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3·1 운동의 ‘밥’ ― 수원 장안면 사람들의 1919년 봄

- 권보드래

수원 장안면이라면 3·1 운동 당시 공세적인 시위를 벌인 것으로 이름 높은 고장이다. 4월 1일 밤 장안면 및 이웃한 여러 면 산 위에서 봉화가 솟은 데 이어, 3일에는 장안면과 우정면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보통 지방에서의 시위가 장날 군중이 모인 와중에 몇몇이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작되었다면, 장안·우정면에서의 시위 양상은 한결 조직적이다. 당시 면내 장안리 마을 소사였던 박복룡의 말에 따르면 동네 구장들이 시위를 협의하고 소사들을 시켜 집집마다 결정을 통보토록 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이장에 해당하는 구장들뿐 아니라 조선인 순사보까지 계획에 참여했었던 모양이다.

후일 검·경에서 살인반·방화반 등을 미리 조직해 두지 않았냐는 신문이 거듭되었을 정도로 장안·우정면에서 벌인 시위의 양상은 폭력적인 바 있었다. 이들은 먼저 장안면사무소를 포위했고, 면장을 대열에 동참시킨 후 우정면으로 가서 역시 면사무소를 습격, 서류를 불태우고 주재소로 향했다. 대열은 2천여 명으로 불어 있었다. 주재소에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와 조선인 순사보 셋이 있었는데, 군중이 둘러싸고 위세를 과시하자 조선인들은 슬쩍 빠져나가 만세를 불러 보이곤 마을로 달음박질쳤다고 한다. 가와바타만이 총을 쏘며 맞서다 성난 군중의 돌팔매질에 죽었다. 면사무소에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까지 살해한, 그야말로 과격한 시위였던 셈이다.

3·1 운동 당시의 지방 시위가 대부분 그렇듯 장안면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적어도 청년층 이상의 남성은 다 나서다시피 한 운동이 어떻게 점화되고 확산되었으며 어떻게 죽음까지 불사하는 극한투쟁의 양상을 띠었는지 확인하긴 어렵다. 체포되어 신문에 시달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오지 않는 집엔 불을 지른다고 했다, 몽둥이 찜질이라도 할 듯 으르댔다고 진술한다. 모의하고 선동한 이는 없고 엉겁결에 끌려 나왔다는 사람만 가득한, 어쩔 수 없는 재판정 광경에서 주체의 논리, 참여의 동기는 명백할 수 없다. 그러나 시위 도중이라면, 겁먹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독립이 됐다, 혹은 된다는 소문에 한껏 고양됐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이후 숨죽인 채 근 10년을 살았던 후다. 꼭 민족이 좋고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세금이 신설되고 부역에 동원되고 물가가 폭등하는 세월을 불평 한마디 제대로 토하지 못하고 살아내야 했던 끓는 속내는 1919년 봄에 모처럼 속 시원한 시절을 맞았다.

버릇대로 잡기판을 벌였다가 몇십 대 곤장을 맞았던 사람, 벼 품종을 바꾸고 송충이 잡고 간척공사에 내몰리는 데 진저리내던 사람, 검은 색 순사복만 봐도 지레 떨어야 했던 사람들은 세상이 요동치는 낌새를 민감하게 포착했다. 유럽에서 큰 전쟁이 끝나고 강화회의를 열고 있는 중인데, 독립할 뜻을 굳건히 표명한다면 어떤 민족이든 독립케 해 준다는 소문이 떠도는 중이었다. 만세를 부르면 독립할 수 있으리란 말은 곧 이미 독립이 됐다는 풍설로 번졌다. 면사무소며 주재소로 몰려가, 조선은 이미 독립됐으니 일본인 관리들은 돌아가라고 위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다. 반질반질 닦은 면사무소 마루, 예전이라면 신을 벗고 올라갔어야 할 바닥을 흙발로 밟으면서 사람들은 먼저 지긋지긋했던 세금 관련 서류를 찾았다. 몽땅 찢고 불태운다면 세금 따윈 안 내도 될 것이라 믿으면서. 장안면에선 “지금부터는 못자리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될 것 같은 기대 한편으론, 속 시원하게 싸우고 세상을 하직케 되리란 예감도 있었던 것 같다. 장안면과 우정면에선 밤이 깊어가면서 몇 번이고 “오늘이 이 세상 밥을 먹는 마지막 날이다.”란 말이 나왔다. 일본 순사며 병정들이 올 터이니 산에 숨어 기다리자, 앞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타 넘어가 끝까지 싸우자, 이런 살기등등한 말이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근방 집집에 자리 잡고 쌀을 털어 밥을 해 먹었다. 밥은 언제나, 평범한 인생의 애오라지 소망이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 떡 해 먹고 술 걸렀던, 그 후손들의 선조들은 생애 마지막 밤을 준비하기 위해 따뜻한 밥을 지었다. 머리엔 수건을 동여매고 손에 손엔 소나무 몽둥이를 들고. 가장 적극적이었던 축은 “무덤의 봉분을 짓는 극하층 사람들”과 “나쁜 짓을 하다가 태형을 맞은 자들”이었다고 한다. 면장이었던 김현묵의 말이다.

응답 3개

  1. 말하길

    그 시간은 아니었지만, 공간적으로는 같은 좌표에 살던 사람 중 하나임에도. 전혀 새롭고 가슴 뜨끈해지는 이야기네요. 역시 역사는 교과서의 기록보다 현장성에서 더 가깝게 와닿는 힘이 있어요.

  2. 고추장말하길

    짠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역사적 인간의 유한성과 무한성이 다 담겨 있는 일화처럼 보입니다. / ‘무덤의 봉분을 짓는 사람들’. 덤님은 ‘봉분을 짓는 사람들’ 못 만나셨나 보군요. 제가 어렸을 때 그런분들 항상 많이 뵀는데. 봉분을 제대로 만드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저희 마을에는 한두 분 계셨는데, 일꾼들이 그 분 감독하에서 무덤봉분을 만드셨지요. 술한잔 걸치고 불콰한 얼굴로, 지팡이 들고는 ‘거기 그렇게 둘러치면 안 된다’고 호통치던 그 할아버지-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생각이 나네요.

  3. 말하길

    오, 가슴 뭉클해지는 역사입니다. 3.1운동에 이런 봉기의 숨결이 숨어 있었군요. ‘독립이 된다’와 ‘독립이 됐다’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사라지게 하는 군중의 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가 전해집니다. 그런데 ‘무덤의 봉분을 짓는 극하층 사람들’이란 무슨 뜻인가요? 무덤의 봉분을 짓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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