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맑스를 읽는 청년

- 고병권(수유너머R)

작년 초였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연구실 카페에 들렸는데 한 청년이 맑스의 <경제학철학초고>를 읽고 있더군요. 세미나 교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몰입하고 있는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물었습니다. 재밌냐고. “맑스를 읽어보니 알겠어요. 우리, 확실히 소외된 것 같아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진지한 답변을 듣자마자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그 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책의 소외론, 특히 ‘유적본질’ 개념을, 맑스가 헤겔 철학에서 자유롭지 못한 증거라고 했지요. 카페에서 그 청년을 보기 두어 달 전에도 저는 맑스에 대한 강의를 하며 그 책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인간’을 주제로 <경제학철학초고>에 대한 에리히 프롬과 루이 알튀세르의 독해를 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참 묘합니다. 맑스를 읽고 자신이 소외된 것 같다고 말하는 그 청년의 진지한 표정을 보는 순간, 이 책을 둘러싼 모든 논쟁을 뒤로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겁니다.

이러저런 알바를 하며 사는 한국의 한 청년이 맑스를 읽으며 자기 노동의 소외를 진지하게 깨닫는 것, 심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책이 조금 어렵기는 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 같다고. 가령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동물과 구별된다고 하는데, 그럼 노동을 할 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껴야 할 거 아니냐고. 그런데 노동할 때는 영혼이 사라져 창백해지고, 겨우 동물로 돌아갔을 때, 그러니까 밥을 먹는 짧은 시간, 잠시 담배를 피며 숨을 쉬는 시간, 그리고 일이 끝나 동굴 같은 집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말해 동물처럼 먹고 마시고 쉬는 그 순간에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답니다. 사실 맑스는 노동자라는 이 ‘혈거인’은 가장 편안함을 느껴야 할 동굴(집)에서조차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언제든 쫓겨날 수 있으니까요. 맑스를 읽던 청년이 고개를 떨구는 게 여깁니다. 동굴처럼 어둡고 좁은 고시원, 책상에 의자를 올려놓고 다리를 폅니다. 그런데 잠을 청하자마자 불안한 꿈이 그를 덮칩니다. 맑스의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제 21세기 한국에서 맑스를 읽고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전율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주변에서 맑스를 읽어낼 두뇌를 본 적은 있지만 맑스를 읽어내는 감성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앞에 스마트폰을 든 채 맑스를 전율하며 읽어내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미 소통과 단결의 첨단 장비를 갖춘 이들이, ‘이제 잃은 것은 억압과 착취의 쇠사슬뿐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 그러고 보니 이미 만국의 젊은이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위클리 수유너머> 90호 특집은 전태일입니다. 그가 죽은 지 41년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그의 외침을 이번호 표제로 달았습니다. 그리고 ‘청년유니온’ 조합원분들의 글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청년유니온을 방문했을 때 젊은 위원장님이 그러더군요. 왜 고등학교 때까지 노동권에 대해서, 노동조합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화가 난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하는 십대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법에 규정된 내용조차 보호받지 못한 채 커피전문점 등에서 착취를 당하는데. 청년유니온이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나 노동법이라도 지키라며 싸우는 걸 보면 역사 속에서 전혀 나이 들지 않는 청년 전태일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 시대는 청년들이 맑스에 전율하고 전태일처럼 절규하는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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