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14화- 사과의 오솔길 (충남 예산)

- 배문희

여행의 둘째날 아침은 새들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시작됐다. “찌르르 찌르르” 찌르래기가 공기의 현을 두드리자 멧새가 “츄이~ 츄이~” 높은 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참새도 질세라 “치칫 치칫” 화음을 넣었다. 새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귀청이 떨어져라 울리는 자명종 때문에 아침잠에서 깨곤 했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자명종이 있을 수 있다니! 혹시나 지휘자의 날갯짓에 맞춰 노래 부르는 새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창문을 활짝 젖혀 보았다. 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 가로수가 보였다. 가로수 사이로 오솔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날이 밝자마자 당장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건만 아침이 되니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저 신비로운 길을 따라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상하게 길만 보면 미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서면 그곳의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초등학교 일학년 소풍 때, 그때도 신비로운 길의 유혹에 끌려 홀로 숲 속을 헤매었던가. 결국 나를 찾아낸 담임선생님한테 뺨이 얼얼해지도록 얻어맞고 난 후에야 길로부터의 환상에서 깨어났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얼른 세수를 하고 가방을 정리한 후 방을 나섰다. 일층 계단 앞에 가니 풀여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종일 달리느라 피곤했을 텐데 말끔한 얼굴이었다.

“반갑다. 친구야.”

“오냐. 준비는 됐겠지?”

“고럼. 오늘도 힘내보자.”

나와 풀여치는 숙소를 빠져나와 오솔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복잡한 국도를 피해서 한적한 지방도로를 달리기로 했다. 날카로운 직선의 길이 아닌 꼬부랑 꼬부랑 길을 달리노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길은 물을 만나면 감싸 안으며 지나가고 높은 언덕을 만나면 엉금엉금 함께 올라갔다. 참으로 평화롭고 유순한 길이었다. 풀여치와 나는 함께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달렸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풀여치가 ‘찌르르 찌르르’ 화음을 넣고 풀여치가 노래를 부르면 내가 ‘헤이~ 에브리바디 쎄이 요!”를 외쳤다. 신나게 달리다보니 어느새 아산을 지나 충청남도 예산에 접어들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배가 고팠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조그마한 구멍가게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니 잠바를 파고드는 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시간이 갈수록 다리에 힘이 풀리고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나무가 양 옆에 길게 줄지어 선 길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나무들에는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사과가 나무에 달려 있다니! 나는 의아한 눈으로 사과를 바라보고, 사과가 달려 있는 나무의 이음새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본드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늘상 궤짝이나 비닐봉지에 담긴 사과만 보았지 나무에 달린 진짜(?) 사과를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와와’ 감탄사를 흩뿌리며 나무들 사이를 달렸다. 사과들은 마치 나무에 달려 있는 빨간 종 같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에서 ‘딩딩동동’ 향긋한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마침 사과를 따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막 사과를 따고 있는 아주머니께 말을 건넸다. 우리 엄마 연배쯤 됐을까. 검게 그을리고 얼굴엔 잔주름이 퍼졌지만 눈빛이 샛별처럼 맑았다.

“아주머니. 사과가 정말 탐스럽네요.”

“탐스럽다 뿐인가. 올해는 사과가 잘 돼서 예술이유, 예술.”

“그러면 아주머니는 예술가이신가요?”

“그럼 말이 그렇게 되나? 후후. 그나저나 이 사과 이름이 뭔지 알유?”

“글쎄요. 그냥 사과로 보이는데… 사과에도 이름이 있나요?”

“선홍, 홍로, 추홍, 아오리, 양광, 부사, 능금, 국광 감홍… 사과 종류만 해도 천 가지가 넘슈. 우리 사과는 그중에서두 빛깔이 젤루 고운 홍옥이유.”

홍옥… 사과라는 말보다 홍옥이라는 말이 더 근사하게 여겨졌다. 그러고보니 햇살에 빛나는 사과들이 알알이 붉은 보석처럼 보였다. 백설공주를 유혹한 것도 바로 이 빨간 사과였을까.

“자전거 타구 어디 멀리서 왔나벼.”

“네. 도시에서 왔어요”

“아이구, 이게 워쩐 일이랴? 우리 사과 줌 챙겨줄테니 가면서 줌 드슈.”

아주머니는 내 배낭까지 내리게 하더니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때까지 사과를 넣어 주셨다. 나는 배도 고픈데다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보여서 사양 한 번 없이 넙죽 받았다. 한 입 깨어 물자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나는 가방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과의 오솔길을 필름에 담았다. 맘씨 고운 아주머니가 주신 사과도 찍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 찍은 사진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왔다면 벌써 수십 장을 찍고도 남았을 텐데… 약간의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굳이 필름 카메라를 가져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진을 함부로 찍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늘과 강물과 꽃과 구름… 그 모든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고 싶었다. 부산함으로 그들이 지켜온 신성한 비밀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침묵을 지킬 것. 사진으로 찍기보다 가슴에 오래 새겨둘 것. 충분히 감탄할 것. 하지만 때로는 가슴에만 담아 두기엔 너무 아쉬운 순간들이 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 그럴 때야 말로 필름 카메라를 꺼내야한다. 필름 카메라는 빛을 끌어 모으며 한 장의 필름 속에 인생의 따사로운 순간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오솔길 사이 사이로 돌아다니다보니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길이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데로 가기로 한 여행이었지만 길이 지도에 나와 있지 않으니 불안했다.

“풀여치야. 우리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애. 이 길은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이라구.”

“뭐 어때?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고 길이 아닌 건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길은 서로 만나게 돼 있어. 사람이 혼자가 아니듯 길도 그렇거든.”

풀여치와 나는 숲 속의 작은 길을 한참동안 달렸다. 길은 혼자서 구불구불 달리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비로소 큰 길과 만났다. 616번 지방도로. 이제 길은 넓어졌고 길 양편으로 빈 들이 펼쳐졌다. 어제 본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추수를 끝낸 빈 들. 그 황량하고 메마른 풍경 위로 고요히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의 빈 들은 세상의 절망을 모두 담고 있는 구덩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의 빈 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깨끗한 원고지 혹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캔버스처럼 보였다. 그 위에 희망의 언어를 써내려가고 사랑의 빛깔을 입히는 것은 순전히 순례자의 몫이리라. 나는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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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2개

  1. 푸른태양말하길

    글도 맛갈나고
    그림도 정말 맛갈나군요^^
    풀여치 보는 내내 행복이 밀려오네요…

  2. 서울사는만두말하길

    사과의 고장 예산까지 갔군요!

    열심히 여행하고, 열심히 취재하고, 그래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욱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배문희 작가가 됐음 합니다!!! 화이팅~

    우리는 한-미 FTA 죽자살자 막을테니까… 편하게 여행 다녀오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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