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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0-운동은 수단인가

- 고병권(수유너머R)

도대체 이번 점거는 무엇을 얻어냈을 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점거가 1회성 시위가 아니라 지속의 형식을 취하면서 사람들은 이것이 언제까지 진행되는 것인지 묻기 시작했다. 점거를 지속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지점이 어디냐는 것이다. 또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계산법이 분명히 서야 나중에 이 점거를 평가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묘하게도 이런 의견은 ‘도대체 요구하는 게 뭐냐’는 주류 언론이나 정치권의 물음과도 통한다. 점거의 목표 내지 목적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을 허용하는 것은 경찰특공대의 침투를 허용하는 것보다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물음이 점거 자체를 질적으로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이 물음이 허용되는 순간 ‘점거’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만다. (‘이번 점거를 주도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도 마찬가지다. 누가 무엇을 얻기 위해 이번 일을 벌였는가. 이 물음은 그 자체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점거라는 사건을 행위자와 그 의도에 종속시키는 효과를 낸다. 만약 이런 물음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면 시위를 진압하거나 통제하려는 쪽에서는 일이 무척 쉬워진다. 주동자와 협상하거나 그를 제거하면 되는 것이다.) 전체의 단일한 ‘목표’를 설정케 함으로써 과정을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 거기에는 우리가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다. 운동은 과연 수단인가. 운동은 수단일 뿐인가.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파업에 대해 물었듯이, 이런 비유가 안 됐지만, 권력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꺼내드는 일종의 주머니 칼 같은 것인가.

자유의 종' 목거리를 만들어나눠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이 일을 하는가(10월 7일 리버티플라자).

자유의 종' 목걸이를 만들어나눠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이 일을 하는가(10월 7일 리버티스퀘어).

운동은 그것에 부여된 목표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 자체로 사유되어야 하는가(여기에는 분명 발터 벤야민, 앙리 베르크손의 중요한 질문이 들어 있다.).
이번 점거를 지켜보며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점거자 중 한 사람인 슈나이더(N. Schneider)는 ‘점거에서 아무도 책임자의 자리를 앉지 않는다면 결정을 어떻게 내리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변했다. “합의를 이루어내는 과정은 정말 힘이 듭니다. 하지만 점거자들은 서두르지 않아요. 그리고 어떤 이슈들에 대해 합의를 이뤄내면, 며칠을 걸려서 말이에요, 그때의 감동이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죠. 대단한 응원의 힘이 플라자를 가득 채우고 있어요. 열정이 가득한 시위자들, 어떤 것에 대해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창조적인 그 수백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험은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이번 점거의 ‘목표’가 뭐냐는 물음에 대해 흥미로운 답변을 한다. “9월 17일을 준비하면서 뉴욕시 제너럴 어셈블리(NYC General Assembly)는 어떤 법안의 통과라든가 혁명의 시작 같은 것에 목표를 두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목표를 두었다고 할 수 있죠. 정치적 조직화의 새로운 기초가 될, 이런 어셈블리들을 여기저기에, 세계 곳곳에 만들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어요.”(점거자들이 발행하는 신문 <The Occupied Wall Street Journal > 1호)
‘결론의 도출’이니 ‘운동의 목표’니 하는 용어들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가 힘을 주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그 ‘과정’이다. 그 ‘과정’의 경험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전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그에게 뭔가 강한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위의 초기 제안자이면서 진행 과정에서 촉매 내지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는 그룹인 ‘뉴욕시 제너럴 어셈블리’가 세운 목표란 우리가 통상 경험하는 운동의 목표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새로운 법안이나 제도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국가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자 하지도 않는다. 운동의 목표는 운동의 확산이다(운동은 그 자체의 증식만을 요구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제너럴 어셈블리 형식의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 말이다. ‘과정’이 도달해야만 하는 ‘목표’가 있다기보다, 과정의 지속과 확대가 목표라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슈나이더의 말은 재밌다. ‘이미 일어나고 있어요.’ 이는 과정의 끝에 목표가 있지 않고 과정 중에 목표가 달성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정작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과정’인데, 목표를 부과하는 사람들은 변화의 기준을 목표의 달성에 둔다. 그 때문에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사실 ‘과정’과 ‘일의 일어남’, 이 두 말은 동어반복이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이들은 ‘과정’이 아주 짧게 끝나기를 바란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그것이 매우 효율적인 투쟁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위가 법과 제도의 변경을 가져오는 것은 중요하고 많은 경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위, 운동의 본래적 가치가 아니다. 마치 투표를 잘하기 위해, 정권을 바꾸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운동이, 운동 속에서 이루어진 변화가 투표함으로도 표현되고 정권 교체로도 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운동의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운동한다는 사실’,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우리가 운동의 성과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거기에 참여한 이들의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점거를 제안하고 준비한 사람들 중 한 명인 저스틴 위드스(Justin Wedes)는 <데모크라시나우(DemocracyNow)>라는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시위 구호는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였습니다. … 그 생각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과정이 항상 지배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합의를 이루어가는 과정, 우리의 요구, 우리의 행동계획에 도달해가는 과정, 바로 그것이 이곳을 이끄는 힘(driving force)가 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 우리의 제너럴 어셈블리에서 매일 밤 우리는 여전히 합의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10월 11일 방송) 도대체 합의한 결과가 무엇이고 그것은 언제 확정되는거냐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과정’이 존속하는 한에서만 이 점거는 계속 존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운동 속에서 제기되는 물음은 표상된 목표에 얼마나 다가갔느냐가 아니라, 운동 속에서, 흐름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고 증폭시킬 것이냐이다. 강약과 리듬을 만들고 때로는 거기에 변조를 가하면서 끊임없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의 끝음표가 그 노래가 추구한 목표가 아니듯이, 중요한 것은 어떤 지속을 만들어내느냐에 있지 그것이 어디에서 멈추었느냐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운동에는 정말로 예술적 기예가 필요하다. ‘과정’이 작품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과정 끝에 작품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과정’을 목적에서 구원하라. ‘과정’을 최대화하라. ‘과정’ 속에서 최대한 멀리가라.

응답 2개

  1. […]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0-운동은 수단인가 No Comments » 댓글을 취소하려면 여기를 누르십시오 […]

  2. tibayo85말하길

    과정을 목적에서 구원하라. 과정을 최대화하라. 과정 속에서 최대한 멀리 가라. 새기겠습니다. 부디 ‘끝'(목적)에 대한 조급증에 사로잡히지 않고, 최대한 멀리 나가길…그 지점에서 새로운 삶의 주체들이 생겨나고 성장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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