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셀프구원

- 은유

사실 어떤 일을 겪기 전까지는 자기도 자기자신을 잘 모른다. 가령, 사이좋은 부부가 있다. 십년 동안 부부싸움 일회도 없이 그림처럼 살았다. 남자의 엄마가 치매로 쓰러졌다. 여자는 그다지 헌신하지 않는다. 남자는 실망한다. 당신 착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어? 다툼이 발생한다. 뭐, ‘아침마당’ 소재거리 같은 이야기지만 삶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주위를 보아도 결혼을 통해서 ‘인간의 바닥’을 확인했다는 경우는 흔하다. 바닥을 본 다음, 그것을 깊이로 만드느냐 추락하느냐는 개인의 ‘능력’이다. 그러니 한 사람에게 정해진 본성은 없는 거다. 세상과 부딪히고 사람과 부대끼고 하나의 사건을 통과할 때마다 인격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연구실이 이사했다. 연구실 이사 그 자체는 대수롭지 않다. 이사 과정을 통해 나를, 나와 동료를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나는 삼선동 이사를 반대했다. 지역적으로 낯설고 멀다는 것, 장애인 극단 ‘판’ 카페와 동거한다는 것. 두 가지가 싫었다. 우리만의 독립적인 공간에서 자력으로 오붓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카페와의 한집살림으로 연구실 행정이 복잡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연구실이 우리집과 가까운 홍대 근처로 이사해서 더 자주 더 많은 공부를 하길 바랐다. 동료들끼리 수차례 논의를 거쳤다. 연구실은 어떤 안건에 대해 구성원이 한 표씩 갖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람이 동료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린다. 나는 삶을 다 걸고 말하지 못했고 ‘삼선동파’의 권력의지에 밀려버렸다.

웬 삼선동인가. 온통 낯설고 의문스러웠다. 아무 연고도 없는 거기로 왜 가야하는가. 마을버스-지하철 2호선-4호선의 코스. 택시요금 2만원. 심리적 거리가 평양보다 멀었다. 예전에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거리가 먼 곳은 마다했던 터다. 길에다 쏟는 시간이 아까웠고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어찌 다닐까 막막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서 ‘입사’했더니 본사가 이전해버린 꼴이라며 투덜거렸다. 일도 그만두고 공부 좀 해보겠다고 연구실에 들어갔더니 쥐 사건이 일어나고 이사까지 가야하고. 일상 잡다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스트레스가 쌓였다. 공부는 이전보다 더 못하고 잡무만 처리하는 듯한 억울한 느낌이 지배했다. 세속을 피해 찾아간 곳에서 또 세속이 펼쳐질 줄이야, 좌절했다.

불만과 푸념의 매캐한 공기가 몸뚱이 안에 자욱해질 즈음, 기존의 나를 강하게 고집하는 내 모습이 드러났다. 하나의 시험대가 주어졌음을 알아챘다. 내 신체가 거부하는 그곳, 불편함을 느끼는 대상에 바로 나를 성장시킬 무언가가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금단의 땅에서 열매를 구하라.’ 유목은 나로부터 떠나는 능력이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은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동안 밑줄 그어두었던 말들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앎으로 삶을 뚫어야하는 상황이다. 불현 듯 용기가 났다. 원한감정을 털어버리자. 나를 개방하자. 내 살 곳은 속세다. 사람과 사건이 넘쳐나는 이 대지가 나의 삶의 절대 조건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내 삶은 적어도 그랬다. 근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뭔가 늘 못마땅하고 모자란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치를 들고 정자를 짓고 물길도 트고, 그렇게 땀 흘리면서 친구도 만나고 하루가 가고 한 시절이 갔으니 말이다. 이마 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에서 느끼는 자유. 지옥을 느끼던 그곳이 천국으로 변하기도 하는 경험은 매우 짜릿하다. 지나고 보니 나를 키운 8할은 우연,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밥 짓고 아이 키우고 두세 시간 출퇴근 기분 내면서 살아보고 싶어졌다. 자발적 오지발령! 동료들에게 삼선동 삼정빌딩에서 우리 삼성전자 직원보다 더 열심히 살아보자며 웃었다. 즐겁게 이사했고 부엌도 정리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개운하다. 정이 생겨서 다니는 게 아니라 다니다 보면 정이 들겠지 생각한다. 삼선동에 놓인 나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이것이 셀프구원.

응답 3개

  1. […] 87호. 코뮨의 내부는 없다 [동시대반시대]셀프구원_은유 [동시대반시대]코뮨의 내부는 […]

  2. 혜진말하길

    임상 연구하러 취직했다 이런 저런 잡무에 오늘도 야근 하며 이 글을 읽습니다.

    은유 님의 글을 보니 힘이 나네요~~이 곳이 나의 삶의 조건이니….

  3. 김혜영말하길

    재미 앤 감동 먹고 갑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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