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한금선, 다큐멘터리 사진에 관한 수다

- 은유

“사진은 자기만의 도자기 굽는 것”

한진중공업 사태를 기록한 사진집 <사람을 보라>가 지난 8월 출간됐다. 사진집으로는 드물게 2쇄를 찍은 이 책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참여했고 그 중심에 ‘한금선’이 있다. 그가 선후배와 동료 사진가 23명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사진을 보고 고르고 배치하고 찍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열흘. 사진가들에게 전권을 부여받고 일사천리로 만들었다. 신뢰와 열정과 내공 돋는 그이기에, 자칭 “성격 지랄 맞은 애”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책을 100권이나 팔았다”며 눈을 다 감고 웃는 이 사람. 사진가-디렉터-판매왕에 빛나는 이 사람을 보라!

한금선은 난로다. 뜨겁다. 몸에서 주전자물 펄펄 끓는 소리가 난다. 다가가면 데일 것 같지만 30분만 지나면 뜨뜻해서 떠나기가 싫다. 그렇게 그가 찾아갔으나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96년 서울역 앵벌이 아이들을 시작으로 독거노인, 시설생활자, 농민, 철거민, 파리 철길 위 사람들, 동유럽 집시들과 섞여 청춘을 보냈다. 가만 보니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세상 보는 걸 좋아하더라”는 그에게 물었다. 사람과 사진이 관계 맺는 법,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윤리에 관하여.

# ‘가난한 나라’ 사진에는 ‘맑은 영혼’ ‘순수한 웃음’ 같은 표현이 따르더라

= 원 달라 포토다. 아, 그렇게 좋으면 거기서 니가 살라고 그래~ (웃음) 본전 찾기 심리다. 여행은 느껴야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 찍기, 백배 즐기기, 빠리지엔도 모르는 어디가기… 이런 책들이 전부 여행을 본전 찾게 하는 싸구려 모델들이다. 99년 2000년 즈음부터 글 쓰지 않는 사람들이 쓴 글이 잘 팔린다. 돈 이라는 잉여축적물이 생기니까 자기 아이덴티티 축적으로 옆 주머니를 차는 거다. 어떤 직업인이 어떤 취미를 전문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하이브리드가 대세다. 의사나 교수처럼 사회적 명망도 높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삶을 들여다봐주겠느냐. 사진가들은 허덕이고 음악 하는 사람들 여전히 배고프다.

서점에서 네팔 여행책 보면 같은 할머니 세 군데 다 나온다. 전형적인 원달라 포토다. 네팔 카투만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가서 그곳을 초토화 시키고 본인도 초토화 당한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 한 10개국을 가거나 한 나라를 여러 번 다녔더라도 이런 사람들은 골프치기 좋은 나라로밖에 기억을 못 한다. 유럽에 다녀보니 다 비슷하더라고 말한다. 외국 나가는 것이랑 여행은 다르다. 여권에 도장 찍히는 게 여행은 아니다.

아프라카 말리에 NGO단체랑 구호적 차원에서 도움이 아닌 활동하러 갔다. 추장님이 첫 대면에서 한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너희가 온 그곳은 지금이 잠자는 시간이라더라.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도움 주러 왔다니 잘 수행하고 가도록 하라. 끝. 와, 이것이 디그니티(Dignity)! 품위가 놀라웠다. 그거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하러 온 거다. 구호는 막힌 곳 길 터서 온전하게 흐르게 하는 것이다. NGO가 길 만들어서 불편부당한 것들 온당하게 만들어주면 된다. 그뿐이다. 가끔 NGO단체 실무자가 ‘따뜻하게 찍어주세요~’ 요구한다. 나는 말한다. ‘따뜻하면 그렇게 할 게요~

# 사진가는 여행과 일이 분리불가능하지 않을까

= 한 달 반 캠핑한 적이 있다. 하루 5시간 걷고 6시간 운전하고 해질녘이면 밥하고 매일 반복했다. 카메라는 두고 다녔다. 그럴 때 나는 프랑스, 독일 갔다 왔다고 얘기 안 한다. 그냥 그 세레모니의 주인공이 되는 거다. 그런 게 나한테는 여행이다. 외국으로 현지 촬영 갔을 때는 초대받은 사람이 되고파서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목적이 분명하다. 일 하러 간 거다. 여가시간을 하루 정도 확보하면 호텔에서 늘어진 휴식을 취한다. 카메라를 잡지 않는다.

# 그냥 여행과 카메라 들고 가는 여행의 차이는

= 여행은 문전걸식이다. 뭘 먹어도 그 밥이 그 맛이라면 사진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세상 보는 걸 좋아하더라.

#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

내 느낌에 충실하게 내 기분대로 한다. 어떤 날은 마을 입구에 앉아 있다가만 온다. 어떤 날은 카메라 들고 장비 메고 선전포고 하듯이 들어간다. ‘나는 사진가다. 사진가로서 이 곳에 온 거다’ 처음부터 인지시킨다. 특별히 친해져야 찍는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친해졌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집시 작업할 때, 시설에서 찍을 때 등 대상이나 주제에 따라 사용하는 렌즈가 달라진다. 일로 갈 때나 가보지 않는 나라는 내가 가진 렌즈를 다 챙겨 간다.

어떤 대상과는 자연스럽게 고무줄이 생긴다. 확 당기지도 밀리지도 않으면서 텐션이 형성된다. 어린왕자가 장미를 만난 느낌이랄까! 그 사람한테 반해야 한다. 질문과 대화 들으면서 감동 받아야하고. 르포작가가 언제 우는지 웃는지 간접경험을 통하기 때문에 필자와의 호흡이 중요하다. 내 진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반응 못하면 안 찍으면 된다. 내 마음이 움직일 때 찍으면 된다. 나는 세상에 정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 작업자의 작업물은 본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 사진 찍히고 나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 왜 그 손들을 만드는지 안타깝다. 사진에 찍히는 이들은 카메라가 공격적이라고 느끼면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런 정서를 가진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상황이 만드는 것 같다. 나는 그 정서가 변하는 것을 기다리거나 아님 무능력하게 포기한다. 아이들의 경우는 아이들이 뭔가를 받아야한다는 생각이 없을 때까지 놀아준다. 그래도 아이들이 계속 불편해하면 그 사진 안 쓰고 폐기한다.

# 다큐멘터리 사진하려는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점

왜 사진을 하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돈이냐? 명예냐? 처음에는 학생들 입에서 온갖 휘황한 언어들이 나온다. 뭐 공감이니 소통이니 따뜻한 세상이고 어쩌고 저쩌고…그러면 말한다. 그런 건 공항VIP실에서나 하는 얘기고 너한테 더 솔직해지라고, 솔직해질 때까지 듣는다. 왜? 왜? 왜? 계속 묻고 생각하게 한다. 지난번 올해 졸업한 제자들에게도 말했다. 최소한만 벌어라. 지금 씀씀이를 늘려놓으면 큰일 난다. 적게 벌어적게 쓰라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한 손을 비워두고 기다려야지 기회를 낚아챌 수 있다.

# 상업사진은 전혀 안 하는가

= 못하는 거다.(웃음) 그 또한 철저한 마인드가 있어야하는데 그쪽으로 내 촉수가 단련이 안 됐다. 상업사진의 핵심은 클라이언트 만족시키는 건데 못하겠다. 기회도 아주 적다. 2005년 파리에서 돌아와서 국가인권위원회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나로서는 기회가 좋았다. 좋은 후배 생기면 물려줘야할 일이다.

# 셔터를 눌러야할 때

예쁜 진실, 미운 진실이 있다. 불어로 tomber란 단어가 있다 ‘눈이 내리네’라는 샹송의 ‘내리네’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ça tombe bien! “마침 잘 맞아 떨어 졌다” 내가 마침 배가 고팠는데. 엄마에 대해 생각했는데. 그 글에 대한 고민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나에게 찾아온 우연이 선물 같을 때가 있다. 그럼 본인도 든든하다. 배고플 때는 호빵 하나로도 든든한 것처럼. 근데 아무 것도 안 내릴 때가 있다. 막막하다. 유혹을 버티기 위해서, 사냥꾼처럼 뭐 찍을 거 없나 돌아다니지 않기 위해서 그런 날은 숙소에서 잠만 잔다. 지루하지 않으면 오아시스는 없다. 그런 점에서 나의 막막함, 나의 게으름이 좋다.

현장에서 오감 열어 그들의 현재 삶 관찰하고 깊어지면 찍는다. 과거 보려하지 말고. 그 시간 그 공간에 대한 나의 정서적 근거를 마련하면 된다. 창작에는 ‘정서적 근거’가 중요하다. ‘아,내가 한다는데~’ 가 되는 거다. 내가 정신요양원, 집시 찍을 때 주위에서 다 말렸다. 성남훈도 찍고 그 유명한 쿠델카도 찍은 거를 너 왜 하니?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을 때는 정서적 이유다.

#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느끼는 한계

자기만의 도자기를 굽는 거다. 서울역에서 애들 찍을 때 내가 앵벌이 대장 될 뻔했다. 가까워졌다. 저만의 도자기를 굽기 위해 아이들 인생 갖고 온 거다. 등산로 8개가 있는 산인데 어느 등산로로 접근하느냐의 차이다. 사진은 나만의 도자기 만드는 거다. 어떤 놈은 금도금 칠하고 어떤 놈은 흙으로 하고 이거할까 저거할까 번민에 평생을 보내고. 어느 나라 흙을 쓰든 자기 작업의 자유다.

저개발 국가에 가서 여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문명을 거부해야해. 이게 아니라는 거다. 사진은 끊임없이 나로 환원되는 것이다. 나는 뭣도 아니니까. 자기 실체 보는 거, 끊임없이 작아진다. 다큐멘터리 사진하려면 고향상실자가 되어야 한다. 엉덩이에 안방의 느낌이 묻어있으면 안 된다. 근데 사실 되돌아 갈 따스한 안방이 있으니까 가능한 면도 있다. 현장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현장이 되어야하니까. 사진 작업하러 험한데 갔는데 돌아갈 따뜻한 방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작업의 특성이고 한계이자 출구다.

‘내겐 길에서 혹은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두렵거나 불편했을 아이들이다. 이곳으로 나를 데리고 온 한 아이와 카메라 그리고 낯선 공간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지금의 만남을 하게 해주었다… 보호소에서 새벽 탈출에 성공한 동민이는 머리카락이 강제로 잘려나가 힘 잃은 삼손마냥 종일 누워만 있다. 동민을 본 아이들 다시 결심한다. 바로 여기야! 우리가 있을 곳은. 따스함으로 상징되는 가정의 울타리가 두려운 아이들이다. 엄마와 아빠를 생각하면 몸이 먼저 아프다. 네 살적 부모의 발길에 차여 문지방에 걸려 다리가 잘못된 길석인 평생 불구다. 멀쩡하던 다리가 막 아프단다. 경찰이나 보호소 직원을 만나면. 아이들의 골 깊은 이야기는 분노와 그리움을 항시 같이 한다. 세상을 보는 그네들의 눈빛 또한 분노와 그리움이다.’
– 한금선, 거절된 아이들(1996-1997) 중에서

응답 1개

  1. 박카스말하길

    삶이 현장이 되어 빚어낸 사진들
    잘 보고 갑니다.
    사진들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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