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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6 (번역)-불가능한 것을 실행하기 -합의 만들기에 관하여

- 고병권(수유너머R)

*데이빗 그레이버가 쓴 이 글은 제너럴 어셈블리의 의미를 아주 잘 밝혀 놓은 것으로 <the Occupied Wall Street Journal> 3호에 실렸다.

*참고로 대괄호[ ] 속에 있는 말들은 번역자가 문맥을 부드럽게 하거나 내용을 부연하기 위해 넣은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기 -합의 만들기에 관하여

Enacting the Impossible (On Consensus Decision Making)

데이빗 그레이버(David Graeber)

2011년 8월 2일, 나중에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가 될 초기 모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보울링 그린(Bowling Green)에 둥글게 앉았다. 우리가 언젠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그런 사회 운동을 위한 ‘프로세스 커미티(진행위원회, process committee)’라고 명명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이들은 아주 중요한 결정에 대해 숙고했다. 우리의 꿈은 뉴욕 제너럴 어셈블리를 만드는 것 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생겨나기를 바라는 민주적 어셈블리들의 모델로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어셈블리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

그때 거기 사람들 중 아나키스트들이 당시에는 완전히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인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바로 지금 이 커미티처럼 사람들이 운영하게 하면 되잖아. 바로 컨센서스(합의, consensus)를 통하는 것 말야.

뉴욕시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워싱턴 스퀘어로 행진을 했다. 여기서 최소한 두 개의 제너럴 어셈블리가 열렸다. (사진: Stephen O’Byrne)

뉴욕시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워싱턴 스퀘어로 행진을 했다. 여기서 최소한 두 개의 제너럴 어셈블리가 열렸다. (사진: Stephen O’Byrne)

그건 분명히 분명 승산이 없는 도박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누구도 과거에 이런 걸 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컨센서스 프로세스는 대표자회의(spokes-councils) —각 집단(affinity groups)마다 한 명의 ‘대표자(spoke)’를 보내 구성되는 회의—에서는 이 프로세스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바 있지만 우리가 뉴욕시에 만들기를 소망했던 것과 같은 대중적 어셈블리(대중집회)에서는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제너럴 어셈블리에서도 그것은 시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컨센서스는 사실 우리의 원칙들에 가장 부합하는 접근법이기는 했다. 그래서 우리는 [결단을 내려] 도약을 하기로 했다.

3개월이 지난 미국 전역에서 지금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어셈블리들이 컨센서스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결정은 투표 없이 일반적 동의(general assent)를 통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시행되고 있다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다른 현상들, 즉 사랑이나 혁명, 어쩌면 생명 자체(입자물리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말이다)까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어나는 그런 현상들처럼 지금 일어나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에서 채택된 직접 민주주의의 프로세스는 미국 급진주의의 역사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그것은 [6-70년대]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과 민주주의 학생연맹(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에서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형태는 아나키즘에서만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나 심지어 종교적인(영적인, spiritual) 전통(퀘이커와 미국원주민의 전통)에서 나온 운동으로부터도 발전되어 온 것이다. 직접적이고 컨센서스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아나키즘에 확고하게 수용되고 또 아나키즘 자체와 동일시되어 온 이유는 아나키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리란 다음과 같다. 아이처럼 취급된 인간이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만드는 것은 마치 그들이 이미 그런 존재인 것처럼 북돋아주는 것이다.

컨센서스는 결코 만장일치의 투표 시스템이 아니다; “블록(block)”은 결코 반대표(No vote)가 아니라 거부권의 행사(비토, veto)이다. [참고로 어떤 의견에 대해 사람들이 손짓을 이용해서 ‘블록’을 표시할 때 그것은 그 의견이나 결정에 따르지 않겠다는 표시이다.] 근본적인 윤리적 원칙들이 위배되었다고 선언하며 개입하는 고등법원(High Court)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판사의 지위는 그런 비토를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누구에게나 허용된다. 참여자들은 만약 논의 사항이 단지 자신들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수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원칙에 관한 것임을 느낀다면 자신들이 언제든 논의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걸 안다. 이는 세부 사항에 대한 절충이 쉬워진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정말 핵심적인 것은 창의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을 향한 프로세스이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최종결정을 도출하고 재도출하는 데 있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최종결정에 어떻게 도달하느냐 —블록이 있는지를 묻든, 다수가 손을 흔들어대든—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논리를 통해서는 직접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인간적 연대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행동을 통해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이다. 미국 전역에 걸쳐 여기저기 공원과 광장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참여하면서 그것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우리의 궁극적 가치라는 걸,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민중(인민, people)’으로 정의해주는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아주 교묘하고도 지속적인 방식으로,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가르침이 우리에게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말이다.

이런 가르침의 오류를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많은 “불가능한” 것들도 해낼 수 있을지 몰라. 그리고는 여기 저기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응답 1개

  1. Multitude말하길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___^

    원문 링크 ^^
    http://occupiedmedia.com/2011/10/enacting-the-im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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