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를 보고, 역지사지의 윤리를 생각하다.

- 황진미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가족극이자 법정영화이다. 첫 장면부터 이혼문제로 판사 앞에 선 부부의 장면이다. 딸의 장래를 위해 이란을 떠나 서구로 가고 싶은 아내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갈수 없다는 남편. 요약하자면 간단하지만, 영화가 이를 통해 제시하는 것은 두 사람의 감정적 골이다. 안다. 누구나 소모적 싸움을 해보았기에, 말꼬리 잡으며 서로를 비난하는 게 어떤 것인지.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아내 대신 노인을 돌볼 도우미가 필요하다. 영화는 약 40분 동안 마치 남의 가정의 일상을 엿보는 듯한 장면들로 흘러간다. 남편은 도우미에게 일을 시키고, 딸을 훈육시키며, 노인을 목욕시킨다. 노인과 단둘이 남은 도우미는 노인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을 종교적인 문제로 곤혹해한다. 등등. 물론 이것은 이후 일어날 우발적 사건과 이를 둘러싼 법정공방을 설명하기 위한 세세한 밑밥이다.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와보니, 노인은 침대에 묶인 채 쓰러져있고 도우미는 하루 치 일당과 함께 없다. 화가 치민 남편은 얼마 후 돌아온 도우미를 도둑이라며 해고한다. 자신은 도둑이 아니라며 따지는 도우미를 내쫓으려던 남편은 그녀를 밀친다. 임신 4개월이던 그녀가 유산했다며, 남편이 살인죄로 기소된다. 별것 아닐 것 같은 사건이 의외로 커진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단순해 보이는 사건이 파고들수록 묘연해진다. 도우미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남편이 알았는가, 남편의 밀침으로 유산이 일어났는가, 두 개의 핵심질문에 두 사람은 모두 부분적인 거짓을 지닌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진실을 방어하기 위해 부분적인 거짓을 주장한다. 단순한 인과관계를 묻고 답하는 법정공방에서 총체적 진실은 오히려 아득해진다. 남편에겐 그녀의 불성실함으로 아버지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고, 도우미에겐 자신을 율법을 어긴 도둑으로 몬 것이 가장 억울하다. 아내의 소송을 대리하는 도우미의 남편은 빚의 압박과 부자에 대한 원한감정으로 사건을 점점 크게 만든다. 각자의 입장과 의도가 상충하는 가운데, 자신의 진실을 방어하고 상대의 거짓을 공략하기 위한 전술들만 남는다. 결국 진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전체를 다 설명하진 못한다. 서로가 할퀴는 이 과정에서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이 치사한 공방의 과정을 부부가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지켜보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이혼법정이다. 둘이 헤어진다면 딸은 누구와 살아야 할까. 딸이 누구를 선택하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딸이 선택을 말하는 동안 복도로 내보내진 부부의 초조한 모습을 비추는 가운데 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는 대단히 치밀하고 사실적인 법정스릴러이자 계속 미묘한 상황 속에 캐릭터를 몰아넣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 윤리극이다. 영화의 교훈은 분명하다.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의 입장과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것과 갈등의 한 축인 나로서는 총체적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재빨리 인정하고,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생생하고 지긋지긋한 분쟁의 한 토막을 통해 체험시킨다. 베를린 영화제는 이 영화에 최고작품상과 남녀 연기상을 안겼다.
그런데…관객들은 이러한 호평에 동의할까? 금요일 저녁 일반시사로 이 영화를 상영한 극장 안은 관객들의 공분으로 가득 찼다. 별거가정의 일상사가 펼쳐지는 초반 40분 동안 관객들은 몹시 지루해했다. 집안에 도우미를 들이고, 일을 시키는 장면 등은 모두 극장에 들어온 이상 잊고 싶은 일들이다. 일상성을 표방했다는 영화들이 보여주는 키치적 겉멋도 없는 진짜 지긋지긋한 집안일, 그것도 계속 분란의 싹이 돋는 남의 가정사를 지켜보는 게 여간 신경곤두서는 일이 아니다. 드디어 사건이 일어났지만, 드라마틱하지도 스펙터클하지도 않다. 이후 법정공방은 사소하고 지루한 진실게임이다. 시종 집안에서만 그것도 의도적으로 벽과 문을 사이에 두고 찍은 장면들은 갑갑하기 그지없고,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든 괴롭긴 마찬가지다. 중간에 나간 관객도 있었지만, 결론을 보려고 끝까지 참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딸이 누구를 선택하는지도 보여주지 않고 끝낸다. 참가상도 안주고 내쫓는 격이다. 옆자리의 두 관객은 첫 시퀀스부터 “이거 뭐야? <사랑과 전쟁> 극장판?” “이거 법정영화였어?” “언제 재밌어 지는 거야?” 하며 불만의 코멘트를 날리더니 스크롤이 올라가자 “이게 끝이야? 베를린 영화제는 개뿔!”하며 소리쳤다. 불이 켜지자 여기저기서 야유를 퍼부으며 일어나는 관객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도 다 동일한 데시벨로 궁시렁대며 영화를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그 자리, 이 영화와 베를린 영화제가 공분의 대상이었던 건 분명하다. 기자시사에서 보았던들, 이처럼 생경한 반응을 어찌 접할 수 있었으랴. 일이나 공부를 위해 영화를 보는 소수를 제외하고 대게 관객들에게 극장은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꿈의 공장이다. 수십 편의 영화를 보고 완성도를 논해야하는 평론가에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그러나 ‘좋은 꿈을 꾸기 위해’ 극장에 온 이들에게 현실세계의 불편함을 집요하게 환기시키는 영화는 “노 땡큐(됐거든?)”일 수밖에. 관객과 평론가 사이에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교훈으로 알려주듯이, 각자의 입장과 진실이 있음을 인정하고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인정하는 수밖에. ‘전지적 가카 시점’은 불가능하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