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코뮨의 내부는 없다

- 박정수(수유너머R)

지난주 목요일(13일) 쥐 그래피티 사건 대법원 판결이 있었습니다.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통지서에 써 있었지만 대법정 구경 좀 하려고 굳이 갔습니다. 뇌가 썩은 걸까요? 대법원 건물이 꼭 남근처럼 생겼습니다. 공항 게이트보다 철저한 몸수색을 하고서야 2층 1호 법정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2층에는 화장실이 없답니다. 대법정의 신성함을 화장실 냄새로 훼손할 수 없다는 발상이 참 놀랍습니다. 방청객들 각 잡는 것도 어이가 없습니다. 다리 꼬고 앉지 마라, 팔짱 끼지 마라, 웃지 마라, 잡담 하지 마라… 참 대단한 권위 나셨습니다.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대법관들이 좌정하고 판결이 시작됐습니다. 판결 방식도 가관입니다. 네 명이 돌아가면서 50여개씩 사건번호, 상고인, 피상고인, 판결내용(기각, 환송)을 일사천리로 읊어대는 겁니다. 민사사건 판결 때는 그나마 죄명(가령, 손해배상, 임대차계약위반)이라도 언급했는데, 형사사건 판결 때는 그마저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판결이유는 고사하고 도대체 무슨 사건에 대한 어떤 내용의 상고인지 알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저마다 곡진한 사연과 사회적 관심이 있을 터이지만 화장실도 없는 천상의 법관들은 다만 판결할 뿐 세속에 개입하기는 싫은가 봅니다. 중간에 한 중년 여성이 자기 판결에 오열을 터뜨리다 끌려 나가고서야 열거된 사건번호에서 인간사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1도11074 상고인 피고 박정수. 기각” 40여분 기다려 1초 걸린 판결을 들었습니다. 부쳐준다는 판결문이 아직 안와서 기각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저토록 권위를 신성시하는 대법원이 감히 정부와 ‘가카’의 권위에 똥칠을 한 쥐 그림을 용서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1년 만에 쥐 그래피티 사건은 종결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팔자에 없는 예술가 노릇도 해 봤고 매스컴도 많이 탔습니다. 유명한 분들이나 활동가들 만날 때 “쥐그림 그린 박정수입니다” 라고, 소개하기도 편하고 안면 트기도 수월해졌습니다. 하지만 ‘수유너머R’에게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준비와 실행은 코뮨적이었지만 제가 체포되고 나서는 우리 안에 코뮨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법권력에 맞서 유쾌한 그라피티를 계속해야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코뮨이라면 그 순간에도 법의 공포를 날려버릴 공통의 정서가 생성되었을 텐데, 법의 그물망 속에서 개별화된 우리는 법적 대응에만 몰두했습니다. 법이 저를 피고로 호명하면서, 언론이 저 개인을 조명하면서, 저는 우리를 대의하게 되었습니다. 코뮨이 사건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저 혼자 사건을 대의해 버린 것입니다. 그 사이 그래피티를 함께 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 멀어져 갔습니다. 이런 게 법의 위력입니다. 구속과 처벌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법(대의)의 논리 안으로 포획하는 것입니다. 코뮨은 법의 그 개별화 하는 힘을 저지하는 활동과 정서가 생성되는 순간 비로소 우리 안에 있다 할 것입니다.

이사를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사비용의 부담과 과중한 노동, 사적인 욕망들이 코뮨의 내부를 증발시키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함께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있다는 게, 함께 있고자 의지하는 게 기적 같았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념이나 대의 때문이 아닙니다. 코뮨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 때문도 아닙니다. 마치 코뮨이 유일한 생존 수단인 것처럼 우리는 근거 없이 함께 있고 목적 없이 함께 있으려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코뮨은 ‘정서’를 생산하는 기계입니다. 지금 우리 안의 코뮨은 삶의 절실함과 동료에 대한 사소한 기쁨, 가령, 함께 밥을 먹는 데서,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주는 데서, 자기 삶을 방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 거라는 믿음에서 오는 그런 기쁨 속에 찰나로 존재합니다.

수유너머R 시즌 2 삼선동 시대는 ‘별꼴’ 카페와 함께 합니다. 코뮨의 내부가 공고하지 않은 채 또 다른 외부를 갖는 게 겁나기도 합니다. 사회적 기업에 요구되는 행정업무와 이윤에의 갈망이 코뮨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우리의 참담한 알몸을, 절망의 바닥을 봐 온 경험이 의외의 용기를 갖게 합니다. 어차피 지켜야 할 코뮨의 내부는 없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매순간의 치열함과 그 속에서의 기쁨이 우리를 코뮨이게 한다는 걸 알기에 외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년 동안 별의 별꼴 실험과 실패를 겪어온 수유너머R이 문화예술복합카페 ‘별꼴’과 함께할 삼선동 시대, 앞으로 별의 별꼴 좌충우돌 속에서 번뜩번뜩 코뮨이 생겨나리라 믿습니다. 이번호와 다음호 2주에 걸쳐 수유너머R과 ‘별꼴’ 카페의 미래를 점쳐보는 기획을 싣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를 사적으로 전용한다고 생각지 마시고 이 특이한 사례 속에서 여러분 모두의 과거와 미래를 읽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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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편집자의말] 87호. 코뮨의 내부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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