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그래도 엄마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아뇨, 절대로 절대로 결혼은 안 할 거예요!”

두 쌍둥이가 동시에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다. 엄마는 그 옆에서 언제나처럼 웃고만 있다. 괜히 아무 말이나 붙여 볼 심산으로 말을 꺼냈던 나는 살짝 엄마 눈치를 보았다. 파탄 난 엄마의 결혼생활 같은 것을 자기들에게 하라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듯 두 딸이 동시에 외치는 소리를 그녀는 어떻게 듣고 있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주 엄마를 원망했다. 쌍둥이 중 밑의 아이 반응이 더 그랬다. 여름철에는 분노와 원망이 절정에 달해 자기는 절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공부방에서 혼자라도 그냥 자면 안 되겠느냐 애걸을 하는 통에 한 동안 아주 애를 먹었다.

아이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엄마와 집에 와 있는 엄마의 동거남 때문이었다. 아직은 이혼한 아빠를 잊지 못하는 아이들은 엄마가 동거남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여름에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일이 무엇보다 너무 괴롭다고 하소연을 한다.

아빠를 잊어야겠지만 잊혀지지 않고 엄마가 동거남에게 해주는 일 하나하나가 자기 아빠에게 한 일에 비교되어 너무 아빠가 가엽고 불쌍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 아빠가 그렇게 가엽기만 한 사람일까가 실은 문제다. 맏딸과 쌍둥이 자매를 두었던 그 아버지는 첫째 딸에게 아주 몹쓸 짓을 했다. 그것이 결국은 그 가정을 파탄 낸 이유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수감이 되었고 이혼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만 두 쌍둥이가 그 일을 잘 모를 뿐이다.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처음 쌍둥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엄마를 처음 보았다. 엄마를 보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 부조화감이 지금도 기억난다. 물론 엄마처럼 아이들이 다감한 면은 있지만, 말끔히 차려 입고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는 엄마에 비해 아이들은 초등 고학년 여자 아이들인데도 전혀 정돈된 모습이 아니었다.

센터를 다니고 나서 얼마 후부터 엄마가 동거남과 함께 있느라 집을 잘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다는 이야기를 간간히 들으면서 걱정을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예 남자가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 모양이다. 쌍둥이들은 엄마의 그런 처신을 배신으로 여기는 눈치다. 멀쩡히 아빠가 있는데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아빠가 가엽다고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이 눈물바다다. 그러나 말을 들어보면 그 동거남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참 해줄 말이 없어 위로만 건넬 뿐이다. 그래도 혹 하는 마음에 어려운 자리지만 언니를 불러 두 쌍둥이의 괴로움을 넌지시 일렀다. 그랬더니 언니가 뜻밖의 말을 한다. 엄마가 실은 자기들이 어릴 적부터 엄마 노릇에 무책임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출을 하기도 하고, 집안일도 거의 잘 안하다시피 했는데 차라리 이 동거남과 살게 된 후로는 조금은 더 집안일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 자기는 좋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다.

아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더해줄 수 있으랴 싶었다. 사실 사는 일이 그렇게 손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되고 이해될 수만 있다면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괴롭지만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늘 약간의 의혹과 우려와 불일치와 배신이 양념된 현실에서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힘겨움이 사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난리를 친다. “XXX이 버리고 갔으면 잘 살기나 할 일이지, 왜 XX이야”하고 독기를 가득 품고 엄마를 욕하는 다른 아이에게도 해줄 말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미래나 희망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이야기라도 좀 해보려 해도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남편을 언제까지 바라보고 살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는 또 다른 아이의 엄마에게 아이를 봐서 참으라는 말을 하기도 싶지 않다. 아이들의 엄마는 이미 좌절과 절망을 넘어서서 히스테리와 분노와 자기 파괴적 망상에 사로잡혀 쩔쩔매고 있다.

아이들은 버려진데 대해 원망을 한다. 자기 아버지와는 노력도 안하더니만 다른 남자 앞에서는 교태를 부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투다. 하지만 엄마도 살아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다.

그래서 그럴까? 다 그런 것이야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함께 사는 일은 어쩌면 삶의 한 요령이 된 듯싶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 힘든 세상을 남자나 여자가 혼자서 특히 아이들만 데리고 산다는 일이 결코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무슨 사는 모양 있게 사는 사람들처럼 걱정해야 할 사회적 위신이나 체면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정리하고 물려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단촐 하니 단봇짐 하나만 달랑 들고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오히려 손쉽다. 그냥 살면 사는 것이고 밥이나 한 그릇 먹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무슨 결혼식이니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네 그런 것도 귀찮은 일이다. 와서 크게 축하하고 챙겨줄 사람들도 많지 않고 무에 그리 남들을 신경 쓰거나 남들이 신경 써주는 그런 인생은 살지 않은 탓이다.

정말 사는 일에만 전력을 다한 것이 우리네의 사는 모양새이다. 먹고 살기 위해, 오늘의 이 괴로움과 절망감을 이기기 위해, 그저 혹 서로에게 기댈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이들은 몸과 마음을 섞을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도리와 윤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없으므로 이들은 진정 사랑만을 믿고 바라는 것이다. 그 사랑이 끝났으므로 이들은 깨끗하게 갈라서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한테 부모 노릇을 못하니 다시는 저들을 찾지 않겠다며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꺾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원망과 저주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것이 우리 없는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법도이다.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렇게 인생을 바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만 아직은 여리고 고지식한 아이들이 원망을 쏟아낸다. 그렇게 살아도 되느냐고 부모인데도 비웃고 무시한다. 부모면 부모 노릇을 똑바로 하란다. 실은 부모가 되기를 원했던 것인지도 기억에 없는데 말이다.

그런 쌍둥이 중 한 명이 입원을 했다. 늦은 밤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엄마였다. 내일이 수술 날인데, 엄마는 근처 집에 가서 잔단다. 내일 일을 해야 하니 쉬어야겠다는 것이다. 정말 무슨 호들갑을 떨 일이 있는가 말이다.

“야, 그래도 엄마니까 이렇게 수술도 해주시고 병원도 와서 지켜주시는구나“ 아이에게 새삼 일깨운다. 진심이 가득 든 말이다. 새끼가 귀하지 않은 어미가 정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다만 살기 팍팍한 어미가 있을 뿐이고, 어리석고 못난 어미가 있을 뿐이다. 쌍둥이의 엄마도 사는 게 넉넉한데도 아픈 자식 곁을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엄마여서 이리 해주시는 거야 하고 괜한 말로 한 번 더 꾹 도장을 찍는다.

결코 모성이 어쩌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가난하고 힘든 사람은 남을 이해하는 힘이. 세상을 견디는 힘이, 남과 소통하는 힘이, 그리고 자신을 믿는 힘이 훨씬 커야 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힘을 내는 일에 어미의 마음을 한 번 돌이켜 보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괜히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 말이다.

응답 1개

  1. 말하길

    가난한 사람들은 남은 이해하는 마음이, 세상을 견디는 힘이, 남과 소통하는 힘이, 그리고 자신을 믿는 힘이 훨씬 커야 한다는 말이 참 가슴이 와 닿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캄캄한 절망 속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샘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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