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13화-십일월의 빈 들

- 배문희

길은 어느덧 경기도를 벗어나 충청남도 아산에 접어들었다. 시야를 가로막던 콘크리트 벽이 사라지자 추수를 끝낸 빈 들이 양 옆으로 펼쳐졌다. 길섶에 코스모스 한 송이 피어있을 법도 하건만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바람이 불어 그나마 붙어 있던 남은 잎들마저 약탈자처럼 훑어가고 밭두렁에서 벗겨낸 검은 비닐들이 공중에 우우 떠다녔다. 들판 위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수확이 끝난 십일월의 빈 들은 이런 모습이구나. 이건 마치 연극이 끝난 후에 텅 빈 객석 같은 꼴이로군. 나는 왠지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봄에 하는 여행이었더라면 아기 발바닥처럼 보드라운 바람을 가르며 색색의 꽃들을 질리도록 구경할 수 있을 텐데. 여름이라면 또 어땠을까. 눈이 시리도록 푸른 세상을 마음껏 달릴 수 있을 텐데. 밤이면 초원 위에 누워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볼 수도 있을 테구.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논이며 알록달록한 나뭇잎이며 탐스러운 과실이며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었을 텐데. 차라리 겨울에 하는 여행이라면 하얀 눈 덮인 세상을 달릴 수 있었을 텐데.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내는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상징성도 얻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십일월에 떠나는 여행은 뭔가 알맹이가 빠진 빈 껍데기 같은 느낌이었다. 우선 십일월이라는 달 자체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가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겨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들판 같다고나 할까. 그저 가을에서 겨울에로 더욱 황량하고 메말라지기 위해 고여 있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왜 하필 다른 계절도 아닌 십일월을 택해야 했던 것인가. 울적한 마음에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쑥 빠져 버렸다.

이제 해도 저물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픈데, 가도 가도 끝없는 빈 들판만 이어질 뿐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앞섰다. 이대로 묵을 곳을 찾지 못하고 캄캄해지면 어떡하나. 더구나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일과를 마치기로 부모님과 굳게 약속을 한 터였다. 나는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터질 듯이 아프고 엉덩이가 욱신거려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모모. 힘 내. 조금만 더 가면 우리가 묵을 수 있는 곳이 나올 거야.”

나보다 더 힘들 텐데도 풀여치는 내가 지치지 않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풀여치의 노래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노랫소리에 맞춰 더욱 힘껏 페달을 밟았다.

“모모, 저기 불빛이 보여? 이제 다 왔어.”

풀여치가 가리키는 곳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양옥집을 개조해서 일층은 레스토랑을, 이층과 삼층은 여관을 운영하는 아담한 건물이었다. 풀여치와 나는 하얀 자갈이 깔린 뜰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설마 그 자전거를 타고 도시에서 오신 건 아니시겠죠?”

주인 아저씨는 나와 풀여치를 번갈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네. 맞아요.”

나는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맙소사. 그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주인 아저씨는 카운터 안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기까지 했다.

“여보. 이리 나와 봐. 이 손님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에서 왔대.”

이윽고 나타난 주인 아줌마는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듯이 나와 풀여치를 쳐다보았다.

“정말 대단하시네. 부모님이 허락은 하셨수?”

“네. 부모님 허락 받고 왔어요.”

“허락해준 부모님이 더 대단하구먼.”

나는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의 여행길에서 나와 풀여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때론 사람들의 호기심 덕분에 따뜻한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외롭게 한 것도 바로 그것-호기심이었다. 나는 당신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일뿐인데. 조금 유별난 것이 있다면 나이는 스물 한 살이지만 아직도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 풀여치라는 자전거와 친구라는 것뿐 인데. 사람들의 호기심에는 나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늘 깔려 있었다.

어쨌든 주인 아줌마의 특별한 호기심 덕분에 식사비와 숙박비를 할인된 가격에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나의 친구 풀여치와 헤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함께 고생한 탓인지 잠깐 동안의 이별도 무척 아쉬웠다. 나와 풀여치는 안타까운 눈빛을 주고 받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 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몸이 녹아 흐물흐물해질 것 같았는데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서 자던 밤이 생각났다. 그땐 왜 그렇게 서럽고 무서웠던지. 지금 이 순간이 꼭 그때 같았다. 나는 갑자기 서러움에 복받쳐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야.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이 정도도 대단한 거라구. 나는 내일 반드시 돌아갈 거야. 돌아가고 말거라구. 그리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렇게 여행 첫날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풀여치는 일층 계단 앞에서, 나는 삼층 방에서.

지금도 궁금한 건 그날 밤 우리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꿈 속에서도 함께 달리고 있었을까. 어쩜 무지개 위를 달리다 미끄러져 넘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무릎에 생긴 무지개빛 멍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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