 ‘식사는 하셨냐’고 물었다고 하는 이야기들.

똑똑이들로 넘쳐나는 세상을 혼자서 온몸으로 연민하던 바보 허세욱, 자칭 타칭 ‘바보’였던 노무현보다 한미 FTA에 관한 한 지적으로 훨씬 냉철하고 똑똑했던, 그리고 그 노무현보다 더 진실하고 절실했던 진짜 바보 허세욱, 그 허세욱의 삶과 죽음을 지금 이 시간, 기린다.

허세욱이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세상을 떠난 그 4년 반 사이, 한미 FTA는 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그냥 이렇게 통과되도록 우리는 두 손 두 발 다 놓고 지켜보아야 하는가.

응답 5개

  1. 말하길

    글을 읽고 올해 4월에 허세욱 열사의 추모식에 다녀 오며 FTA를 새삼 떠올렸던 것이 기억에 나네요… 일상에 치인다는 핑계만 댔던 날들.. FTA가 일상을 장악하게 된다는 건 아직도 아득하게 들리기만 하지만 이제 성큼 이것들이 현실로 다가오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이 글이 단비 같이 다가옵니다. 저도 글에만 만족하지 말고 다시금 몸을 움직여 보렵니다

  2. 서업말하길

    이제야 FTA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녹평에서 나온 책을 샀습니다. 앎이 삶으로 바뀌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설령 오지 않는다 해도 다음 세대에, 다다음 세대에는 오겠지요.^^ 모두 힘내세요!

  3. tibayo85말하길

    22일 19시 (서울시청), 27일(여의도 국회 앞), 28(여의도 국회 앞) FTA반대 집회가 있다고 합니다. 가봐야겠습니다.

  4. 고추장말하길

    오늘 여긴 비가 많이 옵니다. 밤새 무섭게 내렸습니다. 리버티스퀘어에서 텐트도 없이 얇은 침낭에 의지해 노숙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냥 비가 오면 비에 젖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몸도 마음도 자주 무거워지고 지친다는 것.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기 참 힘든 때입니다. 그래도 욕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가끔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함께 있어서 이렇게 싸워내고 살아내는 것이겠죠. 오늘 선생님이 되새겨주신 허세욱 열사 이야기가 제게 많은 힘을 줍니다. 살아서 많은 것을 베풀었던 이가 죽어서도 그 베품을 멈추지 않는군요. 고맙습니다.

  5. 비포선셋말하길

    아. 지쳤다..는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옵니다. 며칠 전 신문지면을 넘기며 지친 눈으로 FTA글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진짜 바보, 허세욱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글을 보니 젖은 눈이 되네요.. 두손 두발 다 놓고 지켜보지 말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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