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 윤여일(수유너머R)

1.

지난주 금요일 수유너머R과 카페 별꼴의 오픈파티가 있었다.

수유너머R에게 그것은 삼선동 시대를 여는 소박한 자리였다. 그러나 다채로운 공연, 그보다 더 다양한 손님들의 면면은 새 출발에 큰 힘을 보태주셨다. 아니 ‘손님’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오신 많은 분들은 수유너머에서 활동했거나 활동하고 있으며 혹은 수유너머를 통해 우리와 연을 맺으신 분들이며, 앞으로 수유너머R의 미래를 지켜봐주실 분들이기 때문이다.

수유너머R은 수유너머에서 분화되어 나온 여러 그룹 가운데 하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존재는 과거형이다. 그러나 수유너머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래서 수유너머R의 새 출발을 소개하는 글을 써야 할 지금,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고 싶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이하 수유너머)라는 고유명의 사건을 분해해 거기서 수유너머R이 계승할 자원을 발굴하고픈 것이다.

따라서 되돌아보고자 할 때, 내게 중요한 것은 수유너머를 성공과 실패의 단일 서사로 회고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생명 과정을 분석하고 남겨진 흔적들을 살펴보며 지금을 살기 위한 물음들을 연마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수유너머의 과정과 흔적들을 매끄럽게 다듬거나 정돈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해의 지평을 재구성하고 싶다. 그러려면 수유너머의 경험을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되, 동시에 경험의 직접성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공유가능한 형태로 숙성시켜내야 할 것이다.

2.

수유너머는 “좋은 앎과 좋은 삶을 일치시킨다”를 모토로 삼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살면서도 도시의 중산층적 삶의 방식에 편입되지 않고 생활의 코뮨을 만들고, 제도권 바깥에서 지식의 향연을 열고자 했다. 지식이 향연이 되려면 분과의 벽을 넘고 스승과 제자의 위계관계를 극복하며 강렬한 문제의식을 생산해야 했다.

수유너머는 코뮨을 구성하고자 할 때 특정한 이념적 지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외부와의 접속’ ‘경계의 횡단’을 활동의 지향성으로 삼았다. 그 지향성이 이름의 절반인 ‘너머’에 담겨있다. ‘너머’란 넘어서다의 명사형이다. 그러나 그저 말에 그친다면, 유행하는 가벼운 말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넘어선다는 말은 대게 사변적인 넘어섬이며, 넘어선다는 사변 속에서 대상을 추상화하고 단순화하기 쉽다. 하지만 수유너머의 일상 속에서 ‘너머’란 지난한 것이었으며, ‘너머’를 위한 숱한 마찰들이 수유너머의 개성을 발효시켰다. 수유너머에게 ‘너머’란 문제의 극복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제기를 뜻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수유너머의 멤버가 되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상의 마찰과 문제제기 속에서 세포 깊숙이 잠든 열정을 깨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식을 상대하고 있지만 회색지대에서 나른함에 빠지고, 지식이 늘어간다는 것은 남의 관념을 기성복으로 삼아 더욱 여러 벌 껴입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때로 엄습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찾아 해매이다가 지친 눈에 현실의 색채는 흐릿하고 윤곽은 겹쳐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수유너머는 지식의 생산지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지식을 적용하고 쇄신시켜야 할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지식행위는 다시 생명력을 얻었다.

따라서 수유너머의 ‘공간’이란 고정된 건물이나 구획을 뜻한다기보다, 시간의 축적을 거쳐 이루어지는 활동의 배치이자 문제의 장으로서 동적이며, 개방적인 것이었다. 그야말로 ‘현장(現場)’이었던 것이다.

3.

수유너머는 분화되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고유명을 사용하는 단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체가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그처럼 유동하는 현장이 일단 성장을 멈추고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현장은 다른 형태로서 새로운 환경을 찾아나섰고, 수유너머R은 그 한 가지 운동체로서 출현했다.

새로운 운동체인 수유너머R은 이제 2년 가까운 시간을 축적하며 독자적 생존을 기도하고 있다. 수유너머R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규모를 조건으로 삼아 긴 토론을 이어가는 중이다. 별들이 모여 성좌를 이루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밝히고 함께 밀도 있게 토의하여 수유너머R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구성하려고 고투중이다.

이번 이사는 수유너머R이라는 현장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건이었다. 도시살이에서 이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수유너머에서는 가장 중요한 결정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정도의 규모에서 어떻게 공간을 배치하고, 어떤 활동으로 채워나갈 것인가, 월세는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 것인가, 어느 마을로 들어가 어떤 생활의 기반을 활용하고 누구와 만나기를 기대하는가, 연구원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을 고를 것인가 외부의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은 장소를 물색할 것인가.

이사를 논의하다보면 어떤 요소들을 고려하고 우선시하는지에 관해 서로가 지닌 생각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그 차이를 조절하려면 수유너머의 작은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래상을 함께 모색해야 했다.

4.

수유너머R이 이사장소를 물색할 때 새 공간에서 꼭 갖고 싶은 것은 주방이었다. 이사를 오기 전에는 밥을 해먹을 안정된 공간이 없었다. 비록 넓은 주방은 아니지만, 이제 주방은 자리를 잡았고 강의실을 식당으로 이용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식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 수유너머를 수유너머로 만든 한 가지는 함께 밥을 지어서 먹는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지식의 장과 일상의 공간을 결합하고, 연구원들이 생활의 하중을 나눠 갖는다는 의미였다. 또한 식당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가장 문턱이 낮은 공간이자, 가장 잡음이 많고, 구체적이고 첨예한 문제가 터져 나오며, 그 문제들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수유너머에서 밥을 먹으려면 적어도 세 가지 규칙을 따라야 했다. 첫째, 정기적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돌아가면서 밥을 짓는 것이다. 누구든 연구원이라면 한 달에 네 번 가량, 매회 대략 30인분 정도의 식사를 준비하곤 했다. 둘째,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접시에 남긴 것들은 빵으로 닦아 먹는다. 셋째, 육식을 하지 않는다. 생선이나 계란은 먹지만, 고기는 금지한다. 이러한 윤리적 지침들은 오랫동안 문제제기와 훈련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유너머R의 주방은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 수유너머의 윤리적 지침을 계승할 것인가. 함께 식사를 하는 생활양식과 거기서의 규칙은 오랜 실험과 훈련이 축적된 결과이기 때문에, 수유너머의 도달점을 수유너머R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면, 비교적 높은 곳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주방은 그다지 넓지 않고, 열 명 남짓한 회원이 일상적으로 주방을 유지하려면 생활의 하중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수유너머의 성과를 참조하면서 우리의 조건에 근거해 다시 방침을 정하고 윤리를 세우고 있다. 현재는 (엄밀하지는 않지만) 육식을 되도록 피하고, 매일 저녁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5.

공동식사는 한 가지 사례다. 그러나 지금의 단계에서는 다른 활동을 파고들어보아도 같은 지점으로 들어설 것이다. 수유너머R은 생명체라서 각각의 부분으로 나누기는 어렵지만, 사고를 정돈하기 위해 굳이 구분해 본다면 일상, 연구, 교육, 운동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수유너머R은 그 여러 활동들의 대명사다.

그러나 앞으로 수유너머R이 커진다면 내적 분화와 제도화가 진행될 것이다. 그렇듯 체계화를 거치다보면 ‘왜’보다는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선시되며, 근본적으로 묻기보다는 능률적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원형질에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문제를 파고드나 전체의 문제와 만날 수 있다. 즉 무엇을 왜 할 것인가. 이 원점의 물음을 에네르기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 물음이 딱딱하게 굳어가느냐에 코뮨의 생명력이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것 또한 수유너머에서 얻은 귀중한 유산이다.

6.

수유너머R은 앞으로의 삶의 형태를 모색하기 위해 당분간 토론을 거듭할 것이다. 나는 그 토론과정에서 어떠한 결론이 나오든 간에 그것이 함께 1세대가 되는 경험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현재 열 명 남짓한 멤버는 수유너머R의 시작과 함께하고 있으니 1세대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집단에서 1세대는 생물학적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1세대란 코뮨의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관찰하고 문제제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초발심은 점차 잊혀갈지 모른다. 이심전심의 시절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축적되고 규모가 커지다보면 수유너머R 또한 체계화될 것이다. 그 사실을 예감하며 우리는 지금 1세대가 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제기란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지적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문제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를 발명하여 현재를 전환기로 움켜쥐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책임감에서 비롯되지 않는 문제제기란 파국의 징후다. 진정한 문제제기는 자신의 무언가를 걸고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제출하여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팎의 복잡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집단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을 때 1세대가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7.

따라서 1세대는 반드시 수유너머R의 시작과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 참가한 사람도 1세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공통감각이 문제로 남는다. 현재 얼마 되지 않는 수유너머R의 멤버들만을 보더라도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공통감각의 균열이 있다. 수유너머R의 멤버들 가운데는 수유너머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수유너머라는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도 있으며, 수유너머의 유산을 계승하여 여전히 수유너머라는 이름으로 운동하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밖에도 각자의 인생경험과 고민의 내용도 다르다.

그런 차이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을 체감하는 방식이 갈라진다. 수유너머의 유산을 활용하고자 할 때도 그것은 문제로서 작용할 수 있다. 가령 수유너머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윤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생활상의 필요도 있었다. 초창기 수유너머는 공간이 비좁았다. 주방은 따로 있지 않았다. 함께 식사를 하면 화장실에서 식기를 닦아야 했다. 그런데 육식을 하면 접시에 기름기가 남고 각자가 식기를 닦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한 식당이 따로 없어서 식사를 한 다음에는 그곳에서 바로 세미나를 해야 했는데, 육식을 하면 냄새가 남았다. 물론 전원이 참가하는 세미나에서 자본주의화된 육식문화에 관해 공부하며 육식금지를 결정하였지만, 그러한 결정에는 생활상의 요구가 크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공유하지 않은 멤버들과 앞으로 채식을 시도하려면 감각의 조율이 필요할지 모른다.

한편으로 자칫 수유너머의 회원이었던 사람들이 수유너머의 유산을 수유너머R에 적용하려고 할 경우, 그들의 경험은 자산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권위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앞으로 수유너머R에서 어떤 실험을 하는 경우, 수유너머의 회원이었던 사람들은 기시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에 해보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한 기시감은 피로감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에 길을 개척할 때는 실패로부터도 배우고, 객관적인 환경의 열악함을 주체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면, 지금은 되도록 실패를 피해가려는 심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수유너머가 지나간 길을 되물으며 진정 수유너머의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기도 하다.

8.

우리는 긴 토론을 앞두고 있다. 경험이 다른 우리는 연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서로 간의 참가동기, 활동에 부여하는 의미, 시시각각 움직이는 과거 체험의 환기작용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 차이들 위에서 공통감각을 형성해야 한다.

그때의 공통감각이란 감각의 균질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별적 차이를 뭉뚱그리거나 굴곡들을 고르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공통감각의 형성이란 서로의 다른 생각과 실감의 방식을 바로 일치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생각과 감각의 차이로부터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문제의식의 지평을 열어낸다는 의미다.

공통감각을 형성하려면 각자의 생각과 감각은 입장이 다른 타인의 그것과 맺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그것은 사상적인 가공을 거쳐야 한다. 즉 각자의 생각과 감각이 그 상태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분해가능하고 성장가능한 요소를 끄집어내 공유가능하도록 연마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의 용법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분석 대상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분석대상으로 삼는 지적 관계에 들어서야 한다. 바깥의 대상에 관해 말할 때면 추상적이고 과감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우리 스스로를 조명할 때면 어떠한 정신적인 매개도 거치지 않고 직접적이며 날 것 그대로의 언어밖에 쓸 수 없다면, 그리하여 그 언어가 너무도 초라하다면 우리의 지(知)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론의 과정에서 우리의 지는 자기검증을 거쳐야 한다. 바깥의 지식은 자신의 삶을 통과하고 나서야 진정 자신의 정신의 일부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수유너머가 알려준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풍부한 공통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한 시차(視差)를 만들어내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타인의 시점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공통감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토론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왜 하려는가를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일상의 문제에 관해서는 자연스럽게 결정의 윤곽이 나올 것이다.

9.

글을 마치기 전에 적고 싶은 것이 있다. 앞으로 수유너머R의 내부의 활동방침은 지금의 멤버들이 결정하겠지만, 수유너머는 이미 역사적 자산과 아울러 채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채무라고 말한다면 적당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갚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유너머는 이곳을 거쳐 간 여러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10년 가까운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심과 애정을 갖는 외부의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수유너머라고 불렀지만, 그 친구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도 했다. 수유너머는 우리의 삶의 터전인 동시에 친구들을 만나는 매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수유너머는 사회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수유너머에 있었을 때 나는 우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수유너머는 지식공동체, 밥상공동체라고 소개해왔다. 지금 그런 말은 수유너머R에게 얼마만큼 진실인가. 지금 수유너머R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지금의 우리를 더욱 단련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전과는 다른 우정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응답 1개

  1. […] [동시대반시대]무엇을 계승할 것인가_윤여일(수유너머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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