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 윤여일(수유너머R)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경험한다는 것, 그것은 부득이하게 잘못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말입니다. 어쩌면 니체야말로 방사성을 띠는 그의 아포리즘이 너무도 쉽사리 타인에 의해 ‘아름답게’ 인용되는 사상가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튼 니체는 아름다움이라는 감상에 관한 저런 지적을 남겼고, 저는 그 지적이 필요합니다. 인도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어떤 피사체도 인도에서 찍어온다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인도라는 이미지는 인도의 현실을 대신해 떠돌아다닙니다. 여행자는 현실 인도에 발을 들여놓고서도 이미지 인도에 자신을 푹 담궜다가 꺼내오는 일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유적에 들러 죽 둘러보며 찬란했던 과거에 감탄합니다. 유적을 에워싸고 있는 오늘의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거리는 외면합니다. 유적지에 가보아도 유적이라는 과거와 관광지라는 현실 사이의 관계, 유적을 가능케 했던 역사와 권력관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볼만한 유적은 과거에 박제되어 있으며, 생명활동을 하는 현실은 볼만한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저는 니체의 문장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적어도 보는 이가 대상에게서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범주 안에 대상을 일반화시킨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상이 생활의 무게를 간직하고 있다면 아름다운 만큼 추할 것입니다. 보는 이의 마음을 긁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대상을 아름답게 응시하면 대상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도 아름답게 비칩니다. 그런 감상은 방부처리되어 있습니다. 방부처리된지라 생존의 불결한 것들은 그 감상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사람살이가 그저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것은 추잡한 허식입니다. 살아있는 것의 신성함은 추하고 왜곡된 곳에서 나옵니다.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이미 살아있고 살아있기에 이미 추합니다. 추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은 추한 것이 마땅합니다. 인간의 영위라면 더러움이 끼기 마련입니다. 인간에게서 새어나오는 빛은 굴절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추가 미로 승화되는 어떤 순간이 발생합니다.

가난의 풍경

박정훈 님의 인도 사진을 봅니다. 사진들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밝은 사진이어도 어두운 구석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까닭은 윤리적 절제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윤리는 숭고함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중함의 영역에 속합니다.

저도 인도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니 그곳의 몇몇 도시와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가난의 풍경이 자주 눈에 밟혔습니다. 그 풍경을 오랫동안 접하고 있자면 정치․경제적 맥락을 잃고 제게는 그저 그 가난이 그 사람에게 들러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자주 접하는 까닭에 궁금증은 사라져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이 가난으로만 보인다면 진정한 여행자의 사고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 가난의 깊이를 잴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나로서는 두루마리 휴지 가격도 안 되는 돈을 지불하면 릭샤 위에 올라 지면에서 발을 떼고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가게에 들어가 짜이 한 잔 마실 푼돈이라면 역에서도 맨바닥에서 열차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경험을 통해 가난의 깊이를 가늠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겉으로 드러난 가난의 표면성을 뚫지 못하는 까닭에 아름다운 풍경도 자주 보면 물리듯이 가난의 풍경에도 익숙해져가고 그 충격은 점차 엷어집니다. 오히려 내 쪽이 가난의 장면에 반복해서 자꾸 노출되어 피해를 본다고도 여기게 됩니다. 그것을 반복처럼 느끼는 까닭은 제 눈에 비친 대상들, 아니 인간들이 구체성을 잃고 뭉뚱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진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적선을 요구하는 행위와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판단력도 흐려져 둘 다 인도의 불편한 면모라는 피상적 이미지 속으로 융해되고 맙니다.

여행자의 윤리

표면을 파고들어 이면을 섣불리 읽어낼 수 없는 타지에서 윤리란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반응을 성찰하는 데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의 음영을 헤아리지 못하고, 생활을 수놓는 물질관계에 무지한 까닭에 현지사회로 진입할 수 없다면, 대신 그 노력으로 자신을 응시해야 합니다. 장식적으로나마 걸치고 있던 인권의식을 짚어보고, 타인을 향한 동정의 배후에는 생활환경, 경제력, 사회적 지위에서의 우월감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자신은 그 상황을 외면할 수 있거나 언제라도 원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건이 서툰 연민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현지인들은 식물처럼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자신은 동물처럼 땅 위를 오갈 수 있다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여행자에게 요구되는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자는 자칫 타인의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향유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특권인 이유는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지만, 그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고는 믿지 않는 데서 연민의 권리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순진하고 알량한 연민은 무고함의 과시적 성향을 띠지만, 사실 그 사람의 정신적 무능력을 증명합니다. 자신처럼 여행자들이 몰려와 그곳이 관광지로 변해가고 물가가 오르고 저임금노동이 늘어나고 공동체에 균열이 생긴다는 사실, 자신이 손에 쥔 카메라가 이곳의 궁핍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도가 선하다고 해도 연민은 뻔뻔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여행자의 윤리란 현지사회에 멋대로 말을 보태는 유권해석권과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짐짓 혀를 차는 면책특권을 모두 내려놓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박정훈 님의 사진에서는 그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응답 2개

  1. […] [편집자의말]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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