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공감 능력을 키우자 – 3. 사랑과 공감능력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그런데 공감 경험을 만들어 사이코패스를 통합적으로 치료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단다. 공감능력이 많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파충류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공감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전제 말이다. 앞에서 공감과 양심이 서로가 필요한 보완관계이므로 공감이 없다면 양심도 없고 양심이 없다면 공감도 없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없다’는 말 뜻이 ‘전무(全無))’일까 아니면 ‘(극소(極少)’일까. 사이코패스와 같이 차라리 전무라고 생각해야 그를 이해하기에 더 편리할 만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최근 심리학이 발견 했다고 하자.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감과 양심이 생길 가능성이 ‘전무’일 수도 있을까. 그러니까 사이코패스도 공감과 양심이 부족하지만 ‘있다’고 전제하고 논의를 계속해보자는 거다.

사아코패스가 생기는 데 정신의학 쪽의 주장인 출산 이전에 생긴 요인과 사회심리학 쪽의 주장인 출산 이후에 생긴 요인 중에 어떤 쪽이 더 결정적인지를 밝혀내려면 어떤 연구가 필요할까? 이론상으로는 출산 이후에 세라토닌 부족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전두엽을 지닌 아이를 찾아내서 조금이라도 공감이 가능한지 전혀 불가능한지를 연구해야만 될 거야. 그렇지만 신생아의 반응으로는 공감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 불가능한 연구지. 그러나 실험을 대신하는 추리는 가능하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생길 수는 없다는 명제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공감 능력을 가진다는 명제, 이 두 명제 사이에서 신생아의 공감 능력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면 대부분의 신생아의 공감 능력은 현실태가 아닌 가능태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에게나 공감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추리를 해보자. 눈에 보이는 육체의 경우 대개 필요한 지체와 기관을 다 갖추고 태어나므로 육체의 능력이 비슷하잖니. 이로 미루어 보아 눈에 보이지 않는 뇌도 감각 중추나 언어 중추 등 필요한 기관과 지체를 다 갖추고 태어났을 것이며 그러기에 정신능력도 육체의 능력과 같이 비슷하게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신생아는 공감능력의 불씨(가능성)를 가지고 태어나서 어떤 아이의 것은 일생동안 꺼진 듯이 온기조차 느낄 수 없지만 다른 아이의 것은 뜨거운 열기와 거대한 불길로 타오를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신생아의 불씨가 현실태로써는 아주 작아 보여도 가능태로서 결코 작은 것이 아니므로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니까 사이코패스가 되기 쉬울 만큼 전두엽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그 신생아에게 불씨가 아주 작아 꺼진 것 같지만 아주 없지는 아니하다고 믿고 그걸 바탕으로 더 크게 더 뜨겁게 살려내자는 말이다.

또 달리 추리해보자. 유전자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오랜 세월의 진화과정에서 열성 유전자는 이미 걸러졌기 때문에 육체의 능력이 비슷해졌듯이 정신의 능력도 비슷해졌다고 전제하자. 그렇다면 많고 적은 차이는 있을망정 어떤 아이가 중요한 인간성의 하나인 공감 능력을 전혀 타고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게다. 물론 코끼리의 어금니와 같이 한 종 안에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로 보이는 진화의 공통 특징이 있으나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 종의 공통특징이 아니라 특정 개체가 지닌 열성적인 특징이야. 열성적인 특징을 지닌 개체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전 과정에서 자연 선택에 따라 자꾸 걸러지게 마련이라는 유전 원리를 확인하자. 그렇다면 어떤 개체에 혹시 육체나 정신에 어떤 장애가 있을 때 그 원인이 유전자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환경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유전자의 다양성 때문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 방사능 낙진 지역에 갑자기 기형아가 많아진 경우처럼 임신 전후에 유전자가 환경적 요인으로 손상되었기 때문이지 유전자의 본래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도 많이 있잖니.

자, 그래서 세라토닌 부족으로 전두엽이 활성화되지 않는 신생아라도 비록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공감 능력이 있는 전두엽이 존재한다면 공감 능력 즉 공감 가능성도 존재하는 거란다. 전두엽의 생리적인 장치에 이상이 없으므로 엔진 오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세라토닌만 활발하게 분비되면 전두엽은 활성화되고 공감은 가능해질 수도 있어. 그러므로 기계적인 장치에 고장이 없는 엔진에 엔진오일과 연료를 주입할 때 힘차게 작동할 수 있다면 엔진은 연료와 오일이 없을 때도 힘차게 일할 가능성은 가지고 있는 거야.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장치에 고장만 없다면 전두엽은 공감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리고 세라토닌이 전혀 분비되지 않아서 전두엽이 아주 멈춰선 상태가 아니라 세라토닌이 부족하여 전두엽이 활발하지 못하므로 공감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야. 그러므로 전두엽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작동의 활발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감 능력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을 디딤돌로 삼아 논의를 전개해 나가자.

인간은 현재의 사건을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인식한다. 만약에 경험이 경험을 낳는다면 식어버린 공감 능력의 불씨에 불쏘시개를 넣어 불씨를 살리내듯이 자꾸 공감을 경험하게 해야 공감의 능력의 불씨가 활활 타오를 수 있단다. 여기서 공감의 경험이란 넓은 의미에서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경험이야. 인간이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는 그 누구를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사랑은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이야. 그런데 이 사랑의 노력은 바로 공감 때문에 생긴다는 거야. 인류의 스승인 예수가 사랑을 석가가 자비를 공자가 인을 강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인간이 지닌 사랑에 대한 공감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먼저 그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 공감에 맞추어 자기 행동을 조절하게 마련이야. 먼저 사랑하는 이의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그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공감·공명은 사랑의 첫걸음이고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이랄 수 있단다.

그러나 공감능력이 부족한 이들도 사랑을 통해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대한 수많은 공감의 경험이 무의식에 쌓이고 쌓이면 자신의 경험과 비슷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사이코패스의 악을 악으로 대하면 그는 더 차거워질 뿐이지. 얼어붙은 전두엽을 데워주는 사랑에 사로잡힐 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 때까지 필요한 것이 인내일 게다. 많은 종류의 정신병이 사랑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 치료 방법도 사랑과 인내밖에 없을 거야.

공감 능력을 기르도록 경험의 기회를 만드는데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취학 이전에 엄마가 동화나 동시를 들려주거나 읽어주는 거란다. 문학 작품은 인간이 공감을 나누려고 만든 장치(구조물)야. 문학 작품은 작가가 독자와 공감을 나누기 위해 우연한 현실보다 필연적인 허구를 만들어 그 허구 속에서 작가의 대리인인 등장인물이나 시적 화자가 독자에게 말을 걸도록 만든 장치야. 문학적인 감수성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독자가 작가와 간접적으로 대화하는 능력 즉 공감을 나누는 능력을 말해. 문학 작품을 읽으며 독자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등장인물이나 화자와 동일시하면서 공감을 나누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꿈 많은 어린아이들에게도 필요하고 유효해. 모든 예술이 공감으로써 보다 순수한 감정과 보다 새로운 생각과 보다 가치 있는 삶에 공감하도록 이끌어주지만 문학 작품은 다른 예술보다 훨씬 인생을 보다 총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효과적으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단다.

내가 문학 수업을 하면서 경험한 것은 공감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과 공감 능력을 기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거였단다. 문학 작품의 감상과 비평의 모든 문제는 자신을 작중 화자와 동일시할 수만 있다면 다 풀리게 되어 있지. 그러나 작중의 상황 속에 있는 화자와 동일시하지 못하는 까닭은 고정관념이나 선입감에 빠져있기 때문이야. 작중의 상황을 충실하게 상상해보지 않고 자신이 경험한 상황을 떠올리고 작중의 화자가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공감이 안 되고 그래서는 자신의 고정관념에 가장 가까운 오답을 고르게 되어 있어.

수험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가 시 감상 문제인데 이는 자신의 경험만 고집하려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고정관념을 비우는 길은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이고 감정이입하기이며 화자와 동일시하기지. 그러려면 시적 상황을 충실히 떠올리면서 시를 눈으로 읽지 말고 나직이 소리 내어 읽어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해. 화자의 감정적인 태도에 맞추어 화자의 목소리로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낭송할 수 있다면 이미 공감은 다 끝났으므로 어떻게 묻든지 다 풀리게 되어있어. 시 감상 문제를 풀려고 머리를 짜내고 생각을 깊이하면 할수록 자신의 고정관념에만 매달리게 돼. 읽기 전에 마음을 비우기 위해 즉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 오직 화자의 목소리만을 충실하게 재현하겠다고 다짐하고 읽으면 더 깊이 몰입하여 더 많이 공감할 수도 있다.

사이코패스를 구분하는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야. 다만 끔찍한 비행을 저지르고도 피해자에게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으며 혹시 사이코패스 아닌가 의심하게 되지. 그러나 그런 사람이나 집단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아. 나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이 공감 장애가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오버마 대통령이 출마할 때에 연설을 들으면 청중이 듣고 싶은 말로 설득하고 청중들이 이에 기꺼이 화답하는 것을 볼 때 미국인들이 저런 대통령과 함께 공감을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버마가 공감 지수는 높았지만 집요한 추진력은 이명박 대통령만 못해서 실망했단다. 나는 우리 홍아가 자라서 입장을 바꿔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오버마의 공감 지수만큼 설득력이 있어서 홍아를 대하는 모든 이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 글을 쓴다.

국가나 민족 집단의 역사적인 행위로 본다면 똑같이 팽창적인 민족주의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인류에게 수많은 고통을 안긴 독일인과 일본인의 태도는 너무나 대비된다. 독일인은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참회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했으며 후세대에게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육했어. 그러나 일본인은 참회나 배상, 교육 등 전후 청산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일본이라는 국가 또는 민족 집단의 역사는 사이코패스 증상을 보였어. 그렇다고 일본 국민이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전후에 미국이 공산주의 팽창을 막으려고 다시 극우민족주의자들이 정치권력을 쥐게 만들고 대다수 국민들이 그들에게 끌려 다녔기 때문이야. 그러나 히틀러를 따르는 나치스를 비롯하여 파시스트들은 극우민족주의자들이며 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같은 민족에게는 점잖더라도 적대시하는 소수민족을 학대하는 사이코패스들이었고 사이코패스일 수밖에 없단다.

끔찍한 비행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여러 사람의 눈에 띌 때 비로소 이 사람이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많은 사람인데도 눈에 띄지 않거나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물에 빙점과 비등점이 있는 것과 달리 사이코패스의 경계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공감 능력이 완전한 사람도 없거니와 아주 없는 사람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까닭은 사이코패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신병의 경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정상인들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과 이 모두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국 사랑에 달린 문제이며, 따라서 사랑으로 치료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이며, 아주 조금씩이라도 치료될 수 있는 문제임을 강조하고자 함이란다.

홍아야, 너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사랑이란 잘 살리려는 노력이란다. 어찌해야 잘 살리는 것인지 ‘잘’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얘기 나누자. 그러나 ‘잘’ 살리려면 먼저 상대의 감정적인 요구에 공감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네가 공감능력을 기르기를 바라며 그러려면 입장 바꿔 생각하자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고 싶다. 혀로 맛을 보듯이 너의 감정으로 남의 감정을 함께 느끼어 같이 웃고 우는 홍아를 상상하면 하버지는 흐뭇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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