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월스트리트에서 듣는 후쿠시마 이야기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1.

최근 뉴욕을 방문한 일군의 일본 운동가들로부터  후쿠시마 원전 파괴로 인해 빚어진 비극에 일본인들이 어떻게 대응하며 살고 있는지를 듣고 같이 얘기를 나눠볼 기회가 있었다. 일본출신 뉴욕 운동가 사부 코소(Sabu Kohso)와 유코 토노히라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이번의 방문에는 <현대사상> 전 편집장 이케가미 요시히코(池上善彦), 운동가 키노시타 치가야, 그리고 고토 아유미 세 사람이 방사능과 함께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지혜롭게 새로운 형태의 삶을 만들어 가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www.jfissures.org/todos-somos-japon-presents-global-significance-of-3-11-fukushima/ 참조.)

첫날 심포지엄에는 몇몇 미국의 학자-운동가들이 같이 참가해 그들이 보는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생각을 개진했다. 운동가이자 캐나다 맥길 대학 일본문학 교수인 에이드리안 헐리(Adrienne Hurley)는 원전과 핵무기 철폐운동을 과거 미국의 노예제 철폐운동 (Abolitionist Movement)에 뿌리를 두고 여러 이슈로 확장된 ‘철폐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며 그 역사적 연속성과 정당성을 설파하였고 자율주의 맑시스트 여성운동가인 실비아 페더리치(Silvia Federici, <Caliban and the Witch>의 저자)는 일본의 원전으로 인한 비극이 우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의 일이 아니라 “여기가 바로 후쿠시마”라고 강조하며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며칠 뒤에 있었던 비디오 상영 행사가 끝나고 늦은 시간까지 긴 토론이 이어졌는데 일본의 방문자들은 원자폭탄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피해자인 일본이 적극적으로 원전을 유치하게 된 배경,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 등을 얘기했다. 여기에서는 상영된 두 편의 다큐멘터리의 핵심적 내용과 토론에서 개진된 내용들을 토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이케가미 씨의 발언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소개되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마지막 날 상영된 <Radioactivists – Protest in Japan since Fukushima>는 볼 수 없었다.)

<원폭의 상흔(Atomic Wounds)>이라는 영국 다큐멘터리는 원폭 피해자인 고령의 의사가 가까이서 목격한 원폭 피해의 끔찍함과 원폭 투하의 배경 그리고 다른 피폭자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과 일본 정부의 기만적 행태 등을 비춘다. 원폭 투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경쟁자인 소련을 향한 무력시위였다는 주장(학계에서 상당히 인정받고 있는 해석)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전쟁을 빙자한 대규모 생체실험이라는 과격한 견해를 제시하며 히로시마 항공사진을 계속 찍어 판독한 결과 사람들이 집과 건물 밖에 가장 많이 나와 있는 시간인 오전 8시15분에 폭탄을 투하한 것이라는 주장도 곁들인다. (논쟁의 여지가 많으나 원폭투하는 비백인을 향한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적 대응이라는 학술적 견해와 괘를 같이 한다.)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방사능 피해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 미국이 1946년부터 1975까지 운영했던 ‘원폭 피해자 위원회’(ABCC Atomic Bomb Casualty Commission)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에 피폭자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전혀 치료는 하지 않은 채 피해자들을 시험대상으로 취급하며 과학적 테이타를 구축한다. 피폭자가 죽으면 반드시 부검을 해서 장기를 보관 저장해 두었는데 그 가운데는 죽은 태아의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부검을 한 뒤에 짚으로 속을 채운 사체를 가족에게 인계했는데 가족들이 이를 항의하자 나중에는 사체를 아예 돌려주지 않고 그냥 폐기처분해 버렸다한다.

키노시타씨에 의하면 1951년까지는 일본에서 원자력과 원폭피해에 관한 어떤 연구도 발표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상태에서 ABCC는 미국이 만들어낸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독점한다. 그렇게 원자력의 위험성을 은폐하고 일본 우파의 협력을 바탕으로 일본이 원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히로시마 대학과 나가사키 대학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원자력 연구자들을 양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일부가 체르노빌에서 원전이 폭발했을 때 파견되어 갑상선 이상 외에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엉터리 보고서를 내어놓은 전력이 있고 이들이 주축이 된 조사단이 후쿠시마 사태에 대해서도 현지조사 후에 별 문제 없다는 보고서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은폐와 기만을 통해 후쿠시마와 히로시마는 연결된다.

상영된 다른 다큐멘터리는 1995년 영국에서 방영된 <Nuclear Ginza-Hidden Labor Under Radiation>라는 작품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에서 누가 일을 하는가를 추적한 것인데 매년 한 번씩 원전을 멈추고 전체적 점검과 정비를 할 때 투입되었던 사람들을 추적해 그들이 어떤 증상으로 고생하거나 사망했는지를 고발한 프로그램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극심한 차별을 받아온 ‘부라쿠민(部落民)’들이 많이 동원되었고 하청과 재하청을 통해 모집되는 사람들은 훈련이나 안전교육, 보호 장비도 없이 방사능 오염이 극심한 곳에서 청소나 정비 등의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나중에 방사능 노출 때문에 생긴 질병이나 사망 따위로 소송을 해도 증거부족으로 기각되고 언론에라도 알리려 하는 경우는 돈으로 입막음을 해 증언을 해줄 사람을 찾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원전은 힘없는 사람들을 엄청난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유지되는 정당화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2.

‘관리’와 ‘효율’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라고 알려진 일본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정부는 기본적으로 부인과 은폐 외에 아무런 의미있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며 그저 문제가 사라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가 하는 짓이라곤 후쿠시마와 그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을 안전하다며 전국으로 유통시키고, 방사능 오염지역 폐기물을 전국에 분산 처리하여 재앙을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기상천외한 짓이라는 것이 참가자들의 전언이다. (농산물의 경우는 좀 미묘하다. 피해지역 사람들의 생계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유통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 정부가 근본적 문제라고 여겨진다.)

일본이 엄청난 위험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핵무기를 가지려는 야심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고, 핵무기는 몇몇 강대국들이 독점한 상태에서 확산을 막고 핵발전은 안전한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며 상업적으로 부추기는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이중적 행보도 도마에 올랐다. 핵무기 개발이 한창이었던 1940년대에서부터 우라늄 광산에서 일했던 수많은 나바호 원주민들이 폐암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 갔으며 그들의 생활의 터전도 방사능오염으로 죽음의 마을로 변해버린 역사의 뒷골목도 다시 언급되었다. 과학기술을 동원한 자본과 권력은 그런 약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의 무덤 위에서 핵폭탄을 만들어 떨어뜨리고 원전을 만들어 팔아먹으며 그들만을 위한 “지옥위에 세워진 천국”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후쿠시마 사태가 제기하는 문제는 총체적이고 다층적이다. 재해란 보통 아무리 피해가 크고 사상자가 많아도 그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재앙이 물러가면 앞서 간 이들을 보내고 산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주변을 추스르고 다시 삶을 꾸려간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남을 지라고 외형의 삶은 다시 평상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재앙의 끝이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삶의 비가역성을 강요하는 특별한 형태의 재앙이다. 많은 이들이 최소 240년 (세시움-137의 반감기 30년의 여덟 배) 아마도 실제로는 수백 년간 방사능이라는 오감으로 전혀 인지되지 않는 괴물이 야기하는 끊임없는 ‘저강도 노출’(low level exposure)과 물, 공기, 식품의 섭취로 몸에 축적된 방사능이 몸 안에서 일으키는 ‘내부 노출’(internal exposure)에 시달리며 살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덧붙여 과학과 자본 그리고 정치권력 각각에 그리고 그들의 연계에 심각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과학이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온갖 위험과 재앙을 팔아먹고 있는 자본은 과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 뒤에는 누가 있는지 그리고 이들과 한통속이 되어 다수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과학기술의 상업화를 추동하고 추인하는 권력은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가? 등등의 답하기 어려운 큰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이 이전에 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체르노빌이 있었고, 방사능 노출 생체 실험에 서서히 무너져간 죄수와 군인들이 있었고 우라늄에 죽어가던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있었다. 물어졌지만 답해지지 않은 질문들이 돌아온 것뿐이다. 또 하나의 엄청난 재앙과 함께. 히로시마는 체르노빌의 미래였고 체르노빌은 후쿠시마의 미래였으며 후쿠시마는 우리의 미래로 다시 현재로 다가올 것이다.

후쿠시마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전이란 결국 에너지 공급을 위한 것이고 에너지는 우리의 삶의 모습, 그 구체적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상적 삶의 형태이며 그런 형태의 삶을 강요하는 힘들과 거기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삶의 관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문제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케가미 씨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문제를 분석한다. “우리가 원자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원전에 의해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며 삶을 꾸려감으로써 실은 테크놀로지[를 만들고 조작하고 팔아먹는 지식-자본-권력]에 의해 규제당하고 조종당하며 살았다. 작금의 사태는 그 테크놀로지가 우리를 공격해온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삶의 비가역성과 재앙의 상시화 속에서 일본인들이 삶을 꾸려가는 다양한 모습은 본지에 실리는 신지영의 탁월한 일본발 보고서들로 인해 꽤 깊숙이 알게 되었다. 일본인 참가자들도 개인과 단체들이 방사능 측정 장비를 구입해 집과 학교, 동네 놀이터 그리고 물과 근처 가계들이 파는 식품의 방사능을 측정하고 결과를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며 힘겹게 그러나 용기를 잃지 않고 지혜를 키우며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결기’마저 느낄 수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을 소유, 운영하고 있는 동경전력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여성.

후쿠시마 원전을 소유, 운영하고 있는 동경전력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 여성.

원전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한 청중의 우려에 찬 질문에 이케가미 씨는 “없이 살면 된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그러나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답변을 하여 청중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원전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 것은 1%의 지식-자본-권력 카르텔의 음모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나는 들었다. 그는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대체 에너지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난 거기에 별 관심이 없다. 대체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가 억지 부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우리는 지금 배우고 있으며 실제로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는 요지의 말을 덧붙였다.

3.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그 구체적 모습을 만들어 내라는 정언명령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힘은 지금 월스트리트를 기점으로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주의) 점거 운동의 동력과 정확히 성격을 같이 한다. 이윤은 철저히 사유화하고 부채는 사회화해 다수에게 떠넘기는 월스트리트 조폭들의 행태는 땅과 하늘, 바다, 천연자원, 전통의 지혜, 공공의 지식 같은 선한 공동자산(good commons)은 독점 사유화하고 오염, 재앙, 질병 따위의 악한 공동자산(bad commons)은 다수에게 덮어씌워 타인의 고통과 불행조차도 이윤추구의 계기로만 인식하는 지식-자본-권력 1%의 카르텔의 행태의 한 모습일 뿐이다. 원전도 마찬가지다. 극소수의 원자력 전문가와 자본가, 정치권력이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나머지 99%를 인질로 잡고 벌이는 위험천만한 에너지 생산 게임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삶을 얘기할 수는 없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등장한 구호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에 등장한 구호

그러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드는 노력 없이 막강한 카르텔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쿠시마 사태는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으면 다가올 수밖에 없는 미래의 가시화이며 따라서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곧 우리 모두의 싸움이며 우리 모두가 주목하고 귀 기울이고 연대해야 할 운동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법, 귀 기울이는 법, 그리고 연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아마도 후쿠시마는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데 소중한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으리라.

세계에서 가장 원자력 발전소의 밀도가 높은 나라의 하나인 한국에서 그것도 걸핏하면 북의 위협, 전쟁을 입에 달고 살면서 원전을 더 세우겠다하고 원전을 수출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철딱서니 없는 권력자를 둔 한국의 미래는 위태롭다. (일본도 월남에 원전을 세우기로 합의했었고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도 그대로 진행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경제적 수익 나부랭이 따위 가지고 숫자장난이나 치고 있다가 우리 모두 정말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지금의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을까?

이케가미 씨의 말로 끝맺음을 대신한다.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이 싸움은 우리 삶의 근본을 바꾸는 싸움이며 이 위기와 긴장이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싸움에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헌신’이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응답 2개

  1. 카모마일말하길

    한방에 훅 간다…
    원자력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한 표현이네요.

  2. […] 월스트리트에서 듣는 후쿠시마 이야기 — “최근 뉴욕을 방문한 일군의 일본 운동가들로부터 후쿠시마 원전 파괴로 인해 빚어진 비극에 일본인들이 어떻게 대응하며 살고 있는지를 듣고 같이 얘기를 나눠볼 기회가 있었다. …” (via Weekly 수유너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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