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1-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것이다

- 고병권(수유너머R)

1. 소위 ‘직접민주주의’

이번 점거에서 자주 보이는 피켓 중 하나는 ‘직접 민주주의(Direct Democracy)’다. 미국의 대의정당들인 공화당과 민주당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월스트리트를 대의하는 ‘똑같은 놈들’이라고 말한다. 이들 정당들이 사실상 대중이 아닌 돈을 대의(대표, 표상, representation)한다는 점에서 ‘금권정치(plutocracy)’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기업의 이해를 대의한다는 점에서 ‘기업정치(coporatocracy)’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제도, 특히 ‘대의시스템’과 동일시 해온 사람들에게는 물론 전혀 먹히지 않는 소리다.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의 제도를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가진 생각, 즉 저들은 우리를 대의하는 게 아니라 자본이나 기업을 대의한다는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한국에서도 간혹 이런 말을 들었다.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선되는 것이고, 당선되는 데는 돈이 들기에 돈 가진 자의 이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과 대중의 지지를 낚는 것, 다시 말해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과 대중의 이해를 장악하는 것을 구별하기 어렵다.
물론 대의제에 대한 비판이 어제 오늘의 것은 아니다. 이런 비판에 입각해서 소위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직접 민주주의자들이 가진 설득력은 대의제, 다시 말해 ‘간접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데서 멈춘다. 직접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면 자동으로 튀어나는 말들이 있다. 그런 건 ‘아테네처럼 작은 곳’에서나 가능하지 지금처럼 큰 나라에서 어떻게 가능하냐는 이야기, 나랏일을 전문적 능력도 없는 대중들이 어떻게 직접 맡느냐는 이야기, 반상회 한 번 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나라의 온갖 문제들에 대해 매번 대중들이 결정해야하느냐는 이야기 등등. 요컨대 직접민주주의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논쟁은 항상 대의제를 어떻게 보완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사실 이 문제는 따지고 들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다. 다만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의 대립구도는 잘못 제기된 것이라는 점만은 지적해두고 싶다. 다시 말해 ‘전체 국민이 가진 주권을 누군가에게 위임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할 것인가’는 애당초 제기될 수 없는 대쌍이다. 왜냐하면 나라를 하나의 단일체로 가정하고 그 단일체가 가진 힘이라는 의미에서의 근대 주권(이 규정은 단순히 최고의 권력이라는 전통적 의미 이상의 것이다)은 나라 전체, 무엇보다 ‘국민 전체’를 표상가능한, 다시 말하자면 ‘대표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놓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근대 주권 개념 자체가 ‘대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 2장을 참조하시라). 주권이 있고 그것을 ‘대표’에게 위임했다기보다, 현실의 ‘대표’를, 우리 모두가 상상하는(적어도 그런 게 있다고 상정하는) 주권의 대행자로 간주하는 ‘메커니즘’이 역사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국민-주권-대표’는 근대 정치를 작동케 하는 하나의 도식, 하나의 기계라고 부를 수 있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여기서 ‘국민’은 개개의 시민들이 아니라 통일체로서 전체 시민이며, 주권 역시 개별 권리들이 아니라 그 권리들의 기반이 되는 단일 권리를 말한다. 그래서 루소가 잘 지적한 것처럼, 개별 국민의 총합은 결코 주권자 국민에 이르지 못하며, 개별 권리들의 총합 역시 주권과 동일하지 않다.)
직접민주주의의 주장이 ‘국민’이 곧바로 ‘대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이는 뭔가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화폐’로서의 ‘금’의 역할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 ‘가치’를 직접 유통시키자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국민이나 주권은 대표처럼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반대로 대표를 통해서만, 그리고 대표에 대해서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고 요구하고 인정하고 그것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국민들의 총합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모든 개별 국민들이 청와대나 백악관에 몰려가서 ‘대표’로서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대의제일 뿐이다. 한마디로 대표수만 늘어날 뿐이다.
나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직접성을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월 7일, 리버티 스퀘어에서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것이다(Democracy is Direct)’라는 표지판을 보았을 때 묘한 느낌이 들었다. 밝게 빛나는 그 표지판은 백악관을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라기보다는 이곳 리버티 스퀘어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란 직접적인 것’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백악관과 의회가 있는 워싱턴DC로 가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것이다’는 말을, 이곳 리버티 스퀘어에서 하게 하는가.

2. 해방구

반복해서 말하지만 ‘민주주의 직접성’(나는 ‘직접민주주의’가 근거한 오해에 반대하기 위해, 그리고 민주주의와 직접성이 갖는 내적 연관을 지시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다.)은2억5천만 미국인이 모두 대통령 당선자가 되는 것과는 무관하다.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것이다’는 표지판이 여기 리버티 스퀘어에 선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이 표지판을 제작한 이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직접성은 백악관과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며 지금 여기 리버티 스퀘어가 그곳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리버티 스퀘어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은 권력 탈취를 모의하는 사령부보다는 삶의 공동체, 다시 말해 갑자기 탄생한 ‘마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장시간의 ‘점거’라는 시위 형식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 같기는 한데, 점거 장소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한쪽에서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다른 쪽에서는 음식을 장만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명상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책을 읽고, 또 다른 쪽에서는 토론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뭔가를 함께 만들고 있다. 점거 시위 중에 만들어지는 이런 삶의 형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여기에 어떤 ‘직접성’이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성’은 지난 리포트(10호, ‘운동은 수단인가’)에서 언급한 ‘목적과 수단’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다(과정이 목적에서 구원될 때 그것은 직접성을 갖는다). 나는 운동에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리버티 스퀘어는 그 동안 우리 삶에 내려진 모든 선험적 목적들, 우리 모두가 달려가도록 명령받았던 길에 대한 거부 내지 판단 중지를 담고 있다.


이 점에서 리버티 스퀘어는 ‘해방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해방구란 시간과 공간의 규정력이 일시적으로 멎는 사건의 장소, 즉 현장이다. 점거가 일어나기 전에 ‘주코티 공원’이라 불렸던 장소를 현재까지 규정했던 모든 코드들은 효력을 상실하거나 부차화된다. 이곳 리버티 스퀘어를 에워싸고 있는 경찰은 오히려 이곳이 그들의 명령 바깥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뉴욕의 법과 권력은 외부에서(그들이 외부에 있다는 건 내부에서 밀려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지 외부에서만 리버티 스퀘어를 위협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점거 28일째인 오늘만 해도 아침부터 청소를 핑계로 점거자들을 몰아내려는 당국의 시도가 있었다. 이 심연의 공간, 이 유한성 안에서 열린 영원성과 무한성을 닫아버리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이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해방구가 매우 불안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작게나마, 일시적으로나마 열렸다.
해방구에서는 모든 것들의 직접적인 난입이 이루어진다. 참가자의 자격을 걸러내는 규정들이 와해되기 때문이다. 연령, 직업, 인종, 문화, 성적지향, 심지어 국적까지도 발언의 자격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마치 ‘영토’가 생겨나기 전의 ‘대지’로 돌아간 느낌이다.).
여기서는 각종 터부들이 깨져나간다. 집회에서는 그동안 미국 사회의 금기어였던 다양한 말들이 튀어나온다. 9월 27일 점거장을 방문한 철학자 코넬 웨스트는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 “과두체로부터 일반시민들로 권력을 이동시키기에” ‘혁명’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했다. 10월 첫주에 내가 본 어떤 연사는 2차대전 이후 미국사회를 지배해온 금기어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제는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자본주의’ 문제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사회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는 ‘계급투쟁’이나 ‘계급전쟁’이라는 말을 최근에는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 삶을 지배해온 각종 원칙과 방향들, 규칙들이 일시적으로 판단 중지되는 곳, 그곳이 해방구이다. 가깝게는 신자유주의에서 멀게는 자본주의까지 모든 원칙들은 일단 괄호쳐진다. 그동안 사람들이 ‘드림’이라고 불러온 지향점들, 삶의 이상적 유형들이 여기서 타도되는 것이다. 나는 지난 리포트에서 ‘과정에서 최대한 멀리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정말 사람들이 얼마나 멀리 가느냐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이 흐름을 얼마나 증폭시키느냐에 따라 타도의 폭은 달라질 것이다.
온갖 사람들이 대안적 삶의 형식, 대안적 삶의 유형을 여기서 실험한다. 주방에 결합한 생태주의자는 음식물 쓰레기를 쓰레기가 아닌 비료로 바꾸는 실험을 선보인다. 주방의 설겆이 물이 곧바로 주방 옆에 만든 텃밭으로 흘러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는 생태시스템을 시험하고 누군가는 도서관을 만들고 누군가는 신문을 제작한다. 음식과 노래와 춤, 책과 신문, 트윗과 페이스북. 하나의 마을, 마치 원형적 공동체, 태고의 공동체로 돌아가 새로운 미래의 공동체를 창안하는 사람들처럼, 이들은 대안을 만들고 있다. 이것을 곧바로 정책으로 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공동체, 이 삶의 유형은 지배적 유형(예컨대 신자유주의적 삶의 유형)을 타도한 자리에 사람들이 구축하고 싶은 삶의 다른 방향이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온갖 탐욕적인 경쟁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을 부와 권력, 정보 등을 독점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삶을 꾸려가는 사회를 원한다는 걸, 대중 스스로 확인하는 작업이며, 그것을 모두에게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데모스의 힘이다. 삶의 기본 유형을 재창안하는 힘 말이다. 그리고 이 데모스의 힘을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 민주주의다.


정치가들은 여기에 호응해야 한다. 이 유형에 맞추어 정치체를 재설계하고 정책을 재구상해야 한다. 물론 하지 않아도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사회체는 계속해서 판단중지를 경험할 것이고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해방구는 점점 커지고 정치체 자체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이같은 해방구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 바로 직접성이다. 민주주의 직접성이란 선험적으로 규정된 목적들, 규정들, 원칙들을 깨면서, 말 그대로 ‘근거없는 채로’, ‘자격을 묻지 않으면서’ 실험하고 구축해가는 삶과 관련된 것이다. 그때 발휘되는 것은 ‘법의 힘’도 아니고 ‘돈의 힘’도 아니다. 그 힘은 ‘데모스의 힘’, 바로 민주주의다.
벤야민이나 데리다가 말한 ‘메시아론’에 빗대어 비유해보자면 이렇다. 메시아의 도래는 간접적이지 않다. 메시아가 도래할 때 모든 율법은 정지하고 성직자들의 지위는 부인된다. 그때 우리는 ‘직접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응답 3개

  1. […]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1-민주주의는 직접적인 것이다_고병권(수유너머R) […]

  2. 박카스말하길

    민주주의 직접성이 지속가능한 생존의 형태로 나아갈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해보게됩니다. 직접민주주의에서의 경제적 능력(혹은 생존)은 어떤 모습으로 생겨나게 될 지 앞으로 고민, 놀이꺼리가 될 것 같습니다.

  3. tibayo85말하길

    직접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민주주의를 대의체제로 이해하는 사유로의 미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신 민주주의의 ‘직접성’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부디 리버티 스퀘어에서 생성된 데모스의 힘이 새로운 삶의 제도(형식)으로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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