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생각은 글로벌하게, 영화는 로컬하게” 영화의 지역성을 사고하다.

- 황진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월계동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푸웃! <나꼼수>에서 이 멘트가 웃긴 이유는 ‘화자의 꼼수’ 때문이다. 소선거구를 채택하는데다 지역감정마저 작동하는 한국의 정치인에게 지역기반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으랴. 지역기반은 영화에서도 중요하다. 선거판의 표심이나, 박스오피스의 티켓심이나 다르지 않다. 화면 속 장소, 인물, 언어는 친숙함과 낯설음을 가르는 요인이다. 잘빠진 할리우드영화 젖혀두고, 다소 미진한 한국영화 보는 이유는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친숙함 때문이다. 이를 문화적 낙차라고 하는데, 외국영화라도 같은 인종과 비슷한 풍경이 나오는 아시아 영화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치다. 영화의 지역성은 우선 관객과의 교감을 위해 필요하지만,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판타지 장르를 비롯한 일부 영화에선 일부러 ‘탈장소성’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게의 영화는 구체적인 지역성을 띌 때 메시지나 질감이 더 또렷해진다. ‘가장 한국적인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영화는 지역성을 통해 오히려 보편성을 얻는다.

영화의 지역성을 시장 차원에서 고찰하게 만든 영화가 <친구>였다. ‘부산’은 영화 속 주제인 ‘2인자 성’과 맞물려 관객을 모으는 키워드였다.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사는 대한민국에서 부산은 비수도권의 대표적 표상이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친구>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부산에 영화적 인프라가 확충되고 투자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랑>, <사생결단>, <영도다리>, <해운대> 등 부산의 풍경과 정서를 담은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인천은 <고양이를 부탁해>, <파이란>, <천하장사 마돈나>의 배경이 된 도시이다.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축구단을 그린 <비상>이나 인천의 록밴드를 그린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은 인천 특유의 변방성과 소외감을 담고 있다. 가장 감각적인 멜로를 찍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와 <외출>은 강릉과 삼척을 구체적인 장소로 삼는다. 이후 <라디오 스타>의 영월이나 <소와함께 여행하는 법>의 횡성도 중요한 장소성을 갖는다. 그러나 외지인이 바라보는 풍광이 아닌 현지인의 정서가 담긴 강원도 영화로는 <검의 땅의 소녀와>, <감자 심포니>를 꼽을 수 있다. <짝패>는 ‘온성’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하지만, 충청도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씨는 영화에 고유한 정서를 불어넣으며 지역성을 입힌다. 반면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은 태안 신두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만 지역성을 품진 않는다. <하하하>는 아예 통영의 모든 장소를 낱낱이 보여주지만 역시 여행자의 시선이다. 그러나 <오!수정><극장전><북촌방향>의 서울은 다른 느낌이다. 서울을 수도가 아닌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만이 밀착할 수 있는 정서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영화 속의 장소가 지역성을 띄기 위해서는 현지인적 정서가 녹아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극명한 지역성을 띠는 영화는 오멸 감독의 영화이다. <어이그, 저 귓것>(2009)과 <뽕똘>(1910)은 제주도의 풍광을 소비하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곳의 자연과 전설을 나의 무의식으로 삼는 토박이의 시선이 담긴 영화이다. <어이그, 저 귓것>은 서울말로 “어이구 저 화상” 쯤 되는 말이다. 제목이 그러하듯, 영화는 모조리 제주 방언, 아니 현지어로 되어 있다. (방언이란 말도 서울중심의 사고가 담긴 정치적 용어이다) <뽕똘>에선 아예 서울에서 온 배우에게 “언어가 안 된다”며 타박한다. <어이그, 저 귓것>은 일 안하고 노닥거리는 남자들을 그린다. 제주남자들이 한량이라는 건 꽤 회자되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유배 온 양반들을 제주 비바리들이 ‘물질’과 농사로 먹여 살린 데서 유래했다는 속설도 있다. 영화는 제주남자들의 한량 짓을 통해 느긋함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어이그, 저 귓것>은 음악영화이기도 하다. 제주민의 삶을 현지어로 노래한 가수 양정원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주연을 맡았다. 질박하고 여유롭다. <뽕똘>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다. 도저히 영화를 만든다는 게 가당치 않아 보이는 현지인들이 서울에서 온 여행자를 배우 삼아 ‘낚시영화’를 찍는다. 배우를 절벽에 세워두고 하염없는 ‘기다림’을 설파하던 그들은 강태공의 ‘미끼 없는 낚시’가 세월을 낚듯, 테이프 없는 카메라로 사람을 낚는다. 영화가 아닌 영화 만들기의 행위만 남는 과정. 영화가 ‘자파리’(서울말로 ‘저지레’)라 부르는 이 과정을 통해, 서울에서 온 여행자 역시 그들의 삶의 방식에 전염된다. 영화는 현지인 제작자와 외지인 배우를 통해 중심과 변방의 사고를 전복한다. 영화는 산방산아래 해안 등 절경을 보여주지만, 풍경에 감탄하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연과 함께 살아온 현지인의 시선을 취한다. 이를 배창호 감독의 <여행>(2009)과 비교해보면 극명해진다. 시종 관광객의 시선으로 제주를 담은 <여행>에서, 제주는 여느 관광홍보 동영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여행>은 한국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 만들기 프로젝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문화관광부의 관광진흥개발기금을 지원받아 제작한 영화이다. 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시즌 작 <도약선생>은 그나마 낫다.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대구를 배경으로 찍은 이 소품은 대구와 육상대회를 재치 있게 엮으며 밉지 않게 대회를 홍보한다.

최근 지방자치 단체가 지역 홍보를 위해 영화제작을 전폭 지원하는 경우가 꽤 있다.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하고 전주시청 등이 지원한 영화이다. 영화 속 전주는 한지 제지술을 비롯한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고장이자 고즈넉한 달빛이 비추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인위적이고 과도한 지역성이 강조된 탓에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삼투되지 못하였다. 반면 개봉을 앞둔 <위도>는 전북영화제작 인큐베이션 배급 지원작으로 실제 ‘위도’에서 올 로케이션 한 영화이지만, 어느 섬이었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지역성이 없는 실패한 지역영화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지역영화 프로젝트는 다른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전주영화제는 ‘로컬 시네마 전주’라는 섹션을 두고, 전주에서 지역 영화를 찍는 감독 작품을 소개한다. <숨>을 찍은 함경록 감독은 전주 우석대를 나와 전주에서 영화를 찍는다. <숨>도 감독이 전주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영화교육을 하다가, 지역 방송국이 다룬 전북의 실제 사건에서 착안해 만든 영화이다. 이처럼 외지 제작진에게 로케이션 장소를 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에서 영화를 찍는 감독들을 지원 육성하여, 이들이 굳이 서울로 가지 않고 지역 고유의 문제와 정서에 밀착한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지역 영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거대 수도권과 아무런 차별성 없이 모두 ‘지방’으로 불리는 비수도권으로 양분된 사회에서, 지역성은 말살되고 변방과 저개발의 지방성만 남는다. “서울 사람 맞다케도~”부터 “완전 다르거든~”까지, 수년째 사투리교정 개그가 흥하는 건 수도권 집중화로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탓이리라. ‘생각은 글로벌하게, 행동은 로컬하게’라는 말이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자치적 문화 활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