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독서에 대하여 – 1. 기초 체력 기르기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수안아, 이번에는 네가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기를 바라고 네가 생후 27개월쯤에 엄마와 주고받았던 메일을 보여주었단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매주말에 네 동영상을 15편 쯤 보냈단다, 지금까지 받은 것이 모두 천편이 넘는구나. 나는 이번 주에는 얼마나 자랐는지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그걸 보다가 엄마가 너를 대하는 방식이 맘에 안 들면 메일을 보내곤 했단다. 엄마는 내 바람대로 너를 아주 잘 길렀지만 때로는 의견이 달라 내가 이의를 제기하곤 했지. 궁극적인 권한과 책임은 엄마에게 있지만 나도 네 유전자 지분의 사분의 일만큼 참견을 하였고 그 때마다 엄마는 짜증(?)을 내면서 반박하면 나도 재반박 했는데 앞의 글도 그 중 한 편이란다.

하버지는 어려서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 때는 책이 참 드물었어. 그래서 누가 읽을 만한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게 있는 책을 들고 멀다지 않고 찾아가서 다짜고짜로 바꿔보자고 졸라서 얻어 읽었단다. 그렇게 얻어 읽었던 내용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나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되지 않은 것이 없었단다. 이런 내 경험을 되살려 엄마와 삼촌에게 어린 시절에 독서를 권하고 이제 네게도 권하고 싶단다. 책을 읽은 것이 지금 당장 네게 점수를 올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하는 데나 살아가는 데에 언젠가는 반드시 도움 된다는 내 얘길 믿는 거지?

하버지가 젊은 시절에는 책을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어서 자기 전에 누어서 책을 보다가 잠들었고 지금도 그럴 때가 많단다. 내가 나 됨에서 가장 큰 몫을 한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보면 단연 독서란다. 나의 생각이나 언행이 남달랐는지 할아버지의 초중학교 때 별명이 ‘뙤똥이’였단다. ‘뙤똥하다’라는 말은 지금은 사라진 형용사인데 ‘어떤 물건이 높은 곳에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상태’를 뜻했단다. 내 생각과 언행이 친구들이 보기에는 상식과 통념에 벗어나서 뭔가 위험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네 외할머니도 언제나 날보고 ‘유별나다’고 한다. 내가 뙤똥하거나 유별난 인간이라면 책이 날 그렇게 만들었구나.

독서는 나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인생관등의 관점을 끝없이 교정시켜 나 자신을 만들게 도왔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를 잘 해결하도록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었단다. 뿐만 아니라 독서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었으므로 이제까지 즐겁게 살 수 있었단다, 이런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식이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책임인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만약에 네가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네 엄마와 삼촌이 똑똑해진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너도 똑똑해질 수 있으며, 네 엄마와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책 속에서 네 길을 찾아 책과 함께 즐겁게 내 길을 갈 수 있단다.

할아버지는 엄마와 삼촌에게 책을 많이 읽히려고 책을 읽은 만큼만 용돈을 주었단다. 그러니까 책마다 용돈 액수를 상의해서 정해놓는 거야, 용돈이 필요하면 재미있는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도 했었는데 엄마는 <성경이야기>, 삼촌은 <삼국지>를 열 번도 넘어 읽었을 거야. 용돈으로 독서를 강요한 건지 권유한 건지 방법의 잘잘못은 접어두자. 그래서인지 책을 즐겁게 읽었고 둘 다 똑똑해졌잖니. ‘똑똑하다’는 것은 생각하는 힘이 있어 살아가며 부딪치는 문제를 잘 해결한다는 뜻이니 얼마나 좋은 뜻이니. 너도 네 엄마나 아빠나 삼촌처럼 똑똑해지기를 바라니까 독서를 권유하는 거야. 만약에 네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생겼다면 좋은 것을 주고 싶지 않겠니. 독서는 참으로 즐겁고 좋은 거란다.

그런데도 지금 내가 이글을 쓸 때와 네가 이글을 읽을 때는 사정이 어떻게 다를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읽으려는 생각도 없나 보더라, 학교에서 돌아와도 아이들이 학원으로 내쫓기고 어쩌다 책을 보려고 해도 ‘공부와 상관없는 책을 왜 꺼내느냐’고 부모들이 야단을 치는구나. 부모들은 아이들이 미래에 행복해지려면 현재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점수와 등수 경쟁에서 뒤쳐져서는 안 된다고 몰아대니 언제 어떻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재미를 붙일 수가 있겠니.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모 때문에 책을 읽는 행복을 누릴 수가 없구나.

어린 시절에는 너는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이거 뭐야?’ ‘어떻게 하는 거야?’ ‘왜 그래?’하고 끝없이 물었다. 그러나 엄마라고 네가 묻는 것을 다 알지도 못하고, 항상 네 곁에 붙어있을 수도 없잖니. 그래서 결국은 학교에 보내게 되지. 그러나 학교도 네가 묻는 것을 다 대답해주지 못하며 언제인가는 떠나야 하는 곳이야. 그러니 부모와와 학교 선생님을 대신하여 끝까지 믿고 자식을 맡길 것이 책 밖에 무엇이 더 있겠니. 학교 교육에 자식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부모들은 대안학교를 선택하지만 나는 독서로써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면 학교교육의 한계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단다.

책을 읽어야 되는 중요한 여러 가지 이유가 학교 교육이 가진 한계와 문제 때문이란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아이들의 관심이나 수준은 무시되고 정해진 교육과정을 정해진 시간에 마치려고 주입식 수업을 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현행 학교 교육과정이 인지 교육에만 치중하여 정서 교육이 부족하고, 특히 가치교육이 거의 없으며, 알게 모르게 돈이 지배하는 사회의 질서를 내면화시키는 거란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나 공부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은 알아도 ‘왜’ 해야 하는지 가치나 의미를 묻지 못하는 사회의 한 부품으로서 기능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단다. 교육이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길러주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니까 붕어빵틀에 찍혀 나온 붕어빵처럼 돈에 대한 비슷비슷한 꿈과 생각과 행동방식으로 살아가는구나.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만 계산하도록 만드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아이들을 임금 시장에서 주급이나 월급 또는 연봉을 더 많이 받는 경쟁력이 있는 상품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아이들의 꿈마저 점차 돈으로 바뀌는구나. 인간이 협력하며 살아야 행복해지는데 서로가 서로를 돈벌이 상대로만 대하며 돈벌이의 승자가 전리품(돈과 권력과 명예)을 독점히는 사회구조 때문에 학교가 갈수록 삭막해지는구나. 학교에서 점수나 등수 경쟁을 시키는 것은 그것이 뒷날에 월급이나 연봉 등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란다, 너만은 승리자가 되라고 아첨하는 부모나 교사의 비뚤어진 사랑이 교육을 더욱 병들게 만드는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두가 돈벌이를 잘 할 수는 없으니까 학교에서 성적이 처지는 아이들에게는 좌절감과 절망감을 철저하게 내면화시킨단다. ‘나는 공부 못하니까, 못났으니까, 무능하니까, 좋은 직업 가질 수도, 많은 보수 바랄 수도, 인정받거나 승진할 수도 없어, 그나마 먹고 살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 자본의 사주를 받고, 돈의 위력에 굴복하여, 탐욕에 사로잡힌 교육 과정과 교육 체계와 교사들은 성적이 처지는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내면화시켜 그들을 돈에게 순종하는 싸구려 임금 노동자로 만들고 돈 많은 사람들의 둘러리 삶을 살게 하는구나. 이런 현실을 알고 돈의 위력에 굴복한 부모들까지도 돈의 요구에 순종하여 자식이 돈벌이 잘하기를 바라고 자식을 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만들려고 자식의 점수나 등수를 올리려고 애쓰다보니 교과서 아닌 책을 읽을 틈조차 주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하구나.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단다. 산 정상을 오르는데 모두 지름길로만 가려고 하지만 머잖아 가파른 절벽에 부딪치게 되지. 그러나 돌아가면 느슨한 오르막을 쉽게 오를 수도 있단다. 산 정상에 오르는 능력이 문제 해결능력 즉 사고력이라 하자.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면 자본이 돈벌이를 위해서라도 창의적인 사고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과 공부와 점수나 등수에만 매달리게 할 게 아니라 폭넓은 독서와 사색과 토론을 하도록 했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으로가 아니라 돈으로 돈 벌어서 영향력을 휘두르려는 사람들의 탐욕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구르는 눈덩이처럼 뭉치려고만 한단다. 축적하고 독점하려는 사람과 돈 많은 사람이 살기 좋게 만들어진 자본주의 체제는 돈 없는 사람이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자기 몫을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학교에서는 겉으로는 창의적인 인간을 기르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부리기 쉬운 기능적인 인간만을 길러내고 있단다. 그들이 말하는 창의적인 사고는 생산적인 기능에서만 필요한 것이지 인간의 가치나 의미를 찾는 창의적인 사고는 불필요한 거야.

사고력은 마치 운동선수의 기초 체력과 같은 것이야. 먼저 기초체력 을 갖추고 그 체력으로 각 종목에 따른 기능을 익혀야 운동선수로 대성할 수가 있잖니. 그런데 눈에 보이는 기능만 가르치려들면 나중에는 기능을 뒷받침하는 기초체력이 모자라 실제 상황에서 배운 기능을 쓸 수가 없단다. 마찬가지로 모범생이 교과서를 외우고 시험 문제를 푸는 기술과 기능만 익혀서 당장 점수나 등수를 올려도 교과서를 넘어서는 실제 상황에서 사고력을 요구하는 고난도의 문제 상황을 헤쳐나갈 수는 없게 된단다. 그러니 너는 폭넓게 책을 읽고 읽은 것을 생각하며 정리해두어 인간의 진정한 힘, 창의적인 사고력을 길러두어야 기초 체력이 튼튼해지지 않겠니.

그래서 육체의 힘 못지않게 생각하는 힘도 중요한 인간의 생명력이란다. 인간의 정신적인 생명력은 궁극적으로 지적인 호기심으로 나타나며 그리고 그것이 눈으로 나타난다는 얘기라든가, 책으로 지식을 축적하고 이를 활용함으로써 발전했던 인류의 문명사와 책을 읽으며 읽은 것을 정리하고 활용하는 개인의 발달사가 병행한다는 얘기는 언젠가 다른 편지에서 얘기하자. 이번에는 한 인간이 생각하는 힘, 즉 문제 해결능력이 육체적인 힘 못하지 않는 중요한 생명력이며 이 생명력이 독서로 길러진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응답 1개

  1. Pureu말하길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이런 함머니가 되고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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