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4-탐욕과 금욕 -욕망의 거번먼트

- 고병권(수유너머R)

1. 분명한 사실 -점거는 뉴욕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제 월스트리트 점거도 한 달이 지났다. 19일, 공원을 다시 찾았다. 이틀 연속 차가운 비가 세차게 내렸다. 주코티 공원에서 노숙은 허용되지만 텐트를 설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며칠 전에는 간단한 치료가 이루어지는 의무(醫務) 공간만이라도 텐트를 치려고 했으나 경찰의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그나저나 침낭만으로 차가운 날씨를 견딘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잘 버티고 있다. 하지만 겨울이 오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틀 연속 바람과 비가 거셌다.(10월 19일)

이틀 연속 바람과 비가 거셌다.(10월 19일)

비가 쏟아지자 대형우산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10월 19일)

비가 쏟아지자 대형우산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10월 19일)


내가 찾은 시간에도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어떻게 지난 밤들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티셔츠 뒷면에 ‘Occupy Maine’이라는 문구를 적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슴에는 월스트리트, 보스턴, 포틀랜드(메인)가 차례로 적혀 있었다. 이들은 메인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메인주의 연준 건물 앞에서 6-70명이 점거를 하고 있는데, 점거를 조직하는 방법도 배우고 어떤 요구들을 내걸고 있는지도 알아보기 위해 여기 왔다고 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찬비를 그대로 맞으며 밤을 지새운 모양이다.

메인주에서 ‘월스트리트 점거’를 배우러 온 화이티(Whitey)

메인주에서 ‘월스트리트 점거’를 배우러 온 화이티(Whitey)

이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보스턴에도 들렸는데 거기는 수백 명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사실 점거를 시작한 월스트리트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았다. 그 덕분에 여기 메시지가 더 많이 보도되고 경찰도 쉽게 단속하지 않는 면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뉴욕은 단지 시작점일 뿐이며, 현재 미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점거들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실험들이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뉴욕만을 주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뉴욕을 고립시키는 것이고 이번 점거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는 것임에 틀림없다.
메인주에서 온 화이티는 겸손하게 우리는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에게 뭔가를 배우러 왔다’고 했지만 그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월스트리트 점거자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서로 배워야 한다’는 것.

2. 어느 단식 투쟁가

리버티 스퀘어를 돌다 ‘월스트리트 점거를 지지하는 단식투쟁’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리자이 이스켄더(Recai Iskender)를 만났다. 그는 터키 민주화 운동가였다. 현재 단식 5일째이고 앞으로 이틀을 더 할 거라고 했다. 리버티 스퀘어에서는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는 것도, 명상과 요가를 하는 것도 모두 일종의 시위이다. 하지만 어떻든 단식 투쟁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왜 이 방법을 택했는지 리자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자립(independence)의 출발점입니다. 월가를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 나 스스로를 먼저 깨끗하게 만드는 거죠. 일종의 자기 거번먼트(self-governmen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식 5일째인 리자이

단식 5일째인 리자이


리자이는 무슨 한이 맺힌 사람처럼 말을 마구 쏟아냈다. “여기 점거자들을 포함해서 미국인들 싸우는 걸 보면 무슨 피크닉 온 것 같아요. 무슨 잔치를 벌이듯 먹고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피상적(superficial)이에요. 싸움에 어떤 절실함이 보이질 않아요. (주방을 가리키며) 저기 좀 보세요. 월스트리트 1%의 탐욕(greed)에 반대한다면서 여기서 먹고 마시는 걸 보면 도무지 이런 식으로 탐욕을 반대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에요.”
그가 거침없이 쏟아내는 이야기에는 솔깃한 대목이 많았다. 자기 거번먼트, 자립,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탐욕을 먼저 몰아내는 것 등등. 그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면서 내가 한마디 보탰다. “세금이나 일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금의 욕망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월스트리트에 앉은 인물을 바꿀 수는 있어도 월스트리트를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자 그가 무슨 동지를 만난 듯 눈을 반짝이며 여기서 받은 ‘설움’을 토해냈다. “여기 점거자들한테 가면 나를 완전이 아웃사이더 취급해요. 당신은 너무 심각하다고(serious). CBS랑 CNN 사람들, 아마 여기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취재했을 거예요. 그런데 나랑은 인터뷰를 하지 않아요.”
그의 이야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점거자들이 그에 우려하는 대목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며 ‘너무 심각하다’고 말한 것은 운동의 금욕주의에 대한 완곡한 비판일 것이다. 경직된 지사적 운동은 경찰의 방벽만큼이나 대중의 참여를 가로막는 방벽이 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운동 방식의 경직성은 운동 이념의 경직성과 나란히 가기 마련이다. 현재의 점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의 금욕주의가 현재의 운동을 미래를 위한 어떤 ‘희생’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월스트리트 점거는 미래를 향한 현재의 희생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살고 싶은 삶을 현재로 당기는 과정, 다시 말해 현재를 미래로서 향유하려는 운동처럼 보인다.

3. 욕망의 해방과 금욕

‘더 이상 참지 말고 이제 요구하라’고 외치는 젊은이와 ‘탐욕에 반대한다면 먼저 네 욕망을 비워라’고 말하는 리자이. 월스트리트의 ‘탐욕’에 반대하는 두 개의 목소리에서 ‘욕망과 운동’, ‘욕망과 해방’의 문제를 생각해본다.

일단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곧바로 대비되는 것은 가난한 대중들에게 강요된 ‘금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금욕은 욕망이라기보다는 현실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이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동안 가난한 이들은 채무 때문에 집과 자동차, 나아가 공부에 대한 욕구마저 접어야 했다. 그런데 ‘강요된’ 금욕이라고 했지만 어떤 때 가난한 이들의 금욕은 자발성을 띠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 대중들은 오랫동안 월스트리트를 꿈꾸어왔다. 아메리칸 드림, 즉 월스트리트에 이르기 위해 상당수 대중들이 금욕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현실만 차지한 게 아니라 꿈까지 차지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추악한 면모가 보호받을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추악함에 대한 고발이 없지 않았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 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금융위기부터 이번 점거에 이르기까지, 월스트리트의 이미지는 완전히 훼손되었다. 사람들은 월스트리트에서 모든 것을 다 차지하려는 ‘1%’의 탐욕을 보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천국의 계급성을 본 것이다. 그곳은 내가 도달해야 할 곳이라기보다 나에게 빼앗은 부가 도달한 곳이라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천국이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부를 둘러싼 ‘계급전쟁’의 강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꿈에서 깨어나라(Wake Up)’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지난 리포트(12호)에서 전한 토론회 장면에서, 한 청중이 ‘우리가 요구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다른 청중은 왜 미리 ‘당신의 욕구, 당신의 민주주의를 제한하느냐’고 화를 냈었다. 요구를 자제하지 말라고 하는 것. 월스트리트 점거는 한편으로 그동안 억눌려왔던 욕망들, 그동안 미래로 유예시켜왔던 욕망들을 분출시키는 장처럼 보인다.
그런데 금욕주의자는 여기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월스트리트 점거를 바라보는 리자이의 시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던졌다고 생각한다. 내 욕망을 분출하기 앞서 내 욕망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어떻게 현실을 부정하는 권력의지, ‘저 세계’에 대한 추구 속에서 ‘이 세계’를 절하하는 권력의지와 깊이 관계하고 있는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강자를 육성하기 위해 한 문화가 그 성원들에게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 강도 높은 금욕을 요구하는지도 말했다. 사실 맑스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는 노동은 기계에 맡기고 모두가 자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사회라기보다는, 노동의 의미가 바뀌는 사회, 그것이 타인을 위한 착취 과정이 아니라 자기 능력의 발전과 성숙을 위한 단련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사회에 가깝다(『요강』). 자본주의적 욕망의 결핍을 채우기보다 자본주의적 결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욕망을 충족시키기보다 욕망을 교체하는 것의 중요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서구의 기독교적 전통에서 ‘금욕주의’는 ‘저 세계’에 대한 지향 속에서 ‘이 세계’의 욕망을 억압하고(현재의 고난을 저 세계로의 구원에 대한 ‘과정’ 내지 ‘징표’로 간주한다), 신과 신을 대변하는 성직자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잘 지적한 것처럼 고대 서구 사회(비서구 사회는 물론이고)에는 비기독교적 금욕주의 또한 존재해왔다. 가령 견유주의나 스토아주의 사람들은 다양한 금욕의 기술들을 발전시켜왔다. 기독교적 구원에서 금욕주의가 구원을 위해 감내해야 할 ‘복종’, ‘부자유’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고대 금욕주의는 유혹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갖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other world)’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다른 삶(other life)’에 대한 지향이었다. 권력자와 부자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내미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런 권력을 탐내지도 않고 그런 흥청망청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그런 삶에서 ‘노예적인 것’을 보는 것.
한국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소위 ‘욕망이론’이 쏟아져 나오면서 금욕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한 적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욕망의 억압’과 동의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욕주의를 적으로 설정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아니 오히려 상당히 부합하는 ‘욕망의 해방’만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다. 욕망의 해방이란 그것의 양적인 분출이 아니라 질적인 전화이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기보다 현재와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어제(21일) 뉴욕시립대학원에서 일본의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원전사태 이후 일본’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어느 미국인이 물었다. “원전사태가 큰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원전 없이 현재의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자 발표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고. 일본인들은 지금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지금 원전을 폐쇄시키고 있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대중들이라고. 정말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원전이 없어 전기를 마음대로 쓸 없는 상황이 아니라고. 뭐 어떠냐고. 밤에 조금 어두우면. 우리는 이번에 깨달았다고. 원전 없이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정말 걱정인 것은 앞으로 2-30년 동안, 숨쉬는 공기와 마시는 물, 먹는 음식 등을 통해 내적인 방사능노출(internal exposure)을 경험할 것이고, ‘암’이라든가 각종 질병에 우리와 아이들이 시달려야 하는 것, 과거 원전을 용인함으로써, 그러니까 60년 전 반원전 싸움에서 우리가 패배하면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이번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그의 말은 번개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원전 없이 살 수 있냐’는 물음에 ‘살 수 있다’고, ‘지금 살고 있다’고 당당하게 내뱉은 그의 말이 갖는 힘을 느꼈다. 그가 방사능 노출이라는 지옥에서 건져 올린 금욕적 외침은 정말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강력한 선언이며, 현재의 삶에서 존재를 정당화해온 원전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전쟁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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