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카페, 생활의 발견

- 박정수(수유너머R)

연구실이 삼선동으로 이사 오면서 생활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주방이 갖춰지면서 밥 해 먹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점심은 자율로, 저녁은 당번을 정해서 하루 두 끼 꼬박꼬박 챙겨 먹습니다. 어제 저녁은 열무 비빔밥을 해 먹었습니다. 후암동 종점 수다방 옥상 텃밭에서 기르는 열무를 솎아서 버무리고, 돈암제일시장에서 콩나물 2천원어치 사서 국도 끓이고 무쳐도 놓았습니다. 김융희 샘이 보내주신 고추 잎을 삶아 무치고, 냉장고에 있던 무를 채썰어 고추가루 양념으로 무치고, 요즘 요리 배우는 데 재미 들인 다큐씨가 버섯을 볶아 내놓았습니다. 카프카 세미나 끝나고 저녁 먹으러 기다리고 있던 지오, 지현씨, 카페 마담 정석씨, 명학이 형도 불러다 두 명씩 짝지어 양푼에다 비벼 먹었습니다. 별 돈 안 들이고 맛난 비빔밥을 푸지게 먹었습니다. 손수 기른 채소라서 더 맛나고, 함께 요리해서 안 힘들고, 무엇보다 한 양푼에 같이 비벼서 더 푸짐한 밥상이었습니다.

이사 오면서 하루 두 끼 꼭 해먹자고 약속했지만 사실 좀 걱정했습니다. 주방시설이 갖춰진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의만으로도 안 됩니다. 밥 해 먹는 게 누군가의 ‘노동’이 되지 않으려면 모두의 자생적인 관심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럽게도 남산에서는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주방이 안 돌아간 측면이 있었거든요.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주방이 잘 되려면 항상 밥 먹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카페 ‘별꼴’의 마담, 그 중에서 ‘명학’이 형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출근하는 명학이 형은 점심과 저녁밥을 모두 연구실에서 먹습니다. 그것도 너무 맛있게 먹습니다. 명학이 형으로 인해 빼먹지 말고 밥을 해야 하는 필요와 기쁨이 생겼습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고마운 걸 느꼈습니다.

명학이 형은 휠체어가 발인 지체장애인입니다. 1층의 슬러프 공사가 덜 되어서 혼자서 턱을 못 넘고 전화를 할 때도 많습니다. 카페 마담이지만 에스프레소 기계가 너무 높아서 다루지 못하고, 하루 종일 ‘드립’ 커피 내리는 연습만 합니다. 내가 해 준 밥 맛있다는 말이 고마워서 명학이 형이 내려주는 커피 맛 좀 보려고 매일 드립 커피를 주문합니다. 사실 저는 원두커피 맛을 모릅니다. 커피믹스에 중독되어 ‘저 탄 내 나는 걸 왜 먹나?’ 하는 저질 몸입니다. ‘별꼴’ 카페와 몸으로 친해지려고 이사 와서는 매일 명학이 형의 드립커피를 한잔씩 마십니다. 이제는 인도네시아 원두와 케냐 원두를 맛으로 구별할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원두커피 좋아하는 다른 사람한테 맛보이면 다들 맛있다고 합니다. “밥 맛있어요”와 “커피 맛있어요”가 교환되면서 ‘함께 존재함’의 잉여가치가 생기는 걸 느낍니다.

전에는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게 좋은지 몰랐는데, 요즘엔 그게 뭔지 알겠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카페에서 커피 시켜 놓고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데, 그게 그렇게 좋습니다. 지지난 일요일에는 만세, 태진, 민혁 샘이 놀러 와서 수다 떨다가 카페 공간이 참 넓고 좋다면서 다른 수유너머(N, 문) 사람들과 함께 강연회나 학술제를 하면 좋겠다는 말에 귀가 번뜩 뜨였습니다. 이제 비로소 수유너머 코뮨들의 네트워크를 실험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 웹에서는 <위클리수유너머>가 오프라인에서는 ‘별꼴’ 카페가 ‘코뮨넷’의 실험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에 ‘행복한 사진관’을 연재 중이신 박정훈님이 오셨을 때는 수다 중에 카페에서 ‘85 크레인’ 사진전을 열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아는 작가들에게 전화 걸고 여기 저기 지원 의사도 받아서 일사천리로 ‘85 크레인 사진전’을 구체화 했습니다. 이런 발랄한 상상과 과감한 사유는 카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합니다. ‘카페’라는 공간과 향기는 사유를 말랑말랑하고 가볍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카페 ‘별꼴’이 경계에 갇히고 중력에 짓눌린 사유를 해방시켜, 별의 별꼴의 코뮨과 개인들이 별의 별꼴의 네트워킹과 실험을 하는 곳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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