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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13-일국 민주주의와 세계 민주주의

- 고병권(수유너머R)

지난 15일 ‘지구행동의 날’에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행진을 했다. 지난 5일 행진도 그 정도의 수가 모였는데 열흘이 지난 뒤 역시 비슷한 규모의 사람들이 모인 셈이다. 날씨는 계속 차가워지고 있지만 열기는 유지되고 있다. 뉴욕 시민들도 이번 점거에 강력한 지지를 표하고 있다. 최근 퀴니피액(Quinnipiac)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10월 17일 발표)에 따르면, 무려 뉴욕 유권자의 87%가 시위대가 원하는 한 점거를 계속 이어가도 좋다고 답했으며, 67%는 시위대의 목소리에 공감한다고 했다. 뉴욕시 당국이 리버티 스퀘어에서 점거자들을 쉽게 몰아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위대 역시 폴리스라인을 넘지 않으면서 폭력 시위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일부 강경파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떻든 전체 분위기는 사람들의 참여를 늘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엊그제는 가족 단위의 점거 참여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자는 제안도 있었다. 숨고르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떻든 지금은 상황이 조금 안정되어 보인다.

타임스퀘어에 모인 사람들(10월 15일) (사진출처: AP)

타임스퀘어에 모인 사람들(10월 15일) (사진출처: AP)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이 딱히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위기 상황이 미국이라는 일국적 조건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 민주주의’의 조건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난 8월 초에 나는 <위클리수유너머>의 편집자말(78호)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미국의 민주주의’의 조건 변화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면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세 가지 우호적인 조건들이 나온다. 첫 번째는 미국이 대륙의 다른 국가들처럼 다른 나라의 영향을 곧바로 받지 않을 만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미국에는 파리 같은 대도시가 없어서 발작적인 형태의 봉기가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미국에 온 이민자들, 특히 동북부에 이민을 온 사람들이 민주주의 습속에 익숙한 선진국(영국)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편집자말(78호)에 썼던 것처럼 이 세 조건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은 고립되어 있기는커녕 세계의 모든 문제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대도시가 없기는커녕 세계 최대의 대도시들을 가지고 있고, 이민자들은 중남미 등 제3세계에서 밀려오고 있다. 물론 이런 조건의 변화가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에서 민주주의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제와는 ‘다른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세 가지 조건의 변화에서 예상했는데, 1) 미국은 세계와 완전히 엮여 있는 나라이기에 세계 상황이 미국 상황을 규정지을 수 있고, 2) 미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대도시일 것이라는 점, 그리고 3) 미국 사회 인구 구성 변화, 특히 이주자들이 미국 민주주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의 변화는 알고 보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세계 대도시들이 비슷하게 ‘새로운 민주주의’ 문제에 직면할 것이고, 결국 ‘미국 민주주의’는 곧바로 ‘세계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8월 초에 쓴 글이었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적어도 앞의 두 가지 문제, 즉 세계 상황이 미국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지만)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도시들이 새로운 민주화 투쟁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점은 그럭저럭 맞아 들어간다. 다만 이주자들의 문제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이번 투쟁에서 이주자들의 투쟁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신 세계 곳곳에서 미국과 동일한 점거가 일어나고 있고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는 시위대가 국경을 넘어가는 문제가 발생했다.

벨기에 브뤼셀로 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10월 15일)(사진출처:CNBC.com)

벨기에 브뤼셀로 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10월 15일)(사진출처:CNBC.com)

결국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축인 ‘국민=국가’의 부분적 해체가 두 방향에서 일어나는 셈인데, 하나는 공간적인 것으로 국민국가 내부로 들어간 ‘비국민’의 존재, 특히 ‘난민’이나 ‘이주자’의 유입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고(특히 유럽과 북미에서), 다른 하나는 공간적 이동 없이 ‘탈국민화’하는 현상, 즉 ‘세계 민중’으로의 관념적 전화가능성이 일부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난 15일의 지구행동의 날에서는 후자의 면모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물론 전자로부터 생겨난 갈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끔찍한 학살도 그렇고 이민자들의 유입은 유럽과 북미의 최대 선거 이슈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와 후자는 상호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지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로 해당지역의 많은 인구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이것이 이탈리아 등 유럽의 극우보수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동시에 중동과 아프리카의 봄은 현재 미국의 가을을 낳은 도화선이기도 했다.)
지난 15일 세계의 천 개가 넘는 도시들에서 점거(지지)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시위의 의미는 그 투쟁의 규모만이 아니라 그 대상에서도 새로운 측면이 있다. 이들이 스스로를 ‘99%’라고 부를 때 그것은 특정 국민을 지칭하는 게 아니며, 이들이 항의하는 대상은 특정 정부나 기업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이 1천 700km라는 먼 길을 걸어 벨기에의 브뤼셀까지 갔을 때, 많은 다른 국적을 가진 이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G20과 같은 글로벌 거버넌스가 만들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에 대한 저항도 세계성, 지구성을 띄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금융의 위기가 지금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로 번지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그쪽에서 대중들의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그런데 유럽 금융의 위기는 실시간으로 미국 금융의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월스트리트 점거’의 진행과도 맞물려 있다. 사람들이 ‘여행’이나 ‘비즈니스’가 아닌 ‘투쟁’ 과정에서 ‘세계’를 감각하고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사회주의의 역사적 전통에는 ‘일국 혁명’과 ‘세계 혁명’에 대한 중요한 논쟁이 있다. 논쟁의 한 축은 ‘세계혁명’이 ‘일국 혁명’의 목표인가 조건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둘러싸고 이 문제는 첨예한 현실적 쟁점이 되었다. 세계 혁명 없이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가.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질문도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생기면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앞서 나는 토크빌이 말한 조건 중 첫 번째 것의 변경을 언급하면서 미국 민주주의는 세계 민주주의의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미국이 세계를 떠맡음과 동시에 미국 민주주의 문제와 세계 민주주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미국 민주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현재의 지위 때문에 그 상징성이 큰 것뿐이고 사실상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다 이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각 나라들은 미국을 경험하고 있다기보다(아니 미국을 경험할 때조차) ‘세계’, 즉 ‘지구화(globalization)’라고 하는 역사적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10월 15일)(사진 출처: http://www.vosizneias.com)

이탈리아 로마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10월 15일)(사진 출처: http://www.vosizneias.com)

꽤 오랫동안 ‘세계’의 이미지는 ‘국제사회’, 다시 말해 ‘국민국가들의 집합체’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는 ‘국민주의(nationalism)’의 이면이다(‘네이션’ 개념의 탄생은 다른 ‘네이션’과의 마주침, 사카이(N. Sakai)의 표현을 빌면, 네이션들의 ‘상호형상화(cofiguration)’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국제주의와 국민주의는 서로를 전제하는 동일한 역사적 생성물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는 ‘국민주의’와 경쟁하거나 그것으로 환수되지 않는 여러 요소들로서 나타나고 있다. ‘초국민국가적’ 현상이 이번 점거에서도 간혹 엿보이고 있다. 이 ‘초과’ 현상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국민국가를 넘어서도 행사되지만, ‘난민’이나 ‘이민자’처럼 국민국가 하위 영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초국적 기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저항의 새로운 ‘인터내셔널(International)’고 나타나기도 한다(물론 이때의 ‘인터내셔널’은 맑스의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네이션의 해체를 통한 연대’라는 점에서 네이션을 전제하는 국제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지난 10월 15일 ‘지구를 점거하라’는 요구가 세계에서 일정한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는 중이다.

*어제 그리스에서 강력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현재의 월스트리트의 소강상태가 깨진다면 그것은 유럽에서 온 충격에서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미국 금융에 타격을 줄 때 미국 정부가 월스트리트에 다시 구제금융을 제공할 수 있을까. 연방정부의 재정 여력도 없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점거’가 만들어낸 환경 변화 때문에 그것은 엄청난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재정적 위험보다는 정치적 위험이 더 커 보인다. 맑스는 ‘갈릴리 수탉’의 울음소리가 독일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처럼 말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면 유럽의 비명소리가 미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가능성도 있다. 당분간은 유럽을 주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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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3-일국 민주주의와 세계 민주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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