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17 – 운동의 도덕성

- 고병권(수유너머R)

1. 도덕적 진압

지난 10월 29일 밤 리버티스퀘어에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 신문과 방송 몇 곳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점거자들의 꼬투리를 잡으려 했던 세력들이 호재를 만난 듯 흥분했다(묘하게도 나는 이 사건을 한국 뉴스를 통해서 먼저 접했다. 참고로 여기 언론은 한국의 신문과 방송보다는 훨씬 차분하게 소식을 전했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적외선 투시경으로 봤는데 대부분 빈 텐트이고 잠은 어디 다른 데서 편하게 자고 온다는 둥, 평소 뉴욕 길거리를 배외하는 홈리스들이 밥 먹고 잠자는 장소가 되었다는 둥, 마약을 거래한다는 둥 정말 온갖 파렴치한 공격을 해대고 있던 터였다(언젠가 점거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은 ‘홈리스들이 여기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어리석은 비난에 대한 현명한 답변이었다.). 어떻든 시위에 대한 소위 도덕적 진압을 시도한 것이다.

도덕은 시위대와 시민의 관계를 해체하고 그들을 고립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러고 보니 1991년의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시위에 참여한 대학교 1학년 학생을 경찰들이 몰려가 쇠파이프로 쳐 죽였던 일, 그 일을 시발로 참 많은 이들이 독재정부에 항의하며 분신하고 투신했다. 궁지에 몰린 보수 세력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게 바로 도덕적 꼬투리였다. 그 와중에 유서 대필 의혹이 나왔고 주류 언론에서는 죽음을 조장한다며 시위자들을 ‘죽음조차 수단화’하는 파렴치한들이라고 공격했다(유서대필 사건은 선고를 뒤집을 강력한 자료가 2007년에 발견되면서 현재 재심여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정권에 의해 조작 혐의가 짙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에 도덕적 비난의 결정판이 나왔다. 외대를 방문한 총리에게 대학생들이 계란과 밀가루를 던졌는데 그것이 ‘패륜’이라는 이름으로 신문 화려하게 1면을 장식했다. 그 사진들의 선정성과 공격성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당시 총리 정원식은 1천5백명의 교사들을 단지 노조 결성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해고해서 길거리로 내몬 당사자였다. 그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졌는데 그것이 선생에 대한 학생의 폭력으로, 말 그대로 ‘패륜’으로 틀 지워진 것이다. 경찰들이 집단적으로 한 청년을 쇠파이프로 때려죽인 사건은 ‘감히 총리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진 대학생들’의 ‘패륜’으로 그렇게 봉합되었다.

11월 7일, 그룹들의 ‘Spokescouncil’이 머리 버그트롬(Murry Bergtraum) 고등학교에서 처음 개최되었다.(사진: occupywallst.org) 이 회의에 대해서는 리포트16의 그레이버 글 참조.

11월 7일, 그룹들의 ‘Spokescouncil’이 머리 버그트롬(Murry Bergtraum) 고등학교에서 처음 개최되었다.(사진: occupywallst.org) 이 회의에 대해서는 리포트16의 그레이버 글 참조.


이번 성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운동과 도덕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된다. 도덕은 운동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어떻든 성폭력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사건의 개요는 “Transforming Harm & Building Safety: Confronting Sexual Violence At Occupy Wall Street & Beyond” (occupywallst.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건이 발생한 날 아침, 점거자들 중 피해여성을 돌보고 변호할 여성 그룹(정서적, 의학적, 법률적 도움을 제공할 사람들로 구성되었다)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고 그녀와 논의를 한 후 가해자를 경찰에 고발했다. 지금 가해자는 구속되어 있다. 사건이 공개되자 주류 언론에서는 현재의 점거 시위 자체를 문제 삼았고 점거자들을 도덕적으로 문란한 이들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도덕적 비난은 피해자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런 곳에서 그런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분명히 성폭력의 문제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도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생각이 다르다. 아니 좀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운동이 도덕적이어야 하는지, 운동가가 도덕적인 인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다. 나는 ‘인간인데 어떻게 완전히 도덕적일 수 있느냐’는 식으로 운동가를 옹호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현재 미국은 2분에 한 건씩 성범죄가 일어나는 나라’라는 식으로 문제를 무마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또 운동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부도덕한지를 고발해서 피장파장이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할 생각도 없다.(가령 이번 시위를 진압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뉴욕의 전임시장 줄리아니, 그는 매춘여성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도덕적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항상 뉴욕에 도덕과 질서를 세웠다고 자랑하지만, 부인을 두고도 버젓이 애인과 다니며 혼외정사를 벌인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 공화당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 선두를 다투고 있는 허먼 케인은 여러 여성들로부터 성추행의 가해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나는 그저 운동을 도덕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2. 도덕적 문란이 아니라 폭력이 문제다

한마디로 나는 운동이 도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이 도덕적 악을 조장하고 허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미리 당겨 말해두자면 운동에 대한 도덕적(moral) 접근이 아니라 윤리적(ethical)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나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도덕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운동에 선과 악을 나누고 정의의 심판대를 끌어오는 도덕적 모델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점거처럼 지도자를 거부하고 자발적인 협력의 운동을 구성하는 경우,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을 나누고 그것을 심판할 법정을 세우는 일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을 리버티스퀘어의 공동체에 세우는 순간, 아니 그것을 각자의 마음속에 세우는 순간, 위계와 구획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가 점거하고 있다’(11월 2일)

‘우리가 점거하고 있다’(11월 2일)


도덕주의와 사법주의 사이에는 깊은 공모관계가 있다(도덕이란 앞으로 법이 될 잠재적 판단들이거나, 법으로 곧바로 표현되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사람들에게 명확히 심어져야 하는 판단들, 혹은 법으로 제정할 필요 없이 사실상 실행되고 있는 사회적 명령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은 법의 토양이면서 동시에 보완물이다). 법과 도덕은 이미 상정된 권위와 위계에 대한 복종을 전제한다. 이 권위와 위계에 대한 의심은 엄격히 금지된다. 이는 개별적 판결에 대한 복종과 불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법정의 성립 자체가 요구하는 복종에 관한 것이다. (푸코가 인민법정의 성립에 깊은 회의를 표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지난 리포트에서 ‘해방구’로서 ‘리버트스퀘어’가 갖는 의미를 일종의 ‘판단중지’라고 명명했다. 그동안 삶을 지배해온 여러 원칙들을 괄호치고 의심한다는 의미에서였다. 법과 도덕의 ‘판단금지’는 정확히 이 ‘판단중지’의 반대편이다. ‘전제를 의심하지 말라’와 ‘모든 전제를 의심하라’. 우리가 해방구에 다가갈수록, 다시 말해 우리가 심연으로 내려갈수록, 우리는 그동안의 원칙과 규범들이 금지해온 선을 넘어 누구든 조건없이 만나고 누구에게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운동이란 이처럼 선을 넘고 벽을 뚫는 일이지만 운동에 도덕이 들어오면 선이 새로 생기고 벽이 새로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니체가 던진 과제, 즉 ‘선악을 넘어서’도 가치평가가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를 지배해온 원칙들을 괄호 친 상황 속에서도 판단이 가능한지, ‘판단금지’된 법과 도덕의 전제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좋음(good)과 나쁨(bad)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가 스피노자가 선악(도덕)을 비판하며 윤리학을 정립한 곳이고,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강함’과 ‘약함’을 구분한 곳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내 개인적 경험을 통해 우회해보려고 한다. 언젠가 나는 내가 참여하는 코뮨 수유너머 안은 물론이고 수유너머와 다른 코뮨이 만난 자리에서도 어떤 문제가 생겨났을 때 사용되는 용어들이, 가령 국가기관에 대해서 사용하는 용어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권리의 침해’니 ‘정의의 실현’이니 하는 말들은 코뮨들의 구성에서 별 힘을 쓰지 못한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만날 때, 한 코뮨이 다른 코뮨을 만날 때, ‘내게 이런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기 십상이다.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을 펴도 사람들은 그의 태도 때문에 그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있다(‘네 말이 옳아, 하지만 난 너랑 함께 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도 없다. 그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코뮨에서의 ‘권리’ -사실 이것은 법에서처럼 선험적으로 규정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때의 ‘권리’는 ‘힘’이나 ‘능력’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는 ‘함께 함’의 ‘과정’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권리를 가진 이들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함’을 통해서 권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점거시위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점거자들의 권리는 그들이 ‘함께 함’을 통해서 구성한 ‘힘’ 만큼이다. 법에 규정된 시위자의 ‘권리’는 경찰을 상대할 때만 부차적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 코뮨에서 ‘권리의 박탈’, 다시 말해서 ‘무능력’은 ‘코뮨을 구성할 수 없음’에서 온다. 코뮨의 반대말은 해체와 고립이다. 누구에게 자격이 있고 누가 권리를 가졌는지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심판에 참조할 선험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법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거꾸로 그들이 법과 도덕에 의해 선험적으로 규정된 자격과 조건을 넘어, 다시 말해 척도를 넘어, 척도를 공유하지 않은(incommensurable) 것들의 연대를 만들어 내는 힘을 보여줄 때, 그들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윤리적’이고, 니체적 의미에서 ‘강한’ 것이다.

‘용감한 월스트리트 점거자’들로부터 받은 털실로 뜨게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 코뮨의 능력이란 통약불가능한 것을 서로 엮는 뜨개질의 기술?

‘용감한 월스트리트 점거자’들로부터 받은 털실로 뜨게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 코뮨의 능력이란 통약불가능한 것을 서로 엮는 뜨개질의 기술?


이번 성폭력 사건에서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도덕성이 아니라 폭력이다. 즉 성종 방종이나 문란이 문제가 아니라 점거라는 공동 행위를 해체해버린 끔찍한 폭력이 문제였던 것이다. 에로스의 강도와 양상에 대한 사회의 도덕적 기준은 다르기도 하지만(한국에서는 점거시위 중인 연인들이 섹스를 한다면 말 그대로 난리가 날 것이다), 무엇보다 에로스의 통제를 둘러싼 도덕적 원칙을 들이대서 운동을 단죄할 수는 없다. 에로스를 가꾸는 것은 말 그대로 연대를 가꾸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섹스를 의미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선험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성폭력은 그 에너지를 사랑의 반대방향으로 바꾸는 끔찍한 일이다. 폭력은 관계의 파괴이다. 폭력은 피해자를 무능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이전에 가해자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가해자의 무능력함의 산물이다. 상호 협력적 관계를 구성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할 때, 기존의 권위나 힘(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에 의존하여 명령하고 지배하는 관계(사실상 관계의 해체)를 산출하는 것이다. 폭력은 상황 전체를 얼어붙게 만든다. 이번에 자행된 성폭력은 점거 운동을 함께 하는 이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과 아이들이 즐겁고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파괴해버렸다. 폭력이 반동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 ‘능력으로부터 분리된 힘’(=무능력)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폭력은 무능력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무능력으로의 반동적 전화를 산출한다.

3. 마을의 건설

지난 일요일(6일) 저녁 제너럴 어셈블리를 보러갔다. 이번 사건이 웹사이트에 공식적으로 게재된 다음 날이기도 했고 며칠간 리버티 스퀘어를 찾아가보지 않은 탓에 분위기가 어떤지 보기 위해서였다. 분위기는 여전히 활기찼다. 두 가지 의제가 올라왔는데 하나는 ‘마을만들기[타운플래닝, town planning]’였고 다른 하나는 뉴욕의 리버티스퀘어에서 워싱턴DC의 맥퍼슨스퀘어(McPherson Square)까지 행진-이동식 점거(mobile occupation)-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귀에 들어온 것은 ‘마을 만들기’였는데 군대식 텐트(army tent)를 쳐서 리버티스퀘어를 겨울에 주거하기 적합하게 마을로 만들어가는 계획이었다. 제안자 중 핵심 인물이 사정상 참석하지 못해 자세한 계획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단지 겨울을 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코뮨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 발전기를 가져가자 자전거를 이용한 자가발전시스템을 구축했다.(11월 2일)

경찰이 발전기를 가져가자 자전거를 이용한 자가발전시스템을 구축했다.(11월 2일)


‘여성들이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중’이라는 피켓. 지금 리버티스퀘어에는 타운플래닝이 진행 중이다.  (사진:occupywallst.org)

‘여성들이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중’이라는 피켓. 지금 리버티스퀘어에는 타운플래닝이 진행 중이다. (사진:occupywallst.org)


범죄와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식은 공안(감시카메라나 순찰 따위)을 끌어들이거나 자체 공안을 조직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문제의 발생이 사전에 제어될 수 있는 관계의 구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쉽게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관계의 구성에 있다(이웃관계가 파괴됨으로써 아파트 문을 걸어 잠그고 감시카메라와 경찰초소를 세워 자기 집을 스스로 감옥으로 만드는 현대 사회의 구성을 생각해보자). 숙소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정원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축제를 열 것인가. 이 모든 활동이 일상을 새롭게 꾸리는 방식으로 공안을 대체해가는 활동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 주에 있을 의회의 재정감축안 발표에 항의하기 위한 뉴욕-워싱턴 행진. 제안자들이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이름을 쓸 것인지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결국 ‘아큐파이 하이웨이’로 결정이 난 모양이다. (사진: occupywallst.org)

다음 주에 있을 의회의 재정감축안 발표에 항의하기 위한 뉴욕-워싱턴 행진. 제안자들이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이름을 쓸 것인지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결국 ‘아큐파이 하이웨이’로 결정이 난 모양이다. (사진: occupywallst.org)

11월 6일의 제너럴 어셈블리 모습. 여전히 그 열기가 뜨겁다.

11월 6일의 제너럴 어셈블리 모습. 여전히 그 열기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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