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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츠츠미 월드 – 츠츠미 유키히코 작, <케이조쿠> <내일의 기억>

- AA

츠츠미 유키히코는 일본의 영상문화를 대표하는 연출자 중 하나이다.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 장르의 벽을 넘나들며 출몰한다.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은데다가 심지어 다작이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츠츠미 감독의 연출작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전편에 소개된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의 연출에도 참여했고 가장 최근에는 <20세기 소년>이라는 만화의 영화판 감독으로 국내에 개봉작을 올리기도 했다.

대중문화의 기본요소인 ‘즐거움’을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끊임없이 되풀이함과 동시에 발전시키는 창조적 아티스트로서 일본에서는 ‘츠츠미 월드’의 매니아들이 꽤 많다. 앞서 말했듯 다작하는 경향상 그의 필모그래피는 말하자면 끝이 없고, 어떤 한 작품만 꼽기에는 그의 성향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극과 극의 선명한 대치 지점에 서 있는 영화 1편과 드라마 1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드라마 <케이조쿠>는 ‘츠츠미 월드’ 에 입성하는 가장 대중적인 관문, 즉 츠츠미 감독의 대표작이다. 1999년 TBS에서 방영되며 매니아층의 폭발적인 성원을 받았다. 같은 해 일본 TV드라마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이 드라마는 후에 ‘TV 특별판’ 과 ‘영화판’까지 제작되었다. 그리고 10년도 더 지난 2010년 캐스팅을 바꿔 시즌 2가 방영되었다. (일본은 드라마가 잘 되면 대부분 스케일을 키워 ‘영화판’을 만든다. 방영된 것을 편집하여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스탭, 배우, 스토리와 설정 모두 전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생성하는 것이다. 즉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을 기본 타겟으로 설정하고 제작하므로 드라마가 성공하지 못하면 만들 수 없다.)

주연은 앞서 소개된 와타베 아츠로, 나카타니 미키 등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동경대를 갓 졸업한 시바타 준이 경시청 수사 1과 2계로 연수 발령을 받는다. 시바타가 3개월 동안 근무하게 될 이 수사 1과 2계는 이른바 케이조쿠 (‘케이조쿠’는 ‘계속(繼續)’의 일본어 발음이다.) 사건 담당으로 말 그대로 미궁의 사건이다. 즉 해결하지 못하였으나 표면적으로는 아직 ‘계속 수사중’인 사건을 담당하는 부서다. 경찰 내부에서 버림받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무시당하기 일쑤며 심지어 가장 구석진 지하 3층에 부서가 위치하고 있다.

주인공인 시바타는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다. 그만큼 일상생활에서의 면면은 모자란 캐릭터다. 마야마 토오루는 시바타의 파트너 형사로 나온다. 죽은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거나, 그림이 바뀐 것을 본 사람은 반드시 살해당하는 그림의 저주를 푼다거나 하는 다소 오컬트적인 면이 강한 수사 과정을 한 회, 한 회 풀어가면서 동시에 마야마 형사가 떠안고 있는 ‘7년 전 사건’에 다가간다. 단 한 명의 악역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시도 때도 없이 펼치는 ‘개그’는, 괴기스럽게 표현되는 범죄의 장면을 희석시켜준다.

이 작품에서 와타베 아츠로는 어두운 주인공의 내면을 매력적으로 소화했고 여주인공인 나카타니 미키는 그간의 세련되고 똑똑한 캐릭터와는 정반대 역할에 도전해 연기력을 다시 한 번 인정받았다. 극의 후반부에서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남녀 주인공의 대화는 이 드라마의 ‘명대사’로 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포털사이트에서 ‘케이조쿠 명대사’라고 치면 쉽게 찾으실 수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드라마 주제곡은 나카타니 미키가 직접 불러 화제가 되었다.

츠츠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케이조쿠>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은 <트릭>, <이케부쿠로 웨스트게이트파크> <한도쿠> 등이다. 이 작품은 모두 <케이조쿠>와 마찬가지로 방영된 해 TV드라마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이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은 전위적이라고 표현할 만한 과감한 커트,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는 오컬트적 요소, 특유의 매니악한 유머 코드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개성이 매니아 군단을 이끄는 ‘츠츠미 월드’를 굳건하게 지켜왔다.

그런데 이렇게 개성적인 연출을 트레이드마크로 네임밸류를 쌓아 왔던 츠츠미 감독이 2004년 드라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서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지운 연출을 선보였다. 전위적인 커트도, 괴기스러운 장면이나 음악도, 매니아들만 즐길 수 있던 그만의 오타쿠스러운 개그도 없이 정통극을 통해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펼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자신의 색깔을 지우고 연출한 드라마 성공 후 그는 이 실험을 영화에서 다시 한 번 펼친다. 그것이 지금 소개할 <내일의 기억>이라는 영화다.

<내일의 기억>은 와타나베 켄, 에구치 히나코 주연으로 일본에서는 2006년,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개봉되었다. 그동안 줄곧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츠츠미 감독이 처음 자신과 동년배의 이야기를 그린 첫 작품이다. 그동안 츠츠미 월드에 익숙했던 그의 매니아들에게 신선한 배신감까지 안겼던 이 영화는 도저히 같은 감독의 연출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잔하고 조용하다.

곧 50세가 되는 사에키 마사유키는 중견 광고회사 부장이다. 가족에게 소홀할 만큼 27년 동안 열심히 일해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대형 광고회사와의 경쟁에서 따낸 새 기획을 위해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던 중, 건망증이나 어지러움 같은 증상을 느낀다. 새 광고 기획과 속도위반을 한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이겠거니 싶었지만 증세는 나날이 심해진다. 아내의 재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그가 초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진단을 전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겪는 기억 상실의 비통함을 평범한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는 데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를 위해 집안 곳곳에 늘어가는 메모. 그 메모의 내용이 늘어갈수록 그의 일상은 단조로워진다. 잘 나가던 광고 회사의 부장님은 간 데 없고 모자를 눌러쓴 채 목에 커다란 핸드폰을 걸고 동네를 산책하거나 도예스쿨에 나가는 것이 일상의 전부다. 점점 위축되는 일상과 반대로 그를 둘러싼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전업주부이던 아내가 가장이 되고 대신 그가 하루 종일 집에서 아내를 기다린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딸은 부모가 되어 그에게 손녀딸을 안는 기쁨을 준다. 그가 부하들을 진두지휘하며 이끌었던 광고 프로젝트가 도쿄 번화가를 화려하게 수놓는 날, 같은 시간에 그는 어항의 금붕어들에게 먹이를 주고 아내가 써놓은 메모대로 전자레인지에 반찬을 데워 밥을 먹는다.

이렇듯 특별하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혹은 우리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아마도 저럴 것이라 공감되는 소소한 일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캐릭터를 체득하고자 광고대행사와 치매환자 간호시설을 꼼꼼히 살핀 와타나베 켄의 열연과 시종일관 담담하게 인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마지막 씬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의 표정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에구치 히나코의 묵직한 연기도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다.

이 영화에서 츠츠미 유키히코는 지금까지 연출가로서의 캐리어가 그저 ‘새롭고 충격적인 영상’을 무기로 구축한 것이 아님을, 작품의 근본이 되는 이야기의 흐름, 즉 서사를 놓치지 않는 기본기가 충실했기 때문임을 관객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킨다. 그동안의 작품에서 과감한 생략과 커트로 표현된 기발한 상상력은 메모 한 장, 옷 한 벌, 풍경 한 폭 같은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차곡차곡 쌓으면서 전체의 그림을 완성하는 일은 사실 크리에이티브의 위치에서 굉장한 집중력과 감각이 필요하다. 살짝만 과장하면 눈물샘을 자극하기가 쉬워지고, 살짝만 자극을 주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다.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대본에 충실하면서도 대본 속 문장의 감정을 영상으로 풀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츠츠미 감독은 자신의 ‘과감한 개성’을 모두 말소하는 ‘과감한 도전’을 통해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반증했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그 영역과 깊이를 늘려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야말로 그가 데뷔 후 20년이 넘도록 줄곧 개성적인 연출자로 손꼽히는 이유이다.

사실 일본 영상물은 ‘국적’과 그 ‘언어’가 주는 거부감으로 인한 1차적인 장벽에 이어 감정선이 극적으로 연출되는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담담함이 그 접근성을 떨어뜨린다. 하물며 일본 대중들에게도 매니악한 부분이 다분한 츠츠미 유키히코의 작품은 사실 여타 일본 드라마에 비해 선뜻 추천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신선한 것을 접해보고 싶으시다면 도전하시라. 라디오를 켜고 지지직거리는 무수한 전파 속에서 정확한 주파수를 찾는 것처럼 ‘딱 꽂히는’ 부분을 만난다면 새로운 세계, ‘츠츠미 월드’를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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