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5-폭력 비판을 위하여

- 고병권(수유너머R)

1. 경찰과의 충돌

지난 10월 25일 새벽, 오클랜드 경찰은 ‘아큐파이 오클랜드(Occupy Oakland)’ 점거자들을 급습했다. 중무장한 폭동진압경찰이 출동해서 점거 장소를 철거한 것이다. 이후 시위대가 3천명 가까이 늘면서 하루 종일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경찰은 최루탄이나 전기 충격탄(shock grenade)을 사용했고 고무 총탄도 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전 참전 병사로서 반전운동을 펼치던 스캇 올슨(Scott Olsen) 이 경찰이 쏜 물체 –최루탄인지 고무 총탄인지 확실치 않다-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참전 군인이 자국 경찰에 피격을 당한 셈이다. 사람들은 지금 미국이 이중의 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전쟁 중이고, 국내에서도 ‘계급전쟁’ 중이라는 것이다.

10월 25일 밤 경찰이 쏜 물체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스캇올슨(Scott Olsen)을 동료들이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10월 25일 밤 경찰이 쏜 물체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스캇올슨(Scott Olsen)을 동료들이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뉴욕 리버티 플라자에서 경찰의 폭력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지난번에 인도에서 평화롭게 행진 중이던 시위대에게 최루 가스를 뿌려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동안의 ‘악명’에 비하면, 그리고 한국 경찰이 시위대에 하는 일과 견주어보자면, 그렇게 심한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크게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월스트리트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뉴욕시장도 일단은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뉴욕이 아닌 다른 도시들에서는 점거 장소를 경찰이 새벽에 급습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번에는 보스턴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이 문제되었는데 오늘(29일)은 덴버에서 경찰의 공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클랜드의 경우, 동영상을 보면 경찰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알 수 있다. 스캇 올슨이 피격될 당시 경찰은 불과 2-30미터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언가를 쏘았고, 올슨이 쓰러진 후 그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바로 앞에서 섬광과 가스를 분출하는 물체(전기충격탄이거나 투척용 최루탄)를 던졌다. 그렇게 눈앞에서 사람을 겨냥해 쏘는 것은 어떤 적의를 가졌거나 어떤 유희를 즐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이다. 올슨은 두개골이 함몰되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수술 후 다행히 고비는 넘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로써 경찰의 폭력성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다. 올슨이 쓰러진 다음 날 오클랜드에서는 수천 명이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행진을 했고, 뉴욕에서도 ‘우리가 스캇 올슨이다’, ‘여기가 오클랜드다’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벌였다. 오클랜드에서는 11월 2일 총파업이 예고되어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오클랜드 시장은 곧바로 사과의 뜻을 밝혔고, 그것이 시위대에 의해 거부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 동영상을 올렸다.

2. 폭력은 운동의 수단도 목적도 아니다

뉴욕에서 점거 시위를 지켜보면서 ‘폴리스라인’의 존재가 항상 아슬아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는 저 선이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지금도 경찰은 이따금 시위대를 자극하는 폭력을 사용한다. 한두 명의 경찰이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최루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주먹질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흥분한 시위대 일부가 거기에 뛰어들면서 긴장이 형성된다. 사실 시위대를 공격하고 자극하는 게 경찰만은 아니다. ‘아큐파이 메인(Occupy Maine)’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는 지난주 새벽에 누군가 사제 화학폭탄을 던지고 달아났다. 폭발음과 함께 맹독성 화학물질이 분출되었는데 다행히 잠자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폭탄이 떨어졌고 점거자들이 민첩하게 대응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는 폭력과 관련해서 두 개의 위험한 전선이 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하나는 경찰, 다른 하나는 극우 시민 세력.

스캇 올슨에 연대하기 위한 뉴욕시민들의 행진(사진출처: AP)

스캇 올슨에 연대하기 위한 뉴욕시민들의 행진(사진출처: AP)

한국의 2008년 시위에서도 경험한 바이지만 ‘폭력’ 문제가 중심 이슈가 되는 것은 시위에 매우 치명적이다. 경찰은 어쩌면 그런 것을 노리는 지도 모른다. 점거의 이유, 점거 과정에서 진행된 다양한 실험들이 그 이슈에 묻혀버린다. 폭력 이슈는 시위를 낚는 일종의 그물이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그것은 법을 지키며 투쟁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폭력성과 공격성이 오인되는 것처럼 비폭력성과 준법성이 오인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점거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굴하지 않고’ 지금의 방향, 지금의 공격성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지금의 문제제기를 단호하게 더 밀고 가는 것이다.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더 오래 점거해야 한다.

폭력은 아무리 강자가 휘두르더라도 방어적이고 반동적인 것이다. 폭력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힘’, 즉 ‘능력’과 분리된 ‘힘’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상황을 다룰 수 없는 ‘무능력’으로부터 나오는 힘이며, 무엇보다 상황의 변화를 가로막으려는 부정의 의지의 산물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근대의 표상 체계는 이렇게 형성된 폭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능력을 포기하거나 박탈함으로써(근대 정치철학의 용어를 빌자면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거기에 입각해서 힘을 도출해내는 표상들. 법, 화폐, 언어 등이 그렇다. 법의 힘, 화폐의 힘, 언어의 힘은, 그 존재들의 불가피성이 입증될 때조차, 폭력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때, 화폐를 갖고 있지 못할 때, 자신의 처지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폭력에 노출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법과 화폐, 언어의 지위야 말로 폭력적으로 구축된 것들이다. 즉 그것의 부재가 폭력을 불러오기 이전에 그것의 존재가 폭력을 가능케 하는 셈이다.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여기서 더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폭력을 비판한다는 것은 법을 준수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투쟁을 법 너머, 언어 너머, 화폐 너머로까지 밀고 가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을 따름이다.

3. 폭력적이 아니라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법의 저편, 말의 저편, 화폐의 저편까지 나아가는 데 써야 한다. 우리가 출발한 곳이 법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고 내친 곳이고, 우리의 말 문이 닫힌 곳이고, 우리가 돈 없어 쫓겨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법과 언어, 화폐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법의 변형, 말의 변형, 화폐의 변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권력을 변형시키고 의미를 변형시키고 가치를 변형시킬 수 있는 곳에 도달해야 한다.

나는 지난 리포트에서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는 시위가 ‘삶의 기본 유형’을 바꾸는 데 의의가 있다고 적은 바 있다. 짧게는 지난 수십 년간(신자유주의), 길게는 어쩌면 수백 년간(자본주의) 지속된 ‘삶의 잣대’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고 관건이라고 했다. 권력의 의미를 바꾸지 않은 채 권력을 차지하는 것, 언어의 의미를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장악하는 것, 화폐의 의미를 바꾸지 않은 채 돈을 배당받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우리만 고용해주면 된다든가, 우리 수당만 인상해주면 된다든가, 모두가 허망한 일이다.

이 점에서 운동을 논하는 데 ‘폭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급진성’이다. 한마디로 어디까지 나아가느냐는 것이다. 맑스의 말처럼 ‘급진적’이라는 것은 ‘뿌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파농의 표현을 빌면 ‘백지상태’에 이르는 것이다(사실 파농이 말한 ‘폭력’의 의의는 사르트르가 붙인 서문에서 유명해진 문장 ‘유럽인을 쏘아죽이면 일석이조’라는 식의 ‘살기’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의 뿌리를 바꾸려고 하는, 과도기 없는 ‘절대적 대체’를 주장한 ‘비타협성’에 있다. 그가 말한 폭력은 위협용 수단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절대적 변형’ 그 자체이다.). 지난 3년을 파고 드느냐, 지난 5년을 파고 드느냐, 지난 수십 년을 파고드느냐, 지난 수백 년을 파고 드느냐, 이번 점거가 어느 지층까지 도달하느냐가 정말로 중요하다. 깊숙이 들어간 만큼 그는 그만큼 새로운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이 중단되고 그 중단지점이 표시될 수는 있지만 ‘타협’이나 ‘거래’가 있을 수는 없다(점거 시위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종종 그것을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내기 위한 지렛대로 쓰는 일이 자주 있다. 아마 오바마 정부도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점거를 ‘위협용 칼’로 변질시킨다).

조폭이 휘두르는 폭력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급진적이지 않는 이유, 그것은 그가 칼을 휘두르며 ‘거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재벌회장이나 대통령처럼 이 체제의 똑같은 신봉자이다. 그는 돈의 의미를 바꾸지 않은 채 다만 돈을 차지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권력의 의미를 바꾸지 않은 채 다만 권력을 손에 넣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고집, 단 한 사람의 외침이 수만, 수십만의 위협적인 힘보다 급진적일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은 수단으로서든, 목적으로서든 고려되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도 ‘폭력’이라고 말한다면, 정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폭력을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폭력’인 사람이라고. 다만 그의 급진적 존재 자체가 폭력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고. 그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사회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고. 그의 점거는 중지될지 모르나 그는 타협하지 않는다고.

뉴욕에는 10월 날씨로는 이례적으로 눈이 많이 내렸다. 피켓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뉴욕에는 10월 날씨로는 이례적으로 눈이 많이 내렸다. 피켓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한 점거자가 방한을 위해 비닐로 바지를 싸고 있다. 텐트 위에 눈이 쌓였다(29일).

한 점거자가 방한을 위해 비닐로 바지를 싸고 있다. 텐트 위에 눈이 쌓였다(29일).

나는 최근 80일 가까이 ‘활동보조 자부담 폐지’를 위해 싸우고 승리한 장애인차별철폐연대, 그리고 300일째 크레인 위에서 비타협적 점거를 진행하고 있는 김진숙씨를 떠올리고 있다. 그들은 폭력적이지 않지만 비타협적이고 급진적이다. 월스트리트의 점거자들은 이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폭력을 행사할 필요도 타협을 할 필요도 없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 온 삶의 기본 유형에 대해서는 단호한 거절을 행해야 한다. 이 단절이 어떤 한계에 부딪힐 수는 있지만 이것을 양보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써는 최대한 멀리 가야 한다.

응답 3개

  1. […]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5-폭력 비판을 위하여 No Comments » 댓글을 취소하려면 여기를 누르십시오 […]

  2. gebalice말하길

    체재내에서 체재밖을 지향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체재중심의

    폭력에 노출됩니다. ‘자기희생’은 필수적이며 저항으로서의

    비폭력주의-간디적인 의미에서-를 유지한다면 “매맞을”수밖에

    없습니다. “멀리 간다는” “언어”는 쉽지만 매 맞으며 멀리가는

    “현실”은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 […]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5-폭력 비판을 위하여 No Comments » 댓글을 취소하려면 여기를 누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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