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스토리> 와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
‘차도남’은 한 인기웹툰에서 처음 나온 단어로 차가운 도시 남자의 줄임말이다. ‘까도남’은 ‘차도남’에서 파생된 단어로 까칠하고 도도한 남자를 가리킨다. 두 타입 모두 다정한 수식어 대신 차갑고 무뚝뚝한 단어로 대화하고 좀처럼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으나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센스를 탑재하고 있는 캐릭터다. 언젠가부터 온화한 실장님 대신 다루기 어려운 고양이 같은 남자들이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의 대세가 되었다.
지금 소개할 드라마는 <러브스토리>,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 두 편으로 각각 ‘까도남’과 ‘차도남’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각각의 주인공을 맡은 이들은 훌쩍하게 높은 키와 호리호리한 몸, 꽃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 차별된 연기력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명배우들임을 미리 알린다.
먼저 소개할 드라마는 <러브 스토리>로 2001년 TBS에서 방송되었고 ‘까도남’ 이 등장하는 발랄한 이야기이다. <롱 베케이션>, <뷰티풀 라이프>, <하늘에서 떨어지는 1억 개의 별> 등 수많은 히트작을 보유한 일본 드라마계의 유명 작가 키타가와 에리코가 대본을 썼다. 남자주인공을 연기한 토요카와 에츠시는 일본의 연기파 배우로 국내개봉작인 <20세기 소년>에서 굵직한 역을 맡아 얼굴을 알렸다. (일본 드라마 매니아가 아니라면 토요카와 에츠시의 이름이나 프로필 사진을 접하고 이 배우를 알아볼 분들이 거의 없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한때 금서처럼 VHS테입에 담겨 돌고 돌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 레터> 를 기억하시는가. 그 영화에서 죽은 남자주인공의 친구로,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유리세공가로 나온 배우가 바로 토요카와다.)
드라마 속에서 토요카와가 연기하는 나가세 코우는 찍었다 하면 30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다. 차 끓이는 물의 온도와 출판사 직원이 가져오는 주전부리에까지 까칠하게 굴고, 거짓 없이 무뚝뚝하기만 말을 직구처럼 툭툭 던져 출판사에서는 ‘갓 새끼를 낳은 고양이처럼 다루기 힘든 작가님’으로 낙인찍힌 지 오래다. 이런 나가세가 2년 동안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자 출판사는 마지막 수단으로 그에게 새로운 담당자를 보낸다. 바로 영화 <러브레터>의 히로인, 나카야마 미호가 연기한 스도우 미사키라는 여성이다.
서른 살의 스도우는 출판사의 기약 없는 계약 사원으로 나가세와 달리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직구와 같아서 매번 연애할 때마다 남자에게 차이고 직장에서도 상사들에게 꾸중을 듣는 편이다. 늘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서 차이기를 반복하는 여자와 굳게 마음을 닫고 혼자 살아가는 방식을 몸에 익힌 남자는 마음과 말이라는, 감정의 본질과 표현 방식에 대한 서로의 차이를 계속되는 만남을 통해 터득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타인과 접촉하여 교감하며 이해해가는 긴 호흡을 함께 다듬으며 갑과 을의 상하관계에서 점점 친구 같은 수평관계로, 그리고 연애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서툰 남녀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유쾌하고 담백하게 담은, 제목 그대로 상큼한 ‘러브 스토리’ 이다.
‘차도남’이 등장하는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은 2002년 TBS에서 방송되었다. 이 드라마는 <네 멋대로 해라>라는 우리나라 드라마와 처지가 비슷한데 한때 일본의 국민 여동생이었던 히로스에 료코가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열풍에 밀려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탄탄한 각본과 연출, 출연배우들의 연기로 매니아들에게 지지를 얻고 대외적으로도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 34회 일본TV드라마 아카데미’에서 각본상과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자주인공을 맡은 와타베 아츠로는 후에 소개할 <케이조쿠>, <백야행> 등의 드라마로 국내의 매니아들에게는 익숙한 배우이다. 와타베가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 시라토리 레이지는 신주쿠 가부키 거리의 1인자 호스트로 오직 ‘돈’만 믿는 남자다. 돈 이외의 무엇도, 누구도 믿지 않던 레이지는 뭇 여성들의 마음, 즉 돈을 챙기며 승승장구하다가 하루아침에 사기, 횡령혐의에 걸려 6개월 동안 실형을 살게 된다.
감옥까지 갔다 왔지만 그에게 남은 건 7억 엔의 사채뿐이다. 1달 안으로 갚지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내장을 빼앗기고 너덜너덜한 시체가 되게 생겼다. 방법을 고심하던 레이지 앞에 한 변호사가 나타난다. 레이지를 찾아 헤맸다던 그는 10억엔의 유산을 남기고 죽은 IT업계의 사장이 레이지의 아버지이며 하나 남은 혈육인 여동생이 레이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레이지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레이지의 시중을 들다가 레이지의 출소 직전 죽은 호스트가 공교롭게도 레이지와 이름이 같았고 변호사가 찾는 ‘그’ 레이지였다. 상황을 파악한 레이지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여 7억엔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이 진짜 오빠인 척하여 유산을 가로챌 사기극을 계획한다.
잘 나가던 호스트였으니 아버지를 잃고 애정에 굶주린 부잣집 여자아이 마음 하나 구슬려 돈을 뽑아내는 것이야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라 생각하며 레이지는 의기양양하게 여동생인 아코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철 모르는 부잣집 딸 아코가 아닌, 굳게 마음을 닫은 시각장애인 아코가 서 있다. 아코는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보지 못하지만, 형태가 없는 마음만은 다 보인다는 듯 레이지에게 얼마간 돈을 쥐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한다.
사랑 대신 돈을 믿어온 레이지에게 “사랑 따윈 필요 없다.” 라고 내뱉듯 말한다.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특기인 거짓을 펼치는 레이지와 온통 거짓 속에 둘러싸여 살아온 아코는 99%의 거짓을 통해 단 1% 뿐인 진실에 다가간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했던, 돈 이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고 했던 서로의 거짓말 속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순도 100% 짜리의 1% 진실을 말이다.
두 드라마 모두 10년 전의 작품이지만 소품으로 쓰이는 핸드폰 이외에는 특별히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스타일리시하고 잘 생긴 배우들이 나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도 연애 드라마의 미덕이지만 무엇보다 연애 드라마가 지녀야 할 가장 중대한 요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을 하고 싶게 만드는 ‘동심력(動心力)’이고 두 드라마는 그 조건을 충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탄탄한 각본과 연출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드라마 속에서 남자 배우들의 눈빛이 시청자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가장 큰 관람 포인트다. 두 작품 모두 눈의 클로즈업이 유독 많은 것은 드라마를 만든 이들도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덧붙여 우리나라보다 유독 일본 드라마에는 이런 타입의 남성들이 좀 더 많이 등장한다. 사실 일본 여성들이 ‘욘사마’에게 열광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다정하고 온화한 실장님 느낌의 남성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 속 많은 남자주인공들은 퉁명스럽고 거칠다. 사랑이 넘치는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보다는 무뚝뚝한 말과 투박한 행동이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연인이 100일 기념일 같은 것을 챙긴다고 말하면 대다수의 일본 사람들은 놀라며 “한국 남자들은 모두 욘사마처럼 로맨틱하군요!” 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언어에 남녀의 유별하고도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는 문화적인 차이가 양국 남성들의 ‘로맨틱 잔근육’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장난스럽게 추측해 본다.
시각장애인들의 ‘의심’은 비장애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합니다. 사실 다른 장애(발달장애나 뇌병변…)에 비하면 장애랄 게 별로 없지만,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 타인을 보지 못한다는 조건이 그들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히게 하지요. 그런 여자의 사랑을 얻어낸 호스트의 수완과 진심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