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억압된 상실감이 분노로 튀어나오는 순간! <평범한 날들>

- 황진미

갑작스러운 분노의 표출은 왜 일어나는 걸까? 정신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억압되어 있던 상실감이나 죄의식 등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영화 <평범한 날들>은 결핍과 상실감이 숨어 있다가 분노로 표출되는 순간을 그린 옴니버스 영화이다. 세편의 에피소드는 각각 30대, 20대, 10대의 인물들이 처한 상실의 상황을 그린다. 그러나 이들은 그다지 상처받지 않은 듯하다. 영화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한 날들’을 보내는 듯하다가, 느닷없는 순간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분출하는 지점을 예리하게 그린다.

30대 남자 한철(송새벽)은 보험펀드상품을 파는 영업사원이다. 아침에 아내와 딸의 배웅을 받고, 출근길에 어떤 여성의 스타킹에 눈길이 간다. 그다지 신경 쏟지 않고 보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화면들이 흘러가는 것 같다. 그런데 조금씩 이상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동료와 대화하거나 고객과 상담할 때 웅얼웅얼 말끝을 흐리고, 성매매 업소를 드나드는 가하면, 불면증을 호소하고 자꾸만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없이 나른하게 보였던 가족과의 장면에서 정작 아내나 딸의 모습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음이 떠오른다. 점차 그의 집이 엉망진창이라는 점이 눈에 띄고 그가 상당히 신경질적이라는 사실이 점차 눈에 들어온다. 맞다. 그의 아내와 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 혼자 느끼는 환영적 감각이다. 영화는 자세하게 사연을 설명하지 않지만, 화재 사고로 딸이 죽었고 유가족 모임에서 만난 다른 희생자 아이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그 여성이 남편이 일을 크게 만들어 상심한 한철의 아내가 자살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과 아내를 자살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이 있는 그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직장을 다니며 살아가지만, 불쑥불쑥 죽음충동을 느끼는가 하면 이따금 성매매 여성 등에게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분출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20대 여성 효리(한예리)는 봉제 소품을 만드는 디자이너이다. 5년이나 사귄 애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며칠 후 골목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나쁜 일을 연속으로 당한 것 치고 효리는 씩씩한 편이다. 퇴원 후 엄마를 따라 고향집에 머물면서 요양하는 모습도 겉으로 보기엔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나쁜 아버지로 회상하는 모습에서 효리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상실한 것으로 인해 깊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대상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한다. 즉 잃은 것에 대해서 깊이 애도하지 않고 별것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하며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애인과의 이별에도 애써 태연하려 하는 것도 충분히 슬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노력은 문제를 낳는다. 효리는 몸이 다 나아서 서울로 돌아오지만,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계속 다친 다리가 아프고 움직일 수가 없다. 실제 몸의 상처는 다 나았지만, 그녀는 정신적으로는 계속 몸이 아프고 장애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녀의 교통사고로 인한 몸의 상처는 실연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결부되어 있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실연의 아픔은 몸의 아픔으로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분노발작으로 생면부지의 여고생을 폭행한다. 여고생이 다리를 저는 행동을 흉내 내며 비웃는 듯 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여고생의 행동이 무엇을 비웃은 것인지 분명치도 않고, 더구나 효리는 다리를 절지도 않지만, 효리는 자신의 상처와 인격이 비웃음 당한다는 생각에 갑작스러운 분노를 표출한다. 그녀의 대사, “난, 괜찮지가 않아, 괜찮지가 않다구” 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맞다. 괜찮지가 않다. 빨리 괜찮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상처에 몰입하지 못했던 까닭에 오히려 낫지 않고 오래토록 아픈 상처로 남았다.

10대 후반의 남성 수혁(이주승)은 바리스타이다. 부모 없이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살던 수혁에게 할아버지는 유일한 가족이다. 에피소드의 시작과 동시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수혁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의외로 담담하다. 카페를 정리하고, 지구본을 보다가 유라시아 반도의 맨 끝인 포르투갈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출국준비를 한다. 그러나 우연히 길에서 할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의 차를 발견한다. 수혁은 자전거를 몰고 그 차를 쫓아간다.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오직 차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뿐으로. 몇 번의 놓칠 위기를 겪으면서 수혁의 분노는 점점 더 증폭된다. 차가 들어간 아파트로 뒤쫓아 간 수혁은 남자가 들어간 호실을 잘못 알아, 엉뚱한 남자를 때린다. 그 순간 하필 수혁의 손에는 커피 누를 때 쓰는 금속 뭉치가 들려있다. 엉겁결에 얼굴을 가격당한 남자는 그토록 죽고 싶어 하던 첫 번째 에피소드의 한철이다.

<평범한 날들>이란 제목은 역설적이다. 영화는 ‘평범해 보이지만, 안으로 분열하는 날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 편의 에피소드는 모두 같은 주제를 갖는다. 커다란 상실과 상처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묵직한 정서적 앙금으로 남아 이상한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이 상실을 안은 채,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한 날들’을 살다가 치유되지 못한 정서가 분노로 폭발하는 비등점을 클로즈업 화면에 담는다.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온전히 배우들의 감정표현에 맡겨져 있는데, 송새벽, 한예리, 이주승이 모두 호연을 펼친다.

억압된 분노와 관련하여 최근에 가장 큰 이슈가 된 사건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배우자들이 자살과 돌연사 등으로 2년 사이에 무려 17명이나 사망한 사건이다. 정리해고에 반대하여 77일 동안 물과 음식도 차단된 채 점거파업을 벌였지만, 헬리콥터와 경찰특공대에 의해 파업은 무참하게 진압되었고, 이후 5,000명이 다니던 공장에서 2,500명이 정리해고, 희망퇴직, 무급휴직 등으로 직장을 떠나야 했다. 무급휴직자를 1년 후 복직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있었지만, 회사의 경영이 정상화된 이후에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라는 경력은 다른 직장에도 취업하기 어려운 낙인이 되었다. 이들은 경제난과 사회적 고립, 가정불화를 겪으면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노동환경건강 연구소에 의하면 해고자의 80%이상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올해 3월부터 이들을 집단상담한 정혜신 정신과전문의에 의하면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으며, 배우자는 물론 아이들까지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헬리콥터 소리만 들어도 그날의 기억으로 극심한 불안을 겪는 가하면, 아버지가 경찰차에 끌려가던 것을 보았던 기억 때문에 버스도 타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인 외상이 심각한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회사의 정리해고와 공권력에 의한 강제진압의 희생자들이지만, 그 억울함과 분노를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이 참아가며 당장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덥석 죽음의 낭떠러지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잘 분노해야 한다. 잘 분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슬픔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속담은 이전 세대의 부모님들에겐 성실함을 독려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꿀벌처럼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살다보면 필경 과로사를 하든지 화병이 나든지 자살에 이르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잘 돌봐야 한다. 슬플 때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때는 정확한 대상을 찾아 정확한 분노를 터뜨릴 줄 알아야 한다. “난 괜찮지가 않아, 괜찮지가 않다구” 한예리의 대사가 귓전에 맴돈다.

*이글은 월간 <비타민> 12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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