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독서에 대하여 – 2. 독서와 자아실현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수안아, 이제 인간에게는 왜 다른 동물보다 지적인 호기심이 훨씬 많게 되었는지 얘기해 보자. 그리고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면 왜 즐거워지는지도 생각해보자.

동물들은 생명을 이어갈 에너지를 얻고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알맞은 신체구조로 진화했잖아. 그러나 인간은 수렵이나 채집이나 경작에 특별히 알맞은 신체구조를 가진 것은 아니란다. 수렵에서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없으니까 동물들에 대한 정보를 활용하여 길목에 덫이나 그물을 놓아 생산성을 높여야 했지. 채집물을 쉽게 얻기 위해 채집 경험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활용했으며 경작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인간은 머리를 써서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제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거다.

인간이 머리를 써서 수확물을 많이 거두었을 때 느낀 행복감 바로 그것이 지적인 호기심에 대한 보상이란다. 어떤 문제의 해결에 성공했을 때에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지적인 호기심이 채워졌을 때에 느낀 기쁨과 즐거움 때문이잖니.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알거나 깨달아 살아가며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했을 때에는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인간의 지적인 호기심을 자꾸 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지적인 호기심이 개인을 성숙시키고 문명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된 거야.

그러다가 점차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분업이 생기고 지식과 관련된 전문 분야가 생기고 전문가들이 전문 분야의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고 활용하고 가르치게 되었단다. 지식과 관련된 전문 분야의 활동이 활발했던 사회는 생산성이 높은 문명사회가 되어 다른 사회를 지배하게 되지. 또 그 문명사회 안에서도 대를 이어가는 지식인들만이 전문 지식을 가지고 무지한 백성을 지배하게 되고. 그래서 인류역사는 대부분 지식의 힘이 육체의 힘을 지배했다는 얘기로 채워진단다. 가까운 중국사를 보아도 북방에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육체의 힘을 길러 중국에 쳐들어가서 일시적으로는 지배하지만 그들은 결국은 중국의 문화나 문명에 동화되어 오늘날 거대한 중국인구와 영토를 불리는데 보탬이 되었을 뿐이고 그들의 문화는 중국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을 뿐 오늘날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되는 논문의 절반을 미국이 차지하는데 미국이 전세계의 질서를 규정하는 힘 즉 지배적인 영향력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란다. 지배하기 위해 지식을 가지려는 것은 잘못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야심적인 정치가들은 지식을 힘으로 바꾸어 남을 지배하려는데 쓰려고 한단다.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오늘날에는 직업이 세습되는 것이 아니니까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만 그 직업에서 생산성을 높이는데 필요한 지식을 요구하는 취업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취업을 하거나 하는 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갈수록 더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라는 오늘날에는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컴퓨터라는 가상 지면에 저장하고 활용하게 되었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이며 그 글의 주제가 되므로 어떤 글이든지 문제와 주제가 없는 글은 없다.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살아가며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묶인 것이 풀리도록 그 문제와 관련되는 개념이나 지식과 정보나 이론들을 관련짓는다. 이처럼 필요한 문제를 잘 해결하는 글, 즉 주제를 잘 뒷받침하여 풀어놓은 글은 잘 조직된 글이나 아무래도 좀 길어지므로 컴퓨터의 가상지면보다 집중하기 좋은 책의 실제 지면에 더 많이 저장된다.(실린다.) 그래서 아직은 조직적이면서도 긴 글에 집중하기 좋은 책이 많이 읽힌다.

또 하나, 비슷한 이야기지만 가상 화면에서 해석된 이미지를 보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과 글 속에서 묘사를 보고 추리·상상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어느 것이 더 재미있으며 어느 것이 진실(주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는 글과 영화에 따라 다르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글이 원작이며 영화는 일종의 해석된 이미지이다. 해석이 유용할 수 있지만 빗나갈 수도 있다. 영화가 감명을 주었다면 원작도 영화 못하지 않는 감명을 줄 것이니까 원작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책의 글 속의 묘사를 추리·상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은 가상화면에서 주어진 이미지를 이어가는 것보다 훨씬 집중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집중할 수만 있다면 더 재미있게 더 깊이 주제를 경험할 수도 있다.

책을 읽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글은 언어를 매개로 의사를 소통하므로 언어 사용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고는 상징들을 조작하는 과정이다. 도형 상징으로 공간을 추리하고 숫자 상징으로 수리를 추리하는 것보다 언어 상징으로 개념을 조작하여 사고하는 언어추리가 인간의 사고활동에서 가장 큰 부분이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사용능력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고력이며 동시에 문제 해결 능력이기도 하다.

언어 상징을 사용하는 사고력을 기르려면 당연히 수준 높은 언어를 많이 경험해야 한다. 일상 언어에서는 아무리 높은 수준의 고담준론을 펼치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조직한 한 편의 글만은 못하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다면 저절로 언어능력이 생기게 마련이라 수학능력시험에서 언어 영역의 문제는 실수로 몇 개 틀릴 수는 있지만 일정한 고득점을 유지할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학생들의 언어능력은 독서와 절대적인 상관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언어능력은 바로 사고 능력이며 이것이 있을 때 학문을 잘하고 사무를 잘 처리할 수 있으므로 언어능력은 운동선수의 기초체력과도 같은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지식의 힘으로 남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나 또는 취업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특정 분야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가져야만 취업을 하거나 생산성을 높여 벌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존과 번식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꽃피워 개체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전인격인적 자아실현을 위해서 책을 읽고 우리를 둘러싼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하여 폭넓게 알아야만 인간과 사회와 자연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직업적인 지식과 기능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 인문학적인 교양도 필요하고 사람들이 모여 살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사회적인 지성도 필요하고 자연의 오묘함을 알고 이용하고 보존하기 위해 과학적 지식과 합리성도 가져야 하며 예술을 즐기는 감상능력을 길러야 삶이 더욱 풍성해진단다. 이렇게 성숙한 인간으로 살려면 자기완성을 향하여 죽는 순간까지 책을 들고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인간에게 지적인 호기심과 그에 따른 즐거움이 생기는 진화 과정 그리고 책과 문명의 발달과정을 살펴보았어. 개인의 성장과정에서도 진화와 똑같은 발달과정을 보인단다. 어려서 타고난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너는 끝없이 물었고 네 엄마처럼 이를 귀찮게 여기기는커녕 새로운 것을 묻는 것을 대견히 여겨 만족스럽게 대답하면 너는 새로운 만족을 찾아 자꾸 새로운 것을 묻는다. 그러나 부모가 ‘너는 왜 쓸데없는 것을 묻니’ 또는 ‘크면 알게 될 거야’하면서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않거나 못하면 더 이상 묻지 않게 된다. 그러면 문명이 쇠퇴하듯이 그 아이의 지적인 호기심이 자꾸만 식어진다. 아이에게 지적이 호기심이 식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으로서의 생명력이 쇠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독서에는 즐거움이 따른다. 그리고 모든 책은 궁금했던 것을 시원하게 풀어주어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자기를 알아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므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의 하나는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하여 일생동안 자기를 대신하여 책이 자기완성의 길로 인도하게 하는 거란다. 이것이 자식을 기르는 책임의 반절에 가까운데도 현실에서는 ‘공부해야지 왜 딴 책을 꺼내느냐’고 교과서 아닌 책은 공부가 아닌 듯이 말하거나 책을 읽을 시간을 없도록 학원으로 몰아붙이니 얼마나 안타까우냐.

글을 읽는다는 것은 읽은 부분으로 미루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여 자기도 모르게 끝없이 지은이에게 묻고 지은이는 다음 글로 그 질문에 계속하려 대답하는 과정이란다. 이를테면 소설을 읽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이랬으니까 이럴 거야’하고 뒷부분을 상상해보고 추리해보면서 그대로 되면 스스로 만족한다. 소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책을 즐겁게 읽는다는 것은 지은이에게 알고 있는 앞부분으로 아직 모르는 뒷부분을 묻고 지은이도 그 물음에 계속해서 대답하는 과정이란다. 읽는다는 것은 묻고 대답하는 진지한 대화이지. 그러나 지은이의 대답이 너무 뻔하면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고 너무 어려우면 호기심이 풀리지 않아 식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 지겨운 일이 될 것이다.

또 한 편 글을 즐겁게 읽는다는 것은 동화나 소설만이 아니라 모든 글에서 자기가 등장인물이나 화자(글쓴이)가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상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한다는 것을 뜻한단다. 읽는다는 것은 이미 읽어서 알게 된 화자의 인식체계나 가치체계로 만들어진 화자의 안경(관점,인식틑)을 쓰고 사물을 보며 이미 알게 된 성격(행동원리들의 묶음)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란다. 읽는다는 것은 마치 무당이 귀신에 씌워 귀신 행세를 하듯이 화자에 씌워 화자의 감정으로 말하고 행동하기이며, 그래서 자신을 화자와 동일시하기이며, 화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이다. 읽는 동안 재미가 있었다면 이러한 공감하기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지적 호기심이나 그 호기심이 채워지는 공감이 있었다는 증거는 재미라는 말이다.

그러다가 가끔은 화자의 안경을 벗고 자기 안경으로 고쳐 쓴 다음 ‘그게 사실인가’ ‘달리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는 없는가’ ‘그게 내게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다는 건가’ 하고 읽은 것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자신의 인식 체계나 가치 체계 안에 넣어 재배치하고 재구성해본다. 그러면 읽은 것에 비추어 나 자신이 누군지 새삼 깨달으면서 자신이 부쩍 커진 느낌에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여기는데 이것 또한 책을 읽는 커다란 즐거움의 하나란다.

할아버지가 고등학교에서 수학능력 시험을 대비하여 수험생을 대상으로 언어 영역의 문제풀이를 할 때 되풀이하던 말이 있단다. 특히 문예문 그 중 시의 독해와 감상 문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먼저 화자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강조한다. 감정 이입하기, 즉 입장 바꿔 생각하기, 화자와 동일시하기, 화자로 분장하기를 계속하여 요구한단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은 사물을 자기의 경험에 비춰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 상황에 자신의 어떤 경험을 대입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가 아니라 화자나 글쓴이다.

만약에 화자의 안경(관점) 대신 자기 안경을 쓰고 글을 읽는다면 언제나 자신의 엉뚱한 경험으로 만들어진 선입관념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다. 지금 화자가 놓여 있는 상황을 알고 화자의 심정과 행동에 공감하고 싶다면 그의 안경을 쓰고 그가 놓인 상황 속에 들어가서 눈으로 읽을게 아니라 그 상황에 알맞는 화자의 목소리로 나직이 시(또는 소설)를 읊조려보아야 비로소 화자의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다. 문제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공감하기란다. 공감하기만 하면 문학의 문제는 다 풀리게 되어 있으니까.

글은 말과 달리 정리된 생각을 조리 있게 쓴 것이잖아. 책에 있는 글들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 즐거움을 줄 만큼 새로운 사실에 대한 새롭고도 정리된 생각들이지. 그러니 글쓴이와 함께 생각에 빠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생각하는 힘이 늘어나겠어. 좋은 글을 즐겁게 읽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글쓴이를 따라서 개념적인 사고, 사실적인 사고, 분석적인 사고, 상상적인 사고, 추리적인 사고, 논리적인 사고, 비판적인 사고, 종합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으니 생각하는 힘이 저절로 길러지지 않겠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빨리 둑서의 즐거움에 푸~ㄱ 빠져 자기완성의 여행길을 홀로 떠나기를 바라서란다. 엄마 아빠나 선생님들이 너의 여행길을 끝까지 안내해주지도 안내할 수도 없단다. 독서가 너를 안내하는 방법은 즐거움으로 너를 끌어들이는 것이란다. 그리고 또 하나, 독서에는 발달 단계라는 길이 있어 책들이 알아서 단계별로 길잡이 노릇을 한단다. 유아기에는 그림책을 보며 엄마의 동화를 듣다가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만화책, 그리고 위인전, 추리소설, 역사소설, 문학 소설, 수필과 시, 교양서적, 전문서적, 순서로 너를 안내할 것이다. 어떤 단계를 충분히 많이 읽으면 내용이 너무 뻔해서 지적인 호기심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지겨워지면 저절로 다음 단계로 눈을 돌리게 마련이란다. 그러니까 네가 어떤 종류의 책을 읽어 재미있으면 너는 바로 그 단계에 도달한 것이란다. 그러니 너는 거기서 시작하면 되지. 어느 단계에서 시작하든지 정신 연령과 일치하는 독서 연령에 맞추어 책이 너를 안내할 것이다.

수안아, 이번에도 길어져서 미안하다. 잔소리하는 사람의 상투적인 말로 끝내자.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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